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40화 (24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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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9)

“우연?”

여귀진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새끼 고양이다!”

우연은 여귀진을 본체만체하고 그의 품에 안긴 고양이부터 보았다.

우연은 새끼 고양이를 제 품에 안고 녀석의 아래턱을 긁어주었다. 고양이는 간지러워 요리조리 피하며 나부댔다. 우연은 고양이의 두 뒷다리를 들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앞다리로 땅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고양이는 우연을 할퀴고 싶어도 할퀼 수가 없었다. 우연이 밀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고 뒤로 잡아당기면 또 허둥지둥 도로 물러났다. 꼭 작은 수레 같았다. 여귀진은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우연이 어디서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는 방법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알기로 청주에는 고양이가 흔치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고양이는 뒷다리를 뻥 차며 우연의 통제에서 벗어나더니 쌩하고 골목 뒤로 도망쳤다. 우연이 쫓아가려는데 여귀진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쫓아가지 마. 줄타기 하러 돌아갔어.”

우연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 쫓아가지 않았다. 새끼 고양이는 하얗고 자그마한 뒷모습만 남긴 채 점점 멀리 달아났다. 여귀진은 자기 손바닥이 뜨겁다고 느꼈지만 우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연이 이대로 고양이를 쳐다보게 두고 자신은 뒤에서 우연의 손을 잡은 채 그녀를 보자고……. 고양이는 내처 달리지만 영원히 골목 끄트머리에 닿지 못할 것이고 북적북적한 사람들 속에서 그는 계속 우연을 바라볼 것이다.

고양이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우연은 손을 뺐다.

골목은 길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골목 끝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노점이 매우 적었고 인적도 드물었다. 석양빛이 여귀진의 얼굴에 그대로 내리쬐었다. 그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골목 어귀에 섰다.

“나 간다. 가서 책 볼래.”

잠시 조용히 있던 우연이 말을 꺼냈다.

“책?”

여귀진은 멍해졌다. 우연이 많은 것을 알기는 하지만 조용히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응!”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륵은 어디 가?”

“내일 백리욱 세자와 약속이 있어. 성 밖 남궁에 구경 갈 거야. 나 말 타고 왔으니까 데려다줄게.”

우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 마차 타고 성 남쪽에 갈 거야.”

남회성은 큰 도시였다. 상인들에게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마차가 있었다. 동전 두 닢이면 탈 수 있고 외지에 가는 마차처럼 한 번에 십수 명이 탈 수 있었다. 길 어귀에서 마차를 세워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마부에게 세워달라고 하면 되었다.

“응. 그럼 조심해.”

여귀진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우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귀진의 말은 골목 다른 쪽에 맡겨둔 터라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다.

가을바람이 어느새 차가워졌다. 우연은 탕고정 문을 밀어 열었다. 생선을 끓이는 증기가 훅 피어올랐다. 증기는 생선탕처럼 진했고 약간 비린내도 났다. 우연은 코를 실룩이며 킁킁 거렸다. 온몸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우연은 손을 맞비비며 두리번거렸다. 희야는 창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대여섯 개의 백자 잔이 뒤죽박죽 놓여 있고 희야의 손에도 잔이 하나 들려 있었다. 접시에 담긴 요리는 이미 다 먹고 없었다.

“나 왔어!”

우연이 탁자 옆으로 달려가 앉으며 주인장에게 소리쳤다.

“오늘은 뭐 끓였어요?”

“청어입니다. 두 마리 정도 맛보시죠.”

“네, 청어 주세요.”

우연은 고개를 돌려 찍 소리도 없는 희야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어. 조금밖에 안 늦었잖아.”

“난 괜찮아. 넌 뭐 했어?”

희야는 애써 무심한척했다.

“아소륵이랑 봉황지 거리 구경했지. 말했잖아. 자기가 안 간다고 해놓고.”

“가기 싫었어.”

희야는 괜한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떨떠름하고 괴로웠다.

“쪼잔하긴!”

우연은 매섭게 코를 찡그리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아니거든!”

희야는 제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았다. 요사이 볕에 얼굴이 꺼멓게 탔는데 덕분에 혈색이 좀 가려질는지 알 수 없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쪼잔해! 너 완전 쪼잔하다고! 이 옹졸한 자식!”

우연이 다다다 쏘아붙였다.

“아소륵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요 몇 달 동안 계속 슬퍼했단 말이야! 내가 같이 안 있어주면 네가 있어줄 거야? 아소륵은 너처럼 안 그래. 뭐만 하면 얼굴에 티 팍팍 내면서 다들 너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지. 아소륵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 번밖에 말 안 했지만 그 애가 내내 얼마나 슬퍼했는지 나는 알아!”

희야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청어를 내온 주인장은 복장이 터져 씩씩대는 소녀와 찍 소리도 못 하는 소년을 보았다.

우연은 매섭게 희야를 째려보고는 대꼬챙이에 꽂힌 청어 하나를 들어 희야의 앞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희야의 코를 힘껏 꼬집었다. 방심했던 희야는 고통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연을 똑같이 꼬집어주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청어를 먹었다.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오자 주인장은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창문이 닫히고 여귀진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골목에 서 있었다. 주점 안에는 가장 친한 벗과 그의 일생의 평온을 허물어뜨릴 수도 있는 소녀가 있었다.

여귀진은 우연을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고, 희야도 몰랐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는 남회성의 만족 소년으로 만족식 소매 넓은 옷을 입고 가슴 앞에는 자신의 작은 패도(佩刀)를 자랑스럽게 걸고 다녔을 것이다. 다들 그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올 즈음이면 북쪽에서 날아온 기러기를 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소마와 대합살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이런 괴로움이 마음속에 쌓여 갔다. 여귀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한꺼번에 내뱉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은 이미 끈적끈적한 괴로움으로 빈틈없이 가득 차버렸다.

정말 우연과 희야가 없었다면 그의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귀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고되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아무도 없는 텅 빈 모퉁이에 주저앉았다.

가을바람이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어쩐지 익숙한 냄새를 머금고 초원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느껴졌다.

8월 초사흘.

대나무 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냇물이 암초에 부딪쳐 흰색 물거품을 일으켰다.

“세자, 이쪽으로.”

백리욱이 직접 다리 어귀에서 길을 안내했다.

여귀진은 허리 숙여 답인사를 하고 그를 따라 오솔길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양쪽으로 꽃나무가 늘어선 길을 걸었다. 가끔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화원은 산비탈에 붙어 지어진 것으로 규모가 매우 크지는 않았지만 공예가들이 공들여 옥석을 조각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경치가 펼쳐졌다. 공중에 매달린 대나무 다리를 지나 계곡물을 건넌 두 사람은 벌써 산 중턱 높이에 이르렀다. 멀리 인공 재배한 꽃과 나무의 색깔이 겹겹이 겹쳐졌다. 고운 빨간빛이 검푸른 빛을 압도하더니 이내 또 분홍색이 붉은색을 대신했다. 산중턱 아래는 전부 대나무 숲이었으나 산 정상에는 금사남목1)이 우뚝 서 있었다.

“화창한 날에는 여기에서 봉황지까지 볼 수 있어.”

백리욱이 먼곳을 가리켰다.

그는 다시 높은 숲속의 가옥 한 채를 가리켰다.

“하당의 궁전 중에서 이 남궁은 매우 특별해. 멀리 성 밖에 있지만 가장 독특하고 경치도 좋거든. 어릴 적에 동궁에 있기 싫어서 남궁에 살겠다고 떼썼는데 아버지께서는 일국의 세자가 경치에 연연해 동궁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며 꾸짖으셨어. 나는 그 일로 오래도록 화가 나 있었지. 남궁은 내 어머니가 생전에 쓰시던 별궁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는 환이에게 지내라고 주셨어.”

백리욱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쩌면 여귀진 세자가 머물 곳이기도 하니, 괜찮다면 내게 서재 하나만 내어주겠어? 그럼 우리도 계속 이웃으로 지낼 수 있을 거야.”

“농담은 사양이야.”

여귀진은 한 걸음 물러나 예를 갖추었다.

희미한 음악 소리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생황과 퉁소가 함께하는 궁조(宮調)2)로 소리가 장중하고 기품 있었다.

“다 왔어.”

백리욱이 여귀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어. 이번 만남은 반드시 우연인 것처럼 해줘. 환이를 보면 지나는 길에 시원한 물 한 잔 얻어 마시러 왔다고 하면 돼.”

“왜 그래야 해?”

“황성 고관들의 구습(舊習)이야. 귀족들 간에 혼사를 맺으면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드는지 확인 차 선을 봐야 해. 하지만 명문가 규수들은 평소 집을 잘 나가지 않으니 아무리 못생겨도 아는 사람이 없거든. 그런데 만일 남자 측에서 보고 혼사를 물리면 두 가문의 체면이 깎이게 되니까 관저에서 선을 보지 않고 대부분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해. 물을 얻어 마신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을 보는 거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사를 무르기도 그편이 나으니까. 황성에서는 매년 답청절과 ‘상화국상’ 철이면 출가를 기다리는 규수들이 잇달아 집 밖으로 나오는데 평민들이 길 양쪽에서 에워싸고 구경해. 그것도 무척 재미있어.”

백리욱은 예까지 말하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세자는 걱정 안 해도 돼. 내 누이는 외모가 어머니를 빼닮았거든. 장담컨대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야.”

“한 수 배웠네.”

여귀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백리욱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숲 사이 오솔길을 나갔다. 눈앞이 갑자기 확 트였다. 거대한 대나무 그늘이었다. 빽빽한 대나무가 햇빛을 차단했고 바닥의 촘촘한 빛 그림자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침 대나무 잎이 떨어질 계절이었다. 베틀의 북처럼 생긴 잎이 흩날리며 떨어져 바닥에 얇게 한 겹 쌓였다. 대나무 그늘 가운데로 계곡물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맞은편의 작은 언덕에는 금색 국화가 수놓아진 비단 병풍이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 인영이 보였다. 병풍 가장자리로 비단 궁의가 드러나 있었다.

백리욱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여귀진을 데리고 물을 건너갔다. 그는 병풍 앞 10보 지점에서 멈추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들이 나온 행인인데 혹시 맑은 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소?”

연주 소리가 멈추고 병풍 너머에서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궁중 복장을 한 소녀가 쟁반을 하나 들고 나왔다. 소녀는 여귀진과 백리욱을 병풍 밖 좌석으로 안내한 뒤 물을 올렸다. 물에는 말리꽃 꽃잎이 떠 있었다. 물을 올린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아득히 먼 길을 걷고 물을 건너 만나러 왔노라

물 한 잔도 마셨으니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네”

백리욱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고체시를 인용해 가볍게 읊조렸다.

“환대해 주어 고맙소. 주인을 한번 뵐 수 있을는지?”

병풍 너머는 조용했다.

백리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을 한번 뵐 수 있겠소?”

이번에는 병풍 너머에서 기척이 들리긴 했는데 뭔가 치고받고 때리는 소리 같았다. 갑자기 또 주우욱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환아! 환아!”

백리욱이 놀라 일어섰다

“무슨 일 있느냐?”

잠시 후 아까 물을 올렸던 소녀가 나와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세자, 공주께서… 공주께서…….”

“공주가 왜?”

“자결하겠다 하십니다!”

“자결?”

백리욱은 놀라 펄쩍 뛸뻔했다.

소녀가 다급히 손을 내둘렀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만 공주께서 말씀하시길……”

“다만 뭐?”

병풍 너머에서 소녀가 바락바락 악을 썼다.

“소염, 입 다물어! 나 죽을 거야! 자결할 거라고! 죽어도 만족에겐 시집 안 가!”

* * *

1) 중국 특유의 진귀한 목재. 주로 황실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했으며 제왕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2) 고대 악곡의 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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