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33화 (233/360)

233

3장. 비취 팔찌 (2)

우연은 물을 한 움큼 떠서 후 불었다. 물속에 되비친 달빛과 별빛이 부서졌다. 물은 모든 빛을 머금은 채 우연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우연은 또 커다란 목욕통 안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들고 달을 바라보았다. 어렴풋한 것이 넓게 부쳐진 달걀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큭큭 웃음이 난 우연은 입에서 물거품을 뱉으며 물속에서 머리를 쑥 내밀었다.

“또 웃기는! 다 큰 여자애가 아직도 물놀이나 좋아하다니. 다 씻었으면 냉큼 방으로 들어와. 옷도 내가 다 말려뒀다.”

익천첨의 목소리가 멀리 방 안에서 들려왔다.

우연은 혀를 빼꼼 내밀고 목욕통 안에서 나왔다. 수면에 떠 있던 내의가 그대로 우연의 몸에 달라붙었다. 옆에는 청석판 한 덩이가 있고 그 아래로 작은 숯 화로가 놓여 있었다. 청석판 위에는 비단 도포가 널려 있었다. 품이 넓은 도포는 불에 바짝 말라 따뜻했다. 우연은 옷을 두르고 맨발로 차가운 돌길을 쪼르르 내달려 방으로 돌아왔다.

“어우 추워, 너무 춥다.”

우연이 익천첨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신발도 안 신었구나!”

익천첨은 우연을 노려보고는 수건을 머리에 덮어주었다.

도포를 휙 내던진 우연은 몸을 돌려 머리에 덮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우연도 어느새 다 자라서 몸매가 소녀 같지 않았다. 젖은 내의가 피부에 달라붙어 가녀린 허리와 풍만한 가슴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익천첨은 우연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졌다. 불빛에 비친 익천첨의 바다색 눈에 안개 같은 것이 서서히 차올랐다.

“옷 다 갈아입으면 불러라! 다 큰 처자가 가릴 줄도 모르고!”

익천첨은 나직이 질책하고는 일어나 문을 나섰다.

익천첨은 문을 닫고 계단에 앉아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살며시 동그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눈에 어린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우연이 폴짝 뛰어나왔다. 우연은 아래로 갈수록 단이 넓게 퍼지는 하얀 치마를 입고 허리에는 널따란 흰색 비단 허리띠를 묶었다. 머리카락은 긴 말 꼬리처럼 동여매었다. 사냥을 나가는 동륙 귀족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저 오늘 저녁에 놀러 나가요.”

“또 누구를 만나는데?”

“아소륵 아니면 희야죠. 내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익천첨은 우연이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자 고개를 가로젓고는 잠시 침묵했다.

“우연, 아소륵과 희야를 좋아하느냐?”

“당연하죠. 아니면 내가 왜 걔네하고 놀겠어요?”

“누가 더 좋은데?”

우연은 경계하듯 익천첨을 흘끔 흘겨보았다.

“할아버지가 그건 왜 물어요?”

“방금 그런 생각을 했단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남회에 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익천첨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다 컸는데 당연히 네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겠느냐?”

“몰라요. 둘 다 좋아요. 왜 꼭 누구를 더 좋아해야 해요?”

“둘 중에 한 사람하고만 평생을 함께 살라고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래?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알게 될 게다.”

“생각하기 싫어요……. 이대로가 좋아요.”

우연은 등을 돌렸다.

“바보야,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아무리 좋은 벗이라도, 친형제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법이다. 하나인 마음을 둘로 나누면 유리처럼 부서진단다.”

익천첨은 말을 하면서 문득 살짝 넋이 나갔다.

우연은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막고 머리를 웅크리며 말했다.

“안 들을래요, 안 들어! 안 들어!”

익천첨은 나직이 웃으며 우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계속 담배를 피웠다. 우연은 익천첨을 등지고 잠시 서 있다가 폴짝폴짝 뛰어 밖으로 나갔다.

익천첨의 담배도 거의 다 탔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을 보던 그의 몸이 불현듯 경직되었다. 영롱하고 둥근 달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바람과 함께 사뿐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았다. 그림자 뒤로 매 같은 날개가 우아하게 펼쳐졌다. 익천첨은 담뱃대를 떼고 천천히 일어났다. 자신의 활은 등 뒤쪽 방 안에 있었다. 방까지의 거리는 5척이 못 되었지만 달려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익천첨이 뒤도는 시간이면 그자는 화살을 세 대나 쏠 수 있고 매 화살이 익천첨의 머리를 관통할 수 있었다.

학설은 절대 화살을 허투루 쏘는 법이 없다고 알려졌다. 쏘아진 화살은 적의 피를 한껏 마시려 했다. 그리하여 세상 끝까지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명중했다.

순간 익천첨은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화하고 아름다운 남회성에 오래 머물다 보니 나태하고 해이해져 한창때의 경각심을 잃고 말았다. 상대가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하고서야 발견했다니, 천무자에게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익천첨은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밤바람에 그의 흰색 장포가 휘말렸다. 언제라도 훌쩍 날아오를 듯했지만 익천첨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절대적인 정지 상태를 유지했다. 둥근 달 속의 사람이 갑자기 날개를 최대한으로 펼쳤다! 그 순간 익천첨은 바람에 불려 날아간 것처럼 자신의 오른쪽으로 날아 이동했다. 금속이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울림이 일었다. 달빛 속에서 만들어져 나온 듯한 흰색 꼬리 깃의 긴 화살 한 대가 그대로 익천첨에게 쏘아졌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는 갑자기 멈춰 서더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익천첨은 화살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담뱃대를 휙 내밀었다. 아주 정확한 순간에 담뱃대가 우전의 화살촉을 쳤고 불똥이 몇 점 튀며 화살은 빗겨 나갔다.

화살은 방문에 꽂혔고 화살 꼬리는 웅웅 울리며 진동했다. 익천첨은 자신의 담뱃대에 난 상흔을 보았다. 구리로 만든 담뱃대는 화살촉에 맞아 두 동강이 났다.

“남회성에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왔군. 얼마나 왔지? 전부 나오게!”

익천첨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황의 살수였다면 인영을 보기도 전에 화살이 최소 10대는 쏘아졌을 겁니다. 천무자를 상대로 화살 한 대를 써 도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그 화살은 그저 고향을 대표해 묻는 안부였습니다.”

인영이 천천히 두 날개를 펄럭이며 둥근 달 속에서 내려와 사뿐히 용마루를 밟았다.

“자네는 학설이지. 한데 우황의 살수가 아니라고?”

익천첨이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그 화살은 아주 악독했네. 나를 거의 죽일 뻔했지. 그게 자네의 안부인가?”

“제가 궁술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지만, 사달극성방의 주인이라면 반드시 그런 화살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지붕 위의 사람은 금색 망을 두른 녹류궁을 짚고 반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숙이고 제 이름을 밝혔다.

“사달극성방, 익한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우황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익천첨은 등 심지를 돋우었다. 불빛이 탁자 양측의 사람을 비추었다. 익한은 녹류궁과 휴대하는 쌍비수까지 탁자에 놓고 양 손을 들어 보였다. 완전히 무장 해제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익천첨은 잠자코 담배만 태우며 익한을 살폈다. 고향 사람을 보는 것이 매우 오랜만이었다. 익한은 준수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입술의 호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흰색 머리카락에 바다색 눈, 전신에 금 그물을 박아 넣은 흑녹색 갑옷을 입었다. 익천첨은 그에게서 옛 친구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백리극리 사달극의 아들이지. 그럼 어머니는 새문나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혈통도 자부할 만하고 궁술도 충분히 날카로우니 학설 중에서도 매우 귀한 인재겠군.”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가문과 궁술에 대한 천무자의 평론을 듣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익한은 익천첨의 눈을 직시했다. 익천첨이 웃음을 지었다.

“우황이 죽었다 했나? 그 때문에 온 것인가? 우황의 죽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우황이 죽으면 새로운 우황이 있을 것이고 새 우황도 변함없이 나를 우족 전체의 적으로 여길 것이야. 나는 여전히 청주 땅을 밟을 수가 없네.”

“백목이성방의 늑고 전하께서 석 달 전, 댁에서 불타 돌아가셨습니다. 백목이성방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고 모든 백성이 죽임을 당해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강물은 사달극성방까지 흘러와서도 여전히 새빨갰지요.”

익한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군대 하나가 제격림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백목이성방을 훼멸시킨 그 군대이지요. 가는 길에 계속해서 성방들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순수 우족 혈통의 궁수 1만 5천 명과 경갑 보병 6만 명이 있습니다. 제격림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힘입니다. 그 군대를 이끄는 자가 자객을 보내 대신들 앞에서 우황을 살해했습니다. 이런 강경한 수단에 우족 전체가 몹시 놀랐습니다. 제격림은 이미 결전의 신념을 잃었고 학설단 전체가 그를 배신했습니다.”

익천첨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마음속 두려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군대를 이끄는 자가 누구지?”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익림 유탑사 사달극. 천무자의 종손(從孫)1)이자 현 사달극성방의 주인입니다.”

익천첨은 한참을 침묵했다.

“자네가 한 말은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네. 내가 아는 유탑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녀석은 자주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는 청년으로 우정을 매우 중시한다네. 늑고는 그의 가장 친한 벗이네. 녀석이 우황에게 추방당했을 때도 늑고가 그를 위해 용서를 청했지. 유탑사가 우황을 배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왜 늑고에게까지 손을 쓰겠는가?”

익한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고막 전하, 청주를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셨군요. 사람은 변합니다. 지금의 유탑사 사달극은 스스로를 사달극성방 부흥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익씨를 위해 우황의 월계관을 되찾아오려 합니다. 과거에는 슬픔과 무력감을 자주 느끼는 청년이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유탑사는 강해졌습니다. 그가 닿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의 전기(戰旗)를 바라보며 그 아래 무릎을 꿇습니다. 사실 유탑사가 거병하기 전 청주의 숲은 이미 전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죽입니다. 죽이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요. 유탑사는 이 혼란한 기회를 붙잡은 겁니다.”

“무엇이 유탑사를 바꾸었는가?”

익천첨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마 슬픔과 무력감이겠지요.”

익천첨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지? 자네는 어느 편인가? 자네는 사달극성방 출신의 학설이지. 유탑사를 위해 싸우는가 아니면 이미 죽은 우황을 위해 싸우는가?”

“저는 우족 전체를 위해 싸웁니다!”

익한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우족 전체?”

익천첨이 차갑게 비웃었다.

“자네는 아직 너무 어려.”

익한이 벌떡 일어났다.

“고막 전하! 제가 너무 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은 이미 똑똑히 보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황은 어쩌면 전하를 우족의 적으로 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황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는 학설단의 정예병이 사방의 성방을 위협하여 우족 백성들은 여전히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황이 죽었고 우족은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자들은 이때 전쟁터에 몸을 던져 영예를 쟁취합니다. 하지만 이 영예는 살인을 대가로 합니다! 유탑사 전하는 미쳤습니다. 눈앞의 승리에 눈이 멀었지요. 곧 우리를 향해 복수가 시작될 겁니다. 우황을 죽인 유탑사는 제격림에 가서 우황의 월계관을 머리에 쓸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를 인정하겠습니까? 그는 이미 우족 전체의 적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조만간 사달극성방에까지 이어질 겁니다. 그때 전하 고향의 운명도 백목이성방 같지 않겠습니까?”

“내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네. 제격림과 사달극성방에서 내 명성이 어떠한지는 자네도 잘 알겠지. 나는 다시 청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네. 내 백성들은 나를 증오하지. 나도 그들에게 해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는 천무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학설이지요.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전하의 이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칭송합니다.”

“그건 그들이 역당 고막과 천무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일세.”

* * *

1) 형이나 아우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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