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34화 (23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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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3)

“핑계입니다!”

익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핑계가 아니네.”

익천첨의 목소리는 철석처럼 단호했다.

“사달극성방을 떠날 때 나는 내 활을 부러뜨렸네. 지금의 나는 그저 천구 무사일 뿐이네. 학설도 아니고 자네가 말하는 전하도 아니야. 천무자는 무슨 타고난 영웅이 아니네. 일개 우인일 뿐이야. 여전히 천무자가 청주 하늘을 선회한다고 해도 숲 전체에 번져 나가는 큰 불을 끌 능력은 없네.”

“아닙니다, 고막 전하. 우리의 숲을 구할 기회가 전하께 있습니다. 그 능력은 전하께만 있습니다.”

익한은 탁자 가장자리를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익천첨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전하뿐입니다!”

익천첨이 익한을 쳐다보았다.

“공주 전하를 뵈었습니다. 딱 알아보겠더군요! 공주의 혈관에 가장 순수한 우황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만일 공주께서…….”

익천첨의 바다색 동공이 확 수축하더니 눈빛이 우전처럼 날카로워졌다.

“말도 안 돼! 절대 그 아이를 자네들의 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없어!”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족 전체의 전쟁입니다! 만족이 아직도 구과산 밖에서 우리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한데 우리는 서로를 마구 죽이고 있지요. 어떤 우인이든 우리의 숲을 구해야 합니다! 공주는 우씨 성을 가진 공주입니다. 마지막 순수 혈통이라고요! 우황이 죽었습니다! 후계자도 없어요! 우씨를 대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전하, 아시겠습니까?”

익천첨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저는 이미 학설의 반역자입니다. 대부분의 학설은 유탑사 전하에게 투항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가 보낸 살수가 남회성 가까이 왔습니다. 그들의 척후가 이미 두 분의 종적을 알아냈어요. 이런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 것 같습니까?”

익한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제가 전하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하께서 여전히 천무자라고 믿습니다! 전하께서는 천구의 부흥을 위해 전쟁을 치른 지 오래 되셨지요. 그러면 고국의 백성들이 아직도 익씨와 우씨가 다시 연합해 전쟁에서 숲을 구원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지 않으셨겠지요!”

“자네는 나를 너무 믿는군!”

익천첨이 냉소를 던졌다.

“고막 전하,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공주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압니다. 또한 공주가 전하께 어떤 의미인지도 압니다. 하지만 고막 전하, 그분은 전하가 총애하는 손녀가 아니라 우족의 공주입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나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라도요.”

익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여기에 오면서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익한은 자신의 활과 비수를 도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주 많은 것을… 되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익한은 방문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

“공주는 우리가 아는 최후의 희무신입니다. 정말 전하께서 공주가 평범한 소녀이기를 바랐다면 태격리사의 춤에 관한 모든 것은 또 왜 가르쳐 주셨습니까?”

“공자께선 이 옥정(玉鼎)이 마음에 드십니까? 금수 680냥입니다. 옥 재질을 생각하면 비싼 게 아니지요.”

옥공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한 손에 먼지떨이를 들고 옥정(玉鼎)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면서 그것을 보는 청년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렇게 비싸오?”

여귀진은 깜짝 놀라며 옥정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취색 옥정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반투명했다. 양지옥처럼 하얀 바닥에는 진홍색이 가닥가닥 피어 있었다. 신선한 우유에 똑 떨어진 새빨간 피가 제일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천천히 얕게 떠오르며 마지막 입구 쪽에 가서는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황금은 정해진 값이 있으나 옥은 정해진 값이 없습니다.”

옥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정(鼎)의 원료는 란주에서 왔습지요. 란주에서 생산되는 비취는 완주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좋지만 붉은색 비취는 드뭅니다. 이 옥의 원료는 아주 재미있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원래 이 옥의 원료는 흰색이었답니다. 나중에 리국공이 진북을 공격해 도처에서 진귀한 보물을 약탈했는데 이 옥을 내놓기가 싫었던 원 주인이 재료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고 그래서 붉게 물든 것이랍니다. 제게 판 사람이 이 옥을 잘라내면 새빨간 피가 솟구쳐 나올 것이라 했지만 옥을 잘랐을 때 그런 일은 없었지요. 단 피무늬 비취의 모양은 확실합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팔송 냉동갱에서 파낸 옥이 맞을 겁니다. 하도 캐내서 이제 남은 게 얼마 없지요.”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얻기 귀하겠군. 금이나 은보다 많이 두껍고 무거운 것 같네.”

옥공이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꼭 그리 비교할 순 없지요. 금붙이에도 절묘한 수공예가 들어가지만 아무리 좋은 금붙이도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옥석은 다릅니다. 좋은 옥은 자기만의 무늬와 색상, 광택이 있지요. 흠집마저도 제각각입니다. 게다가 일단 깨지거나 부서지면 다시는 붙일 수 없습니다. 구주를 다 돌아다니셔도 똑같은 모양의 옥을 못 찾을 겁니다.”

“성 안의 큰 상점에서 경매로 파는 옥 중에 비싼 건 금수 수만 냥이나 된다던데.”

옥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부자들의 놀이이지요. 옥을 사랑하는 사람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옥이 한 덩이뿐일지라도 그것의 무늬와 색채를 좋아하고 흠집까지도 좋아해 평생 몸에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옥에는 영(靈)이 있어 사람의 혼백에 감응하지요. 경매하는 옥을 사람들이 좋다고 한다 해서 정말 공자의 마음에도 들까요? 아무리 귀한 옥도 사서 곁에 지니지 않는다면 값어치가 없는 것입니다.”

“옥이 사람의 혼백에 의탁한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보았소. 정말이오?”

“그리움에 깃들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고인의 낡은 옥을 지니면 그의 혼백과 함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마음속으로 아직 그를 기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옥석은 값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옥도 실은 애초에 돌멩이인지라 값어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옥공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뒤에 가서 청소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알아서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저를 부르십시오.”

“내가 훔쳐갈까 걱정도 안 되오?”

여귀진은 살짝 놀랐다. 상점은 크지 않았고 안에는 수십 가지의 옥기(玉器)가 진열되어 있는데 사람이라곤 그와 옥공 둘뿐이었다.

옥공이 웃으며 말했다.

“일개 옥공일 뿐이지만 공자께서 아주 귀한 분이란 건 알아보겠더군요. 공자 같은 분께서 사려는 것은 그리움이니 아무리 좋은 옥도 공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낱 돌멩이일 뿐입니다.”

여귀진은 느린 걸음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옥기들 사이를 거닐다가 멈추었다가 했다. 오후의 햇살이 부유하는 잔 먼지를 비추었다. 따스하고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창 앞에 걸린 맑은 하늘색 옥규는 반투명한 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주색 대옥해는 둘레가 세 걸음이나 되었다. 안에는 진짜로 술이 가득 차 있고 그 위로 알록달록 환한 빛이 넘실거렸다. 금으로 도금된 홰에 서 있는 황옥 앵무는 교색의 붉은 부리로 과실(果實)을 물고 있었다. 여귀진은 자신이 실제가 아닌 휘황찬란한 빛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옥공이 뒤에서 발을 젖히고 나왔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바깥 거리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여귀진을 보고 웃었다.

“오래 보셨는데, 아직도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십니까? 가게가 작아 송구합니다.”

여귀진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 예쁜 게 정말 많구려. 저 용혈 수정 동석으로 만든 사각 도장은 참으로 최상품이더군. 그렇게 좋은 재질은 처음 보았소.”

“저 도장 말씀이십니까?”

옥공이 고개를 저었다.

“고가의 물건이기는 합니다만 용혈 수정 동석의 재질이 너무 순수해 우아한 맛이 없지요. 공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금수 300냥에 팔겠습니다.”

여귀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비취 팔찌를 하나 찾기 위해서요. 이 가게에 있다 들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구려.”

“비취 팔찌요? 그 물건은 원래 아주 많습니다. 다만 얼마 전 천계의 큰 상단이 물건을 보러 와서 적잖이 사갔지요. 그런 자잘한 것들은 밖에 진열하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원하는 팔찌가 어떤 모양인지요?”

“본 적은 없소. 친구 말로는 유리종 비취라 하더군. 투명한데 한가운데 짙은 청록색 점이 있어서 옥 전체를 푸르게 물들인다 하오.”

옥공은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아,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그 팔찌는 아직 있을 겁니다.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옥공이 다시 뒤편에서 나왔을 때, 그는 손에 정교한 칠목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는 여귀진에게 가게 한쪽 귀퉁이에 앉으라고 청했다. 여귀진은 하얀 대자리에 꿇어 앉아 고개를 들고 지붕창을 보았다. 무늬가 조각된 격자창으로 햇빛이 그대로 내리쪼였다. 옥공은 미소를 띤 채 상자를 열었다. 순간 푸른색 빛이 상자 속에서 넘쳐흘러 옥공의 앙상한 손가락까지도 푸른빛을 띠는 것 같았다. 비취 팔찌가 진홍색 두꺼운 비단에 받쳐져 있었다. 팔찌는 흡사 비단에 고인 봄물처럼 언제든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거요, 바로 이거!”

여귀진은 기뻐서 소리쳤다.

그는 상자에서 비취 팔찌를 꺼냈다. 놀랍게도 짙푸른 빛이 서서히 가셨다. 비취환 전체가 사실은 거의 수정에 가깝게 투명했다. 좁쌀만 한 크기의 검푸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청록색 가닥이 안개처럼 점 주위로 자욱했다. 터진 살무사 쓸개를 맑은 물에 던져넣은 것 같았다.

“좋은 물건입니다. 북망산의 상급 비취이지요. 보기 드문 투명하고 역동적인 녹색으로 바탕이 물 같습니다.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 홍려시에서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쓰는 청규도 이것에 비하면 죽은 옥입니다. 공자, 빛에 비춰보십시오. 빛이 모이지만 무겁지는 않고 투명하지만 흩어지지는 않습니다. 북망산의 옥 광산은 이미 수명이 다해서 앞으로는 이런 좋은 옥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

옥공은 살짝 득의양양했다.

여귀진은 세공인의 말대로 햇빛에 이리저리 팔찌를 비추어보았다. 신기하게도 팔찌를 돌리자 순간 녹색이 되살아났다. 산뜻하고 명료한 청록빛은 순간적으로 화사하게 빛났다가 다시 옅어졌다. 짙을 때는 오래되고 깊은 연못 색깔 같고 옅어질 때는 아무 색도 나지 않았다.

“이 비취는 눈이 있군요.”

옥공이 좁쌀만 한 검푸른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옥안(玉眼)입니다. 모든 녹색이 바로 예서 스며 나오지요. 옛날에는 이런 것을 사반옥(蛇盤玉)이라 했습니다. 옥갱 안에서 독사가 휘감고 지키고 있어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귀진은 비취 팔찌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마요?”

“금수 250냥입니다.”

“이리 좋은 옥이 어떻게 저 사각 도장보다 쌉니까?”

여귀진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옥공은 진지한 여귀진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옥을 사려는 사람이 옥 값이 싸다고 싫어하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네요. 옥이 좋기는 하지만 천계성의 부상들은 눈에 차지 않아 했습니다. 옥 자체가 너무 작기도 한 데다 다듬어서 만든 팔찌도 너무 작으니까요. 기껏해야 여자애의 손목에나 찰 수 있을 것이고 그마저도 크면 못 하겠지요. 사슬에 꿰어 목에 걸기에는 또 너무 크고요. 그래서 값이 오르지 않습니다.”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갈아서 띠고리나 목에 거는 장식품을 만들면 값이 나갈 수도 있겠군.”

“그렇기야 하지요.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옥공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옥을 갈아서 그런 평범한 물건을 만드는 건 아깝지요. 저는 그리 못합니다. 이 옥은 장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요?”

“이 옥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체온에 옥이 덥혀지고 옥안의 녹색이 서서히 넘쳐흐르게 되지요. 10년, 20년을 지니고 다닌다면 팔찌 전체가 녹색으로 변할 겁니다.”

“정말 그렇소?”

“당연히 진짜이지요.”

옥공은 옷깃을 풀어젖히고 목에 걸고 있던 은사슬에 매인 비취옥 비휴(豼貅)1)를 꺼냈다.

* * *

1) 고서에 나오는 범과도 같고 곰과도 같은 맹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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