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31화 (23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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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매의 죽음 (4)

대군은 자기 손목의 표범 꼬리를 끌러 여수우의 손바닥에 밀어 넣은 뒤 그의 손목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내 아들 비막간은 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다! 내 몸은 이제 못 쓰게 되었다. 내 자리를 비막간에게 물려주겠다. 앞으로 비막간이 너희들의 주인이다! 고리격대회의 맹주이자 북도성의 새 대군이다!”

눈밭에 대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사람들은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뭘 넋 놓고 있느냐? 환호해라! 너희들의 새로운 대군을 위해…… 환호해라!”

대군이 포효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눈밭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사람들은 높이 소리치며 엎드려 절했다. 그들은 얼굴을 눈밭에 묻고 여수우의 이름을 외치며 쌓인 눈을 세게 두드렸다. 눈가루가 펄펄 날아올라 아주 높은 곳까지 자욱하게 퍼졌다. 여수우는 망연하게 인파의 중앙에 선 채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표범 꼬리의 온기가 전해졌다. 아주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물건이었다. 내내 그것을 쥐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었다. 한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그냥 꿈같았다.

여수우의 손이 갑자기 툭 떨어졌다. 대군이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던 것. 늙은 대군은 비스듬히 여수우의 어깨에 기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여수우는 황급히 몸을 돌려 대군을 끌어안았다. 대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아들아, 내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했다…….”

하얀 반흔이 있는 눈이 마지막으로 여수우를 보았다. 여수우는 아버지의 눈빛이 조롱인지, 탄식인지, 애정인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반흔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어두워졌다.

여수우는 흠칫 놀랐다. 가슴 앞으로 손바닥만 한 부분이 욱신거리더니 극심한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안에서 찢어발겨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흠달한왕의 아들 여숭 곽륵이 파소이는 윤조 성제 4년 한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그는 아들의 어깨에 기댄 채 서서히 몸이 식어갔다.

초원을 30년 넘게 다스려온 이 군주를 후세는 그리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드넓은 한주를 물려받은 뒤 여숭 역시 뛰어난 전공(戰功)을 세웠다. 약한 병력으로 청양부 최대의 적인 삭북부를 물리쳤고 삭북부 늑대왕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과 화친을 맺어 초원의 주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만족인을 위해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고 빈곤한 유목민이 진정으로 부유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해주지도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우매해진 그는 자신을 가장 지지해 주던 란마부의 달덕리 칸을 죽였다. 게다가 호표기를 시켜 약한 진안부를 완전히 멸족시키고 석양 속의 철선강에 시신 수만 구를 버렸다. 무엇보다 여우처럼 믿을 수 없는 동륙인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점에서 가장 비난받았다. 만족의 주인이라는 신분으로 동륙의 일개 제후국에 고개를 숙이고 동맹을 맺었으며 자신의 가장 어린 아들을 흉악한 곳에 인질로 보냈다. 어쨌든 여숭의 이름은 부친의 혁혁한 명망 아래 빛나지 못했고 유목민들의 열종금 노래에도 그의 이야기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달리 추모하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청양 소무공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는 검을 짚고 산봉우리에 서서 제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는 초원의 모든 이에게 자기 아버지는 독수리 같은 군왕이었으며 이 초원을 매우 사랑했노라고 이야기했다.

눈 쌓인 언덕에 장작더미가 쌓였다. 구리 나팔과 기고가 섞여 울리는 소리 속에서 대합살은 웅도를 들고 소리 높여 <배가(拜歌)>를 불렀다. 노예들은 언덕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말가죽으로 감싼 대군의 유해를 손으로 차례차례 건네 올렸다. 대합살이 부싯깃을 던졌다. 등유가 스며든 장작은 금세 하늘을 태울 듯한 거대한 불더미로 변해 멀찍이 있는 1왕자의 눈과 비탈 아래에 있는 반역자들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는 호표기가 한 명씩 서서 칼로 그들의 뒷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호표기가 사정없이 목을 꿰뚫을 것이었다. 그들은 난을 일으키려 했던 칸들의 가족이었다. 북도성에서 거사를 일으키려고 비밀리에 모의를 했지만 1왕자가 적시에 그들을 진압했다. 이런 중죄를 지은 자는 초원의 규칙에 따라 가죽 자루에 넣고 말로 밟아 죽여야 했다.

“낙 형제, 내 아버지는 평생 무엇을 위해 산 것 같소?”

여수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틀린 것 같소. 내가 모르는 것이 아직 너무 많구려.”

“무엇을 위해 살든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1왕자…….”

낙자언은 여수우를 흘끗 쳐다보고는 움찔해 호칭을 바꾸어 불렀다.

“대군, 상심하지 마십시오. 북륙의 대군으로서 이 생에 무엇을 얻어야 할지, 대군의 부친께서는 죽기 전에 알았을 겁니다. 이제 1왕자가 북륙의 대군이니, 대군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여수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겁니까? 초원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천계성의 황제에게도 새로운 대군이 즉위했음을 알리십시오. 동륙의 황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풍염 황제 이후 만족이 동륙에 짓눌려 지낸 지 70년입니다. 오늘날 동륙은 이미 쇄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무능하고 대신들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지요. 그러나 북륙은 젊고 유능한 대군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북륙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초원인들이 궐기하고 북륙의 대군(大軍)이 일어나 동륙 황제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날이 곧 올 것입니다!”

낙자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여수우는 잠자코 먼 곳의 불을 바라보았다.

“낙 형제는 동륙인이면서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 순국의 입장이오, 아니면 청양의 입장에서 한 말이오?”

낙자언은 순간 흠칫했으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대군 앞에서 스스로를 충신이라 자랑한 적은 없었지요? 이 낙자언은 동륙의 정세를 뒤엎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는 순국의 입장에서 그리 말한 것입니다.”

여수우는 몸을 돌려 낙자언을 쳐다보았다.

“10년 전 동륙의 세력이 북도에 침투했소. 순국과 하당국은 각각 조건을 내걸었지. 끝내 아버지는 하당국을 선택했고 나는 순국을 선택했소. 오늘날 순국은 판돈을 제대로 된 곳에 걸었으니, 앞으로 우리가 동맹이오. 하지만 우리를 지지해 양추후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구려.”

“순국이 원하는 것은 하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천계성을 원합니다.”

낙자언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수우의 눈빛이 번득였다. 낙자언은 괜히 깜짝 놀랐다. 불현듯 여수우의 두 눈에 하얀 눈의 매와 같은 무시무시한 흰색 반흔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낙자언은 선대 대군이 세상을 떠난 그날 밤 이후 여수우가 아주 많이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수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뒤돌아 계속 불더미를 바라보았다.

“형제간의 갈등을 이용해 내가 북도의 대군이 되게 도와주고 본디 우리 파소이 가문의 땅이었던 것을 내게 주면서 순국은 청양 기병의 지원을 얻어 동륙 제후들 간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얻었소. 양추송의 입장에서는 아주 수지가 맞는 거래였지. 하지만 청양이 얻는 것은 뭐요? 낙 형제도 알겠지만 한주의 초원은 매우 척박하오. 이곳은 동륙의 1할만큼도 곡식을 수확해 내지 못한다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옮겨 다니며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소. 동륙 제후들의 다툼에 휘말려 가장 강한 기병까지 내주었는데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초원과 가축뿐이군.”

여수우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초원인의 적은 사실 동륙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하실 만도 했지.”

“이 세상에 정말 원래 파소이 가문의 소유였던 땅이 있습니까?”

낙자언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상에 양추후 소유였던 땅이 없는 것과도 같지요. 드넓은 구주는 신께서 창생에게 남겨준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맹수 같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맹수는 남의 입속의 먹잇감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의 영토를 갖고자 하지요. 또한 맹수만이 서로의 동료가 됩니다. 제가 철저하게 벗으로서 돕는다고 하면 대군께서는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낙자언이 나직이 읊조렸다.

“왕이여, 반드시 네 국토의 적에게 적개심을 품고 동시에 태양에게서 이 법칙을 본받아야 하노라. 그가 옥좌에서 승리의 칼을 휘두를 때에야 이 세상은 그의 태양빛에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니.”1)

“<손왕전>에 나오는 시가로군. 존격이태 칸이 굴복한 적에게 관대하지 말라고 손왕을 설득하는 가사이지.”

“십수 년 전, 저는 양추후의 명을 받고 북도에 사절로 왔습니다. 출발하기 전 찾을 수 있는 모든 만족의 글은 다 읽었습니다. 초원의 일들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이 대목은 가슴에 낙인처럼 남아 있습니다. 대군께선 <손왕전>을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손왕이 어찌 대답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손왕은 이렇게 말했소. 나의 벗이여, 날개를 단 사자 존격이태 칸. 그대는 내게 화염으로 타들어가는 대지를 지키라 권하는 것이오?”

“존격이태 칸은 이렇게 답했지요. 위대한 왕이여, 손에 든 화염의 칼은 적에게 휘두르면 적들을 죽일 것이요, 내던지면 그대 가족의 초원을 불태울 것입니다.”

낙자언이 여수우의 말을 이어받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륙에서 성인의 큰 도리를 배우고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자부했는데, 저를 이렇게 울리는 대화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규범은 가장 단순하기도 합니다. 대군, 양추송 대인이든 대군이든 둘 다 손에 화염의 칼을 쥐고 있습니다. 적을 베어 죽이고 영토를 확장하지 않으면 가진 국토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수우는 침묵했다.

낙자언이 느릿하게 말했다.

“우리는 청양을 철기병을 지원해 줄 맹우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양추후께서는 제게 대군께 한 가지를 잘 설명드리라 했습니다. 우리와 협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웅이라고요.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와 동륙을 공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군, 때가 되었습니다. 철기병은 북도성만 지킬 것이 아니라 외부로 나가 영토를 확장해야 합니다. 제가 양추후를 대신해 대군께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양추후가 천계성에 진군하여 주둔하는 그날, 우리는 동륙의 주(州) 하나를 청양의 목장으로 쓰도록 떼어드릴 겁니다!”

“내가 가장 부유한 완주를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낙자언은 말은 단호하게 하면서 얼굴은 빙그레 웃었다.

“오직 천계성만 나누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곳은 우리 동륙의 황권이 존재하는 곳이니까요.”

여수우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수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언덕 아래 꿇어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제 곁의 귀족 셋을 보았다.

“저들은 나를 죽이고 정권을 찬탈하려 했던 죄인이오. 저들의 노예, 목장과 가축을 모두 빼앗아 그대들에게 하사하겠소.”

귀족들은 기뻐하며 무릎을 꿇고 경이로운 하사품에 감사했다. 죽임을 당한 칸들의 인구와 가축의 수는 청양부 재산의 근 절반에 달했다. 여수우는 그 재산을 자기 것으로 귀속시키지 않고 곧바로 그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낙자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 * *

1) 아타 말릭 주베이니의 <세계정복자사(The History of the World-Conqueror)> 3부 3장에 나오는 시를 각색했다. 원작은 몽골의 여러 왕과 이밀들이 몽케 칸에게 반역자를 처벌할 것을 권하는 시이다. -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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