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1화 (241/360)

241

3장. 비취 팔찌 (10)

백리욱은 순간 머리가 띵 했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다행히 여귀진은 무릎을 모은 채 조용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환아! 말 들어라! 네가 오늘 여기 왜 왔는지 잊었느냐?”

백리욱이 병풍에 대고 나직이 꾸짖었다.

“나는 오늘 그 만족에게 죽어도 시집 안 갈 거라고 말해주러 왔어요!”

병풍 너머의 소녀는 조금도 지지 않았다.

“환아!”

백리욱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의를 갖추어라. 너는 백리 가문의 딸이고 여귀진 세자는 북륙 금장궁의 세자로 양가는 격이 맞는 상대다. 여귀진 세자는 내 벗이기도 하고 내내 나와 이웃해 지냈다. 품성이 바른 사내이거늘 너는 무엇이 불만인 게냐? 이리 무례하게 군다면 내 아버지께 고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만족에게 시집 안 가요! 시집 갈 거면 오라버니께서 가시든가요. 왜 꼭 내가 가야 해요?”

“나는…….”

백리욱은 애가 탔다.

“나는 사내인데 어떻게 시집을 가느냐?”

“그럼 만족 여인에게 장가가면 되잖아요! 오라버니가 가세요!”

백리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오라버니.”

환 공주는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울먹이며 나긋하게 애걸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아버지께 말해줘요. 환이는 시집가기 싫어한다고 아버지 곁에서 지내고 싶어 한다고 말해주세요.”

백리욱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 큰 처자가 시집을 안 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저는 만족의 나라에 가기 싫어요. 거기에는 떡이랑 과자도 없고 과일도 없대요. 오로지 양고기뿐이라고 했어요. 그곳 사람들은 반년이나 목욕도 안 해서 때를 벗겨내면 한 근이나 나오고 몸에선 누린내가 나서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 같대요. 다들 남회에 남아 맛있는 음식도 먹고 꽃이랑 가무도 보면서 왜 나만 북륙에 갖다 버리려는 건데요?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나쁜 사람이야. 둘 다 나를 싫어해!”

환 공주는 말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나직이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대성통곡했다. 저 멀리 함께 온 시위들도 그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해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한쪽에 있던 어린 궁녀도 슬펐는지 훌쩍훌쩍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한데 백리욱은 코웃음을 치더니 앉은 자리를 힘껏 내리쳤다.

“환아, 생떼 부리지 마라. 너와 함께 자란 이 오라비가 네 잔꾀를 모를 줄 아느냐? 울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이번에 아버지께서는 결심을 내리셨다. 되돌릴 여지는 없다! 솔직히 말하마. 홍려경에서 날도 받았고 각국 제후들에게 청첩장도 이미 보냈다!”

울음소리가 단칼에 뚝 그쳤다. 병풍 너머가 잠시 조용하더니 갑자기 여리여리한 인영 하나가 병풍을 뒤집어엎으며 튀어나와 온 힘을 다해 사지를 버둥거렸다.

“시집 안 가! 안 갈 거예요! 절대 안 가요! 오라버니 미워요!”

여귀진이 고개를 들어 환 공주를 보았다. 열대여섯쯤 된 소녀였다. 먹처럼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말아 올려 가느다랗고 긴 목선을 드러냈다. 넓고 화려한 궁중 치마는 우아한 연녹색이었는데 공주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피부는 흰색 배두렁이와 별다를 것 없이 뽀얬다. 환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한껏 삐죽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자그마한 얼굴에는 애티가 가득했고, 미간에는 연홍색 매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여귀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백리환도 만족 세자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이 만족 세자는 동륙 고관댁 자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여귀진은 기(夔)와 뇌(雷) 문양이 금으로 수놓아진 넓은 도포를 걸치고 머리는 정수리에 은테로 동여 묶었다. 수수하고 차분하며 생김새가 여자처럼 고왔다. 여귀진도 백리환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호수처럼 깊고 고요했다. 백리환은 여귀진의 표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심오하고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이전에 보았던 고관 자제들과는 사뭇 달랐다.

호기심이 생긴 백리환은 손가락을 깨물며 소년을 자세히 보았다. 커다란 눈이 깜빡깜빡했다.

백리환은 얼굴이 약간 화끈거렸다. 만족 소년은 자신을 매우 진지하게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마음에 든 것이리라.

“환 공주, 환 공주!”

나이 많은 여자 하인이 다급히 다가와 공주를 끌어당겼다.

“공주를 후당으로 모셔라. 다들 눈이 멀었느냐? 어서 공주를 뫼시지 않고 뭐 해!”

시녀들이 다가와 여귀진과 백리환 사이의 시야를 차단했다. 시녀들은 대륜선(大輪扇)을 펼치고 공주를 빼곡이 에워싼 채 떠나갔다. 뒤따라가는 늙은 하녀는 뒤뚱뒤뚱 걸었다.

여귀진은 고개를 숙이고 환 공주의 미간에 찍힌 화려한 붉은색 문양을 생각했다. 사소한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 하지만 환 공주 미간의 붉은 자국을 보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꿈틀거렸다. 새끼 새가 안에서 껍질을 두드려 깨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손에 등불을 들고 한 소녀가 공중에서 붉은색 무늬가 새겨진 가면을 벗어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던 그날 밤을 생각했다.

여귀진은 자기가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마음을 꽉 비끄러맨 줄 하나가 연신 무심하게 잡아당겨지는 느낌이었다.

백리욱이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여귀진 세자, 나름 선은 본 셈이니 우리도 동궁으로 돌아가자.”

여귀진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백리욱이 또 말을 꺼냈다.

“남궁은 화원이 정말 멋있어. 근화가 막 피었는데 몇 걸음 더 걸어 후문으로 나갈까?”

순간 멍해졌던 여귀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욱이 측근 시위에게 명령했다.

“거마를 후문으로 옮겨 기다리라 해라. 너희도 같이 가라. 나는 여귀진 세자와 둘이 걸으면 된다.”

시위들도 떠나갔다. 백리욱은 앞에서 여귀진을 이끌며 문 몇 개를 지나 뒷산 오솔길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은 앞에서 또 한 사람은 뒤에서 천천히 걸을 뿐.

한참을 걷다가 백리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 누이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너무 응석받이로 자랐어. 그래도 심보가 못되진 않아. 동륙 고관댁 여식들은 십중팔구 다 이 정도 흠이 있으니 너무 언짢아하지는 마.”

백리욱은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났다.

“사실 환이는 아주 예쁘게 생겼어. 다들 동륙 제후들의 여식 중에서 소주 공주의 용모가 제일 출중하다 하지만 환이도 예쁘기로 유명해. 얼마 전 진국공이 사자 편에 과일 여지(荔枝)를 보냈어. 실은 진국 세자를 위해 아버지께 혼담의 운을 띄운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응하지 않았지. 한데 이번에 아버지께서 한사코 환이를 출가시키겠다고 하셔서 처음에는 나도 무척 놀랐어.”

“알아. 환 공주는 국주가 가장 아끼는 딸이지. 국주께서 날 좋게 봐주시니 정말 행운이라 생각해.”

두 사람은 또 몇 걸음 걸어갔다. 갑자기 백리욱이 걸음을 멈추었다.

“우족 소녀는 어떡할 거야?”

여귀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세자도 알고 있…….”

백리욱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여귀진 세자는 남회성에서 나름 유명 인사야. 동궁의 금군들이 입이 가벼워서 내게 이런 일들을 다 말해주거든.”

백리욱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환이의 오라비이다 보니 지금 하는 말에는 약간 사심이 담겼을 수도 있어. 그래도 기왕 아버지의 제안에 응해 환이와 혼인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서화와 시문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양국의 맹약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어. 다만 혼인은 종신대사이니 부디 환이에게 잘해주길 바라.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고 훗날 세자의 아내이니… 환이를 실망시키지 말아줘.”

여귀진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욱 세자가 당부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어.”

백리욱은 여귀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와 함께 몇 걸음 나란히 걷다가 불쑥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정말 도망칠 생각은 안 해봤어?”

깜짝 놀란 여귀진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백리욱을 쳐다보았다.

백리욱은 실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가끔 나도 반항적인 생각을 해.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어찌 자유로울 수만 있겠어? 드넓은 동륙 땅은 겹겹의 성문과 관문으로 에워 쌓였는데 도망을 치면 또 어디로 칠까……. 홍려시에서 혼례날은 정했대?”

“8월 스무날이야.”

백리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귀진을 내버려둔 채 오솔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황혼이 내린 화원에는 여귀진 혼자만 남았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만개한 근화가 보였다.

8월 초사흘.

우연은 자그마한 입으로 잔에 담긴 백미주를 조금 마시고는 눈을 치켜뜨고 탁자 맞은편의 여귀진을 쳐다보았다. 여귀진은 살짝 멍한 얼굴을 하고 곁눈으로 창밖의 거마를 쳐다보았다. 창문으로 스며든 오후 햇살이 여귀진의 뺨을 비추자 그는 얌전한 소녀처럼 보였다.

우연은 숨을 죽였다가 갑자기 몸을 쑥 들이밀더니 여귀진의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야!”

깜짝 놀란 여귀진이 우연을 돌아보았다.

주점 안의 사람들 모두 그 소리에 이쪽을 쳐다보았다. 멍한 소년과 잔뜩 화가 나 뾰로통한 소녀가 보였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과 여귀진, 희야는 이 주점에 자주 오는지라 주인장부터 단골들까지 셋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어디 머리라도 부딪쳤어? 왜 멍청하게 그러고 있어? 사람 불러놓고 말도 안 하고 말이야.”

우연이 여귀진을 쏘아보았다.

“아, 아니야…….”

여귀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말 어디 머리라도 부딪친 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면 곧… 고향에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돌아가? 국주가 보내준대?”

“응.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우리 만족 풍습에서는 모든 아들이 함께 말을 달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유골을 묻어야 해. 새끼를 거느린 어미 낙타도 한 마리 데리고 가는데 도착해서 낙타 새끼를 죽여. 그럼 어미 낙타는 무척 슬퍼하지.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께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어미 낙타만 끌고 가면 돼. 자기 새끼가 죽은 곳을 기억해서 길을 찾을 수 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못 찾아.”

“너무 잔인해!”

우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여귀진도 조용히 말했다.

“맞아……. 사실 나도 무척 잔인하다고 생각해.”

“근데 말이야.”

우연은 입가에 묻은 술을 슥 닦아내며 물었다.

“어미 낙타도 죽으면 영원히 무덤을 못 찾는 거 아니야?”

“맞아!”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낙타는 수명이 엄청 길어. 낙타가 죽을 때가 되면 죽은 사람의 아들들도 거의 죽고 없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 죽으면 무덤도 더는 찾을 필요 없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 죽으면 무덤도 찾을 필요가 없다…….”

우연은 살짝 울적해졌다.

“어느 날 내가 죽으면 누가 내 무덤을 찾아주려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