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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비취 팔찌 (1)
윤 성제 5년 3월, 남회성.
“연을 따네 연을 따네, 연잎이 무성도 하여라
애틋하게 서로 마주보네, 얕은 물 사이에 두고”
유유히 흐르는 밤바람 속에서 유유아의 목소리가 다채롭게 변하며 소소의 현악기 연주와 어우러졌다. 뚱땅뚱땅, 빗물이 풍경 위에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여귀진은 궁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벼락 너머 량풍원의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를 들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귀진의 귀홍관에는 방 안의 등불 하나를 제외하고는 인적 하나 없이 텅텅 비었다. 초봄, 서늘한 기운이 스민 밤바람이 불어오자 여귀진은 입고 있는 옷이 얇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나뭇가지 끝에 걸린 밝은 달을 보았다. 맑은 물 같은 달빛이 정원의 푸른 벽돌 위로 흩뿌려졌다.
지금 북도성은 아직 대지가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한데 남회성의 수양버들은 멀리서 보면 벌써 연한 푸른빛에 뒤덮여 있었다. 올해 여귀진은 열일곱으로, 고향을 떠난 지 7년째였다. 막 이곳에 왔을 때는 고집스럽게 담벼락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 대문과 관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남회성을 내려다보며 동륙이 몹시도 좁고 폐쇄적이라고 생각했다.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뉘어지면 소와 양이 보이는 북방의 가없는 초원이 그리웠다. 하지만 하루하루, 해를 거듭할수록 북도성에 대한 기억이 점점 옅어져 갔다. 남회성의 수증기 자욱한 수면, 두공(斗供)1)과 날아오를 듯 휘어진 처마로 이루어진 가옥이 마음에 들었다. 비좁은 골목에는 종종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진 대추나무가 있고 밤이면 저잣거리에는 등불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이 모든 것들은 아름답지만 초원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유유아가 부르는 낭랑한 곡조들도 이제 귀에 익었다. 부드러운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리듯 듣고 있자면 노곤하고 게을러지는 기분이었다. 백리욱과 함께 노는 소녀들도 하루가 다르게 컸다. 어린 시절처럼 짓궂지도 않았다. 이제 여귀진을 보면 마구 날뛰며 야만족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여귀진과 스쳐 지나갈 때면 얼굴을 발그레 붉히곤 옆으로 몸을 틀어 길을 내주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릴 적에 아소륵을 야만족이라고 제일 열심히 놀려댔던 소소는 이제 여귀진의 금(琴) 스승이 되어 며칠에 한 번씩 운지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끔 여귀진은 자신이 동륙인이 된 것 같았다. 지난 해에는 근왕군을 따라 상양관에서 전쟁을 하며 동륙 황실을 위해 고투를 벌였고 하마터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돌아오자마자 또 곧바로 로 선생에게 붙잡혀 매일 치국의 도리를 강독하고 동륙 문인처럼 주절주절 읊어댔다.
여귀진은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네. 하지만 함축적인 의미가 약간 부족해. 이 시에서 연잎은 비유고 그 의미는 얕은 물과 서로 마주본다는 말에 담겨 있지.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거듭 생각하고 그리워하지만, 마음은 실낱같아서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소소의 금 소리는 지나치게 도드라지고 유유아의 노랫소리는 나른하잖아. 그 느낌이 아니라고. 생각해 봐. 봄이 오는 계절에 물을 사이에 두고, 무성한 연잎 너머로 소년과 소녀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 소년은 소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소녀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어.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하지만 두 사람 다 마음은 있는데 표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애틋하게’는 평범하지만 진심을 알 수 있는 표현이야. 흘긋 보았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하지만 또 참지 못하고 또 다시 쳐다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지. 말을 건네고 싶은데 입가에 딱히 맴도는 말은 없으니 답답하고 괴로운 느낌이라고.”
백리욱의 목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왔다. 온화하고 고상하며 매력적이었다.
백리욱도 여귀진과 동갑으로 열일곱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그도 변해서 더 이상 꽃 뭉치를 여귀진의 이마에 던지는 일은 없었다. 백리욱은 의외로 우아하고 차분해졌다. 매일 사부(詞賦)를 깊이 연구했고 글 솜씨도 남회성에서 제일이라 할 만했다. 하여 드디어 백리 가문에 문예 국주의 문필을 이어갈 사람이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리욱은 풍채도 좋고 금 연주 솜씨도 뛰어났다. 그는 궁 밖을 잘 안 나갔지만 흠모하는 귀족 소녀가 의외로 많아서 자주 여자아이들이 떼를 지어 그가 출궁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백리욱은 궁궐 안쪽에서 금 연주를 들으며 하나하나 부족함을 지적했다.
“물이 그리 깊지 않음에도 넘을 수가 없는 거지. 그 사람이 곁에 있어도 닿지 못하고 멍하니 서로를 아련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야.”
백리욱이 담 너머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는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라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여귀진은 속으로 움찔했다.
“우리가 모르면, 욱 세자께서는 아세요? 우리도 궁은 안 나갔지만, 세자께서도 궁녀들과 담 안쪽에서 금 연주나 들을 뿐이잖아요. 설마 정말 누군가의 금 연주에 마음이 동하신 겁니까?”
소소가 농을 던졌다.
“궁을 나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마음이 동해 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피상적이지. 더 깊은 의미는 말로 할 수가 없어. 금을 미망의 지경까지 연주했을 때에야 그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백리욱은 성격이 착했다. 이 소녀들에게는 더더욱 온화했으며 화도 내지 않았다.
“세자께서도 마음이 동한 적 있으십니까?”
유유아가 물었다.
“없을 수 있간?”
소소가 큭큭 웃으며 끼어들었다.
“왜, 그해 신년에 잠시 머물렀던 명 공주 있잖아.”
“아니거든. 분명 소주 공주야. 세자께서 공주를 몇 번 만나진 않았지만, 한 번 만날 때면 머리를 한나절은 빗으신다니까.”
“허튼 소리 지껄이는 것들은 밥 빌어먹게 다 쫓아낼 테다!”
백리욱은 웃으면서도 이유 없이 한숨이 나왔다.
여귀진의 머리 위로 오동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잎사귀가 비처럼 그의 몸에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여귀진은 꼼짝 않고 물끄러미 하늘에 걸린 달을 쳐다보았다. 맘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하지만 켜켜이 쌓이니 묵직해져 여귀진의 마음을 꽉 틀어막아 버렸다.
“희야, 네가 살 차례야.”
식원은 느슨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희야와 함께 말을 타고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밤이 되어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대류영에서 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를 돈 많은 갑부로 생각하지 마. 또 왜 그러는데?”
희야가 투구를 벗고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트리고는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 우연히 숙부의 서류를 봤거든. 다음 달 금군에서 13명이 승진하는데 네 계급이 아장으로 올라가더라고. 더는 청영위 안 해도 되니까 당연히 나한테 술 사야지?”
식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숙부 말씀으론 국주도 상양관 일전에서 전사한 장수가 너무 많아서 군을 위로하지 않으면 민심을 잃을까 봐 걱정한다더라.”
희야가 깜짝 놀라며 덩달아 웃었다.
“나는 평생 진급 못 할 줄 알았어.”
“되게 기쁜 것 같지 않은데? 아장이 높은 직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관이야. 일반 호위 보좌와는 다르지. 게다가 넌 금군에 있고 숙부의 제자이니 진급이 빠를 거야. 이제 참장만 지나면 부장이 될 거라고. 대류영에서 연무 대회를 했을 때, 원래 네가 부장의 계급을 받았어야 했는데 국주께서 주지 않았지. 하지만 지금 네 기세로 보면 스물에는 스스로 공을 세워 부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거야. 많은 명문가 자제들은 꿈도 못 꾸는 속도야. 마땅히 받았어야 할 걸 되찾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희야는 고개를 숙이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말굽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국주께서 부장 자리를 하사하지 않아도 대수롭지 않았어. 내 스스로 공을 쌓아 승진하면 어느 날 내가 부장 자리에 올랐을 때 국주에게 부장 직위를 하사받은 것보다 더 체면이 설 테니까. 어쩌면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후장군, 전장군, 어쩌면 대장군까지도 말이야…….”
“너는 숙부의 제자야. 무전도지휘사까지 오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어.”
식원이 웃었다.
“하지만 식원, 상양관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 그들도 나처럼 관직에 오르고 진급하고 부족함 없이 살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다 죽었어. 큰 전쟁이 한 번 더 일어나면 우리도 살아서 못 돌아올 수 있어.”
희야가 고개를 들어 식원을 보았다.
“우리는 대체 뭘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걸까? 항상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모르겠어.”
식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우리는 큰일을 하고 싶어 해. 큰일을 하려면 리국공처럼 목숨도 걸고 거침이 없어야 해. 사실 난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며 지휘하는 리국공과 그에게로 모여드는 천군만마를 보면서 정말이지 리국공이 내 적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 오히려 리국공 같은 사람이 영웅이란 생각이 들더라. 그 많은 남만 용사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는 데는 분명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 애석하게도 리국공 같은 사람은 너무 적어. 네 말대로 많은 사람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전쟁 한 번에 죽어나가지.”
“장군은? 너는 장군의 조카잖아. 장군처럼 되고 싶지 않아?”
희야의 물음에 식원은 잠시 망설였다.
“희야, 너는 숙부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해?”
희야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구나……. 사실 나도 가끔 장군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묻긴 좀 그렇지. 넌 어릴 때부터 장군을 따라다녔어?”
식원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안 문제는 말도 마……. 나는 죽기 직전에야 내 숙부가 어전우장군이라는 걸 알았어. 숙부께서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감옥에 와 나를 꺼내갔지. 감옥 맞은편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나를 먼 친척에게 보내겠다고 하시더라. 숙부는 말수가 적었고 나도 약간 말할 엄두가 안 났어. 나중에 누가 날 데리러 올 거라고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고 나는 숙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지. 그런데 숙부께서 입구까지 걸어갔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흘긋 보더니 돌아오는 거야. 그러더니 나를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자기가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같이 가자고 했어.”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숙부는 아주 특별한 분이지.”
식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래도 리국공은 어떻게 따라해 보겠는데, 숙부는 못하겠어.”
“맞다, 너는 승진했어?”
희야가 화제를 돌렸다.
“응. 이제 부장으로 올라가게 됐어.”
식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아장이었는데 이번에 숙부 덕분에 한 단계 건너뛰었어. 숙부께서 혼담을 넣으려면 계급을 약간 높게 올리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
희야가 웃음을 터뜨리며 식원의 가슴을 툭 쳤다.
“너 혼인해? 그럼 네가 나한테 술을 사야지.”
식원은 약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오간 혼담도 없어.”
“참, 나 지름길로 먼저 갈게.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희야는 불현듯 약속이 떠올랐다.
“우연 만나러 가?”
식연은 희야가 그랬듯 저도 주먹으로 희야를 툭 쳤다.
“누가 누구한테 술을 사야 할지는 알 수 없겠는걸!”
이번에는 희야가 멋쩍어졌다. 희야도 식원과 같은 반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온몸이 후끈거렸다.
“근데…….”
식원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원래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나는 네 친구니까……. 어제 말안장 하나 사려고 문묘에 갔다가 우연과 여귀진 세자가 귀걸이를 고르는 걸 봤어. 여귀진 세자도 우연 좋아하지? 우연 같은 여자애는…….”
식원은 말하기가 너무 껄끄러워 말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나 먼저 간다. 숙부 쪽에 아직 내가 정리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거든.”
식원의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갔다. 희야는 혼자 말에 탄 채 그곳에 서 있었다. 몸이 다시 차갑게 식은 듯했다.
희야는 고개를 들고 농밀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별빛과 달빛이 점점이 희야의 어린갑 위로 흩뿌려졌다.
* * *
1) 중국, 한국, 일본의 전통적인 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들기 위해 기둥 위에 복잡하게 엮은 까치발의 목조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