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2화 (24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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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1)

여귀진은 순간 아연해졌다.

“내가 기억할 거야…….”

여귀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바꾸었다.

“그 생각은 그만해. 넌 죽을 리 없어. 계속 이렇게 깡충깡충 뛰어다닐 거야.”

“계속 이러면 요괴가 되지 않을까?”

우연은 삽시간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여귀진은 웃었고 우연은 미주를 홀짝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연이 고개를 까딱거리자 이마 앞의 곱슬한 머리카락이 살며시 들썩거렸다.

“우연, 머리 감았어?”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아침에 감았는걸. 머리카락이 또 갈라졌나 보네.”

우연은 제 금색 긴 머리카락을 흔들어 늘어뜨리고는 한 가닥 한 가닥 자세히 보았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은 금빛 장막 같았다.

“나…… 네 머리카락 만져 봐도 돼?”

“응. 또 갈라진 거 있나 봐줘. 벌써 엄청 잘라냈단 말이지.”

우연은 돌아앉았다.

여귀진은 살며시 손을 우연의 정수리에 놓았다. 손이 바람에 떨어지는 잎사귀처럼 바들거렸다. 이 손으로 영월도를 쥐고 동륙에 위세를 떨치던 뇌기도 죽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뒤 청양 소무공이 그의 일생 중 가장 따뜻했다고 기억하는 시절은 남회성 길거리에서 그가 사랑하던 소녀와 나란히 걷던 때였다. 가끔 우연도 여귀진의 손을 잡았다. 또 가끔은 폴짝폴짝 앞에서 걸어가며 큰 소리로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적막하기 그지없던 골목에서 우연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때 여귀진은 늘 자기가 아주 길고 긴 꿈을, 너무 길어서 깨어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걷다 지치면 뺨을 괴고 그곳에 앉아 큰 수레가 한 대, 또 한 대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우연은 언젠가 이런 큰 수레를 타고 멀리 갈 거라고 했다. 여귀진이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하자 우연은 그보다 한 편 빠른 수레를 탈 것이라고 했다. 그럼 항상 자신이 먼저 도착할 테고 여귀진이 쫓아오면 자기는 또 도망칠 거라면서.

여귀진은 우연과 함께했던 매 순간을 잊어버릴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되새겼다. 혹시라도 우연이 자신에게 다른 감정을 조금이라도 품은 적은 없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여귀진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거듭 우연의 긴 머리카락 사이를 쓸어내리던 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실처럼 가느다란 세월 사이를 스쳐지나가듯이. 여귀진은 시간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저 바람처럼 스치는 촉감 속에서만이 그간의 모든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비단결 같았다. 사실 갈라진 머리카락은 전혀 없었다. 여귀진의 손이 우연의 뺨 옆에 멈추었다. 우연의 귀에 손이 닿자 여귀진은 우연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우연은 큭큭큭 웃으며 피하더니 제 양쪽 귀를 감싸쥐고서 여귀진이 못 만지게 했다.

여귀진은 자기 손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스쳐 가는 바람처럼 그 감각은 조금씩 흩어져갔다.

“맞다, 오늘 욱 세자랑 약속이 있었는데.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여귀진이 일어섰다.

“야! 계산하고 가는 거 잊지 마. 나 돈 안 가져왔어.”

“응.”

“그리고.”

우연이 손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나 미주 더 마실래!”

순간 멍해졌던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는 금수 한 냥을 꺼내 탁자에 놓고 한쪽에 있던 점원에게 말했다.

“미주 더 갖다 주시오.”

점원은 대답하고 술을 가지러 갔다.

여귀진이 문간에 이르렀을 때 우연은 자기 술잔을 비우고 입술을 다시더니 여귀진이 남긴 반 잔의 술도 제 술잔에 따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 들고 홀짝홀짝 술을 마시며 심심한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연……. 나 한동안 일이 좀 있어서 자주 못 나올 거야.”

여귀진은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아 애써 억눌렀다.

“응!”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귀진은 주점 발을 젖혔다.

“바보…….”

여귀진이 나직이 말을 뱉었다.

누구한테 바보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일 수도 있고 우연에게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아련한 연정과 고백을 수도 없이 표현해왔지만 우연은 내내 알아채지 못하고 오후의 햇살 속에서 깡충깡충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대추가 잔뜩 열린 가지만 흔들었더랬다.

“아소륵, 뭐라고 했어?”

우연이 그의 등 뒤에서 물었다.

여귀진은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못들은 척 발을 젖히고 나갔다. 무기처럼 날카로운 햇빛 앞에서 여귀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길목을 돌았다. 햇빛은 골목 안까지 비추지 못했다. 금국화 깃발을 높이 든 자환궁 집금오들이 준마를 끌고 그곳에서 여귀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금오를 통솔하는 이는 놀랍게도 삼군 통수 탁발산월이었다.

탁발산월은 여귀진을 흘긋 보며 입을 뗐다.

“세자, 당신은 청양의 세자입니다. 세자는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탁발산월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직접 군마를 끌고 가 여귀진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여귀진은 갈색 말고삐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하나의 선택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말고삐를 잡느냐, 우연의 손을 잡느냐 하는 선택. 일단 무엇이든 잡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이 될 터였다. 완전히 상반된 두 갈래의 길이었다. 길 하나는 광활한 초원과 핏빛 전쟁터로 통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피리 소리 들리는 누각 마루와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있는 남회성 길거리로 통하는 길이었다.

“세자!”

탁발산월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여귀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받았다.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말발굽소리에 주점 바닥까지 살짝 진동했다. 누군가가 붉은색 커다란 깃발을 펄럭이며 바람처럼 질주해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길바닥에서 저러고 달리다가 사람이라도 부딪치면 어쩌려고?”

투덜거리던 점원이 따뜻하게 데운 미주를 가져와 우연의 앞에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이고 우연을 힐끔 보았다. 줄곧 생기 넘치던 소녀의 눈은 어두워져 있었다. 소녀는 더 이상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말없이 제 손에 든 술잔만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우연은 갑자기 술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에 우연은 눈이 부셨다. 소년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 길은 유난히도 넓어 보였다.

“아소륵…….”

우연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8월 초나흘.

황월방, 명가리.

해가 곧 질 무렵이라 옥 가게는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옥공은 총채를 들고 커다란 옥기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먼지를 살며시 털어냈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발이 걷혔다. 옥공은 고개를 들고 침침해진 눈을 크게 떴다. 청년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어깨에 은 재질의 국화 휘장을 늘어뜨리고 흑철 조각을 꿰어 만든 찰갑(札甲)을 입은 청년이었다. 옥공은 불현듯 경계심이 들었다. 은으로 만든 국화 휘장이면 아장(牙將)이었다. 손님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낮은 계급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 갑옷은 금군 기병이나 할 수 있는 복장이었다. 금군은 남회성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했다.

가게로 들어온 청년은 전혀 옥을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자주색 대옥해를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멈춰 서서 멍한 눈빛으로 갖가지 눈부신 옥 장신구(圭璧璜璋)를 훑어보았다. 머리칼은 헝클어졌고 얼굴은 땀에 절어 있었다. 갑주의 옷깃은 반쯤 벌어져 있고 거기엔 수건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막 훈련하고 돌아온 모습이었다.

옥공은 미소를 머금고 손님 곁으로 걸어갔다.

“손님, 저희가 곧 문 닫을 시간이라서요. 맘에 드는 게 있으시면 빨리 고르십시오.”

이 금군 소년은 군관다운 기개가 전혀 없었다. 청년은 어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옥기 더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을 많이 겪어본 옥공은 마음을 놓고 주위를 돌며 먼지를 털어냈다. 석양빛이 차츰 옅어지고 초를 켤 때가 되었다. 뒤돌아 촛대를 가지러 계산대로 가려던 옥공은 화들짝 놀랐다. 그 청년이 찍 소리도 내지 않고 바로 그의 뒤에 따라와 있었다. 얼마나 오래 따라다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척에서 본 청년의 눈은 먹처럼 새카만 순흑색이었다.

청년이 이미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물었다.

“나 때문에 놀랐소? 뭘 찾고 있는데…… 못 찾겠어서.”

옥공은 이내 진정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손님 눈 색깔이 특별해 어떤 옥이 떠올랐습니다. 묵담(墨膽)이라는 옥이지요. 젊었을 때 한 번 보았는데 작열하는 햇빛 아래 두어도 오로지 순흑색 빛만 띠며 흠도 하나 없는 것이 진한 먹 같았답니다. 제 평생 그런 옥은 다시 보지 못했지요……. 말이 많았네요. 손님은 무엇을 찾으십니까?”

“옥팔찌를 찾소.”

청년이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이 정도 크기에 녹색이오.”

그는 또 머뭇거리더니 좀 더 작은 원을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 크진 않고 이 정도 크기인 것 같군.”

옥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시지요? 옥팔찌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닙니다. 큰 상점에서도 다달이 수백 개를 만들잖습니까? 제 가게도 작지만 매월 여남은 개는 만드는걸요. 색깔도 청색, 백색, 녹색, 홍색, 황색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녹색이 제일 많지요. 그렇게 설명해서는 못 찾습니다. 제 가게에서 보고 마음에 드신 겁니까?”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본 적은 없어서 어떤 모양인지 확실치 않소. 내 친구가 대략 4월쯤에 여기에서 봤다고 했소.”

“4월에 보고 반한 옥이라면 지금은 없을 겁니다. 이런 작은 옥은 금세 팔리거든요.”

“그렇소……?”

청년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옥공은 살짝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 생각났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뒤쪽에서 다시 나온 그는 우지(牛脂)로 만든 초와 정교한 칠목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촛불 아래에서 상자를 열었다. 청년은 나직이 숨을 들이켰다. 불빛 속에서 짙은 초록색이 피어올랐다. 검은빛을 띨 정도로 짙은 녹색이었다. 상자 안의 옥팔찌는 진홍색 두꺼운 비단에 놓여 있었다.

옥공이 옥팔찌를 들고 돌렸다. 어떨 때는 맑고 투명해 보이더니 극도로 진한 녹색을 띠기도 했다. 여자가 눈썹을 그릴 때 쓰는 심청색 같았다.

“맞소! 이거요!”

청년이 옥팔찌를 받아 들고 어루만졌다. 그는 잠시도 손에서 팔찌를 떼어놓지 못했다.

“알아봐주는 안목 좋은 손님이 있으니 이 사반옥은 운이 좋군요.”

옥공은 노련했다. 그는 태연하게 손님을 치켜세웠다.

“얼마요?”

“금수 250냥입니다.”

“금수 250냥?”

청년은 흠칫 놀랐다.

“주위에 다 물어보고 왔소. 옥팔찌는 다른 곳에서도 금수 수십 냥이면 살 수 있고, 그게 이미 제일 비싼 값이었소!”

“옥의 질에도 좋고 나쁨이 있지요. 옥안을 가진 사반옥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본 옥석 중에서도 가장 좋은 물건입니다. 금수 250냥은 정말 비싼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렴한 물건은 팔기가 쉬워 지금까지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청년은 옥환을 쥔 채 말이 없었다. 청년의 새카만 눈썹이 절로 찌푸려지고 입꼬리가 팽팽히 당겨졌다.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옥공은 하마터면 50냥을 깎아주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옥공은 청년을 위아래로 슥 훑었다. 아무래도 금수 200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장은 하급 군관에 불과했다. 봉급만 받는다면 매달 금수 40~50냥이 다일 터. 금군에 두루 통용되는 뒷돈 챙기는 수작질도 못 배운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금수 200냥으로 값을 내린들 청년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청년은 매우 대단한 물건을 든 것처럼 옥팔찌를 한참 어루만지더니 상자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는 간다는 말도 없이 뒤돌아 떠나려 했다.

“비싸서 그러시면 뒤에 다른 물건도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옥공이 재차 물었다.

청년은 몸을 반쯤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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