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3화 (24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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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2)

달이 중천에 떴을 무렵, 남회성 남쪽의 작은 뜰.

“공주 전하, 준비 되셨습니까?”

익천첨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우연은 심호흡을 하고 은사(銀絲) 너울을 내려 얼굴을 가리고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익천첨은 달빛이 머리 위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방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소녀를 못 알아볼 뻔했다. 우연의 흰색 긴 치마 위로 흐르는 달빛이 물처럼 주름 사이사이에 모였다. 드러낸 맨 어깨에는 상아 같은 질감에 밀라 성문이 새겨진 팔 장식이 휘감겨 있었다. 금색의 긴 머리카락은 아주 높이 묶어 쌍익 모양으로 만들어진 순은 재질의 관(冠)을 꾹 눌러 씌웠다. 우연의 얼굴은 은사 너울에 가려져 있었는데 너울 사이로 순은 성성란(星星蘭)이 별처럼 반짝거려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고막. 준비됐어요.”

우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익천첨은 긴 창을 손으로 짚고 공손하게 반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마땅히 갖춰야 할 예절이지만, 온전히 예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는 다시 한번 이런 차림을 한 사람이 달빛 아래 선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고향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청주 숲의 녹나무 향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오래 전 그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직 아이였던 그는 고개를 들고 태격리사 신전에서 가장 높은 나무꼭대기를 쳐다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성녀(聖女)가 그윽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숲속은 천지가 처음 열리던 순간처럼 고요했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절했다. 익천첨은 멍하니 서서 작은 활을 꼭 쥐고 이 모든 것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했다.

“고막.”

익천첨은 정신을 차리고 팔을 내밀었다.

뜰 정중앙에는 녹나무 원목을 세 겹으로 쌓아 만든 네모난 단(壇)이 있었다. 사람 키만 한 높이였다. 우연은 익천첨의 팔을 짚고 천천히 그 위로 올라갔다. 우연은 거대한 치맛자락을 펼치고서 가운데 놓인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나무 단 앞에 시립(侍立)한 익천첨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뜰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문 밖에 있던 사람의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달빛에 은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몸에 녹류궁을 비스듬히 걸친 사내가 오른손으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익천첨은 우연을 향해 몸을 숙이고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 이자가 바로 제가 말씀드렸던 고향에서 온 사자, 사달극성방의 익한입니다.”

“사달극성방의 익한 복이가 사달극입니다.”

익한은 정중하게 반 무릎을 꿇었다.

“고향의 무사로군요.”

우연의 목소리는 전혀 평소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허하면서도 차가웠다.

“태격리사의 찬란한 영광을 지키려는 용기와 결심을 품고 그 멀리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익한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공주 전하! 온 대지를 뛰어 넘어 마침내 공주 전하를 찾았습니다. 학설로서 제 모든 충성을 공주께 바칩니다. 목숨도 걸겠습니다! 공주 전하의 축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에 어느 학설이든 태격리사 희무신의 축복을 얻을 수 있음은 최고의 영예이지요.”

“올라와요.”

익한은 고개를 숙이고 단에 올랐다. 그는 두 무릎을 모두 꿇고 앉아 눈을 감았다.

우연은 잠자코 있다가 살며시 익한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신의 자식이여, 신은 자신의 눈처럼 너희들을 아끼고 사랑하노라. 멀리 가고 싶다면 고개를 들기만 하면 되나니. 바람 속에서 신이 너희의 이마에 입을 맞출 것이다.”

우연은 얼굴을 가린 너울을 젖히고 살며시 익한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우연은 놀랍게도 이 말없는 청년의 피부가 매우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마에 닿은 입술이 데일 듯 뜨거웠다.

우연은 다시 너울을 덮어쓰고 반듯하게 앉았다. 그러나 익한은 아직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의 몸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익한이 힘껏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2년을 찾았습니다! 2년을요! 드디어 찾았습니다!”

익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살에 양 날개가 꿰뚫린 새처럼 사달극성방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내 정혼자와 어머니를 인질로 붙잡고 돌아오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보지 않았고 그들은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잃었지만 희무신의 소식을 가지고 청주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익한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묻어났다. 그는 맑고 투명한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제 머리 위 모든 별의 신이시여, 우리 우족에게 미래를 하사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고귀하고 용감한 학설은 그렇게 녹나무 단에 엎드린 채 큰 소리로 목놓아 울었다.

익천첨이 올라가 익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어나게. 이미 태격리사 신전의 찬란한 빛을 보지 않았는가. 이리 슬퍼할 일이 또 무에 있는가?”

익한은 눈물을 훔치고 익천첨을 따라 단 아래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애쓴 끝에야 괴로운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나무 단 위에 반듯하게 앉은 공주가 한 겹의 은사 너울 너머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익한은 공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느껴졌다. 문득 공주가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향은 괜찮은가?”

익천첨이 물었다.

“측백나무는 있던 구역에서 사라지고 들풀이 숭고한 측백나무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제격림의 연목(年木)은 벌써 사나운 불에 포위되었고요. 고향의 숲에는 짙은 연기가 자욱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익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우황께선 이미 돌아가셨고, 각 성방을 호령할 계승자가 없으니 야심가들은 뒤질세라 앞다투어 전쟁터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숲이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고귀하던 학설 무사는 하늘을 나는 살수가 되었습니다.”

익한은 다시 일어나 우연을 향해 절을 올렸다.

“공주 전하, 고향에는 희무신의 노랫소리가 필요합니다!”

8월 초닷새, 한주 북도성.

여수우는 뒷짐을 지고 금장궁 안을 천천히 걸었다. 여복과 낙자언이 양쪽에 서 있었다. 낙자언이 이른 아침 금장궁에 불려와서부터 지금까지 여수우는 같은 모습이었다. 여수우는 옛날처럼 낙자언에게 살갑지 않았다. 여수우가 내내 말이 없자 낙자언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수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낙 형제, 오늘 아침 하당에서 전갈이 왔소. 북도에 사절을 보내겠다더군. 나를 대군으로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조건들 그대로 내게도 이행하겠다고 하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낙자언은 잠시 침묵했다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제 짐작과 비슷하군요. 하당은 자신들이 북륙과의 외교에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우리 순국에게서 청양과의 동맹을 빼앗아갈 생각이네요.”

“형님, 10년간 낙 형제와 양추후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했습니까. 하당 때문에 좋은 벗인 순국에 밉보일 필요는 없어요.”

“낙 형제, 돌려 말하지 않겠소.”

여수우가 낙자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낙 형제는 내 좋은 벗이요. 내가 믿는 사람은 그대이지. 지난번에 하당의 사절 탁발산월과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소. 탁발산월은 만족인이지만 그대만큼 내게 관심은 없었소. 하당은 꿍꿍이를 알 수 없어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솔직히 이 시기에 순국 때문에 하당에 밉보이고 싶지도 않소. 원래 봄에 고리격대회를 열고 초원의 부락들에 대군의 지위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그들 중 일부가 참석을 원치 않으니 현재 대군으로서 내 자리는 불안정하오. 이런 때 누구든 나를 지지해 주면 내게는 유리하지. 하당국도 마찬가지요. 그들이 공손하게 서신을 보내왔으니 나로서도 그런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지 않겠소.”

낙자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군의 뜻은 알겠습니다. 저도 그 때문에 대군께 꽁하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맹우는 본디 서로 이용하는 것으로 저와 대군 사이의 우정과는 무관한 일이지요. 다만 8개월간 대군께 말씀드리지 않은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들으시면 대군의 결정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무엇이오?”

여수우는 경계심이 들었다.

“지난해 겨울 제가 동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북도성에 와서 대군께 빨리 움직이시라며 설득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대군께서는 의심해보셨습니까? 제가 그때 왜 물불 가리지 않고 북도성으로 달려왔는지, 왜 올봄까지 기다리지 못했는지 말입니다.”

여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했었소. 하지만 당시 일이 너무 많아 잊어버렸지.”

“지난해 늦가을 동륙 상양관에서 있었던 제후 대전을 아십니까? 그 전쟁으로 거의 10만이 죽었습니다. 또한 패주 영무예는 천계성에서 도망쳤고 황실은 다시 권력을 장악했지요.”

“들어보았소.”

“그럼 대군께서는 그 전쟁 중에 수만 명이 죽었다 되살아나서 산 사람과 전쟁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우는 깜짝 놀랐다.

“죽었다가 되살아나?”

낙자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는 이 소식을 유포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지만 어쨌든 수만 명의 군사가 직접 그 광경을 목도했으니 소식은 널리 퍼지고 말았지요. 지금까지 그 일은 규명되지 않았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양추후는 이 일에 큰 관심을 갖고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몰래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지요. 죽은 자를 부활시킨 사람이 바로 현재 황실에서 받드는 국사라는 것을요. 그자의 이름은 뇌벽성입니다.”

“이 일이 우리 청양과 무슨 상관이 있소?”

“대군께선 뇌벽성을 모르시겠지요. 그럼 산벽공은요?”

낙자언이 또박또박 그 이름을 뱉었다.

여수우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산벽공이라는 이름의 대윤 국사가 과거 아우 아소륵에게 기사회생의 의술을 펼쳤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뇌벽성과 산벽공 두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 마치 한 사람처럼.

“뇌벽성과 산벽공이 한 사람이오?”

여수우가 물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힘을 지녔습니다. 또한 대윤의 국사이기도 하지요. 심지어 둘은 외모도 닮았다고 하더군요.”

낙자언이 냉소했다.

“지난해 양추후께서는 아주 우연히 정보를 하나 얻었습니다. 어떤 동륙인 무리가 한주 북쪽으로 갔고 그곳에서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에게 보급을 받고 계속 북으로 향했답니다…….”

“계속 북향했다?”

여복이 화들짝 놀랐다.

“삭북부 지역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황무지요. 1년 내내 폭설이 내리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이 살 수 없소!”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대군이 보았던 산벽공과 매우 닮았습니다!”

낙자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산벽공? 그자가 왜 북방으로 간단 말이오?”

여수우는 갑자기 극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북방에는 늑대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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