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28화 (22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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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매의 죽음 (1)

윤 성제 4년 겨울, 한주 북도성.

만족 기년(紀年)에 따르면 올해는 풍년(風年)이었다. 북풍이 매우 이르게 찾아왔고 맹렬한 폭설도 뒤따라와 화창한 하늘이 드물었다. 삭방원의 청양부 목민들도 가축들을 이끌고 북도성 안으로 피했다. 두 달이 지나자 마른 양은 거의 다 죽였고 통통한 양들도 죽이기 시작했다. 새끼 양은 엄동설한을 못 견디는 까닭에 전부 죽였다. 하지만 날은 여전히 음침한 잿빛이었다. 반달 천신이 진노한 안색 같았다. 성 밖에는 사람이 빠져 죽을 정도로 눈이 깊이 쌓였다. 말을 타기도 불편하고 길을 찾기도 매우 힘들어 좀처럼 성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꽤 오래 바깥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모두가 불안해했다.

17년 전, 지금 못지않게 한바탕 폭설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종말이 온 것 같았다. 귀족들은 노예를 죽여 하늘에 제를 올렸다. 여인들은 여름에 회임한 아이를 잇달아 지웠다. 태어난다고 해도 키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해 북도성 안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아이들 중에 대군의 막내아들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도 있었다.

누군가가 ‘반달 천신이 분노해 청양에 벌을 내렸다’고 암암리에 퍼트렸다.

올 여름에도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 내내 건강하던 대군이 사냥을 하다가 말 등에서 떨어졌고 그 후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금장궁 안에서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대군은 이미 눈이 멀었고 정무는 모두 1왕자 여수우가 맡았다. 또 칸들과 1왕자가 금장궁에서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칼을 뽑아 들고 맞서는 지경까지 갔으며 그 후로 칸들은 각자 자기 장막을 지키고 앉아 다시는 금장궁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깊은 밤.

삭풍과 함께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새하얗게 허공을 휩쓸었다. 차가운 바람이 장막 주위를 선회하며 흐느꼈다. 누가 야심한 밤에 호가(胡笳)를 부는 건지 아니면 나직이 흐느껴 우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소리는 바람 소리에 쉬이 뒤섞였다. 듣다 보면 호가를 부는 사람은 없고 그저 바람이 일으킨 환청 같았다.

“듣고 있자니 참으로 쓸쓸해지는군.”

1왕자 여수우가 여우 갖옷을 걸치고 뒷짐을 진 채 장막 입구에 서서 중얼거렸다.

여수우가 양가죽 휘장을 젖혔다. 눈송이가 날아들자 눈을 찌푸렸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여수우는 묵묵히 밖을 바라보았다. 울적한 얼굴이었다.

그의 뒤에 있던 2왕자 여복은 다급해졌다.

“형님!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칸들의 칼과 창이 곧 우리 목구멍 앞에 들이밀어질 거라고요. 어떡할지 생각하셔야죠!”

“철유1), 너는 모른다. 이 호가 소리를 들으니 흔들리는 풀처럼 마음이 어수선하여 칼부림할 의욕이 안 생기는구나. 생각해 봐라. 우리와 백부들은 오랫동안 싸웠다. 욱달한2)도 좌천시켜 멀리 보냈지. 한데 무엇을 위해서였더냐? 모두 똑같은 청양의 자손인데, 아무도 잘된 사람이 없지 않으냐.”

“형님은 자비로운 마음이 들지 몰라도 칸들은 우리를 동정하지 않아요!”

여복은 더욱 다급해졌다.

“척후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며칠간 칸들의 영채 안에서는 칼을 가는 소리만 들렸답니다. 양은 전부 죽여서 굽고 술 저장고도 열어 밤낮없이 술을 마셨다더군요. 우릴 공격하려는 겁니다! 형님은…….”

“연지는 잠자리에 들었느냐?”

여수우는 아우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어린 여자 노예에게 물었다.

“네, 잠들기 전에 고기죽을 한 그릇 드셨고 지금쯤 잠이 드셨을 겁니다.”

“그곳에 가 시중을 들어라. 이곳에 다른 이는 들이지 말고.”

“네.”

소녀는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장막 안에는 여수우와 여복만 남았다. 여수우는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했다.

“백부 세 분의 군마는 언제쯤 다 모이지?”

“수중의 기병 군대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모든 노예를 합치면 총 7만 명이니 대략 닷새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기병들이 다 모이자마자 공격한다면 길어야 사흘 안입니다! 9왕 쪽의 호표기는 산을 지나는 어귀에서 폭풍설을 만났답니다. 말을 타는 것보다 걷는 게 빠른 상황이라 이레는 더 걸릴 것입니다. 형님, 이제 외부의 지원도 없고 생사는 오로지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사흘이라…….”

여수우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에 경계를 유지하라 하고 순국인이 오기를 기다리자꾸나.”

“형님, 이 상황에 순국인을 기다리다니요? 동륙인은 다 여우입니다. 낙자언도 예외가 아닐 겁니다!”

장막 밖에서 갑자기 혼란한 인기척이 들렸다. 막 장막을 나갔던 소녀가 다시 달려 들어왔다. 여수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내 너에게 부인의 장막에 가 시중을 들라 하지 않았더냐?”

“손님이 왔습니다! 동륙에서 손님이 왔어요!”

소녀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장막 휘장이 휙 젖혀지고 인영 하나가 휘날리는 눈송이와 함께 성큼 들어왔다. 휘장을 젖힌 사람은 반찰렬로 여수우의 최측근 심복이었다. 동륙 손님을 뒤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온 반찰렬은 소녀를 내보내고 뒤돌아 장막 휘장을 꽉 닫았다.

“낙 형제!”

여수우가 다가가 순국인의 팔뚝을 붙잡았다.

“이번엔 1왕자를 뵙고자 목숨을 걸고 왔습니다!”

낙자언은 머리를 흔들며 쓰개를 벗었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눈썹에는 눈송이가 묻어 새하얬다. 몇 년 사이 그는 가느다란 수염을 길렀는데 입김의 열기에 눈이 녹아 수염에 가느다란 고드름도 맺혀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낙자언은 여수우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화로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소매에서 두 손을 꺼내 마주 비비며 말했다.

“손가락이 얼어 굳었습니다. 이대로 뒀다간 영 못쓰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여수우는 낙자언의 곁에 앉아서 구부러져 펴지지 않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엄동설한에 내내 말고삐를 잡고 있던 탓에 거의 기형이 되었다.

“불만 쬐어서는 소용없소. 못쓰게 되고 싶지 않으면 손가락을 떼어내는 고통을 참아야 하오.”

여수우가 말했다.

“1왕자께 맡기지요.”

낙자언은 시원하게 여수우에게 두 손을 건넸다.

“기름을 가져와라!”

여수우가 노예 소녀에게 명령했다.

그는 반질반질한 양 기름을 손에 비빈 뒤 낙자언의 손을 잡아당겨 불가에 대고 쬐었다. 낙자언의 손은 온기가 전혀 없어 돌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여수우는 재빨리 손을 비벼 낙자언의 손에도 기름이 서서히 스며들게 했다. 피부 표면이 점점 온기를 회복하자 여수우의 손동작이 더뎌졌다. 그는 천천히 낙자언의 손가락을 하나 쥐더니 힘껏 쭉 잡아당겼다. 낙자언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고통을 꾹 참았다. 통증은 서서히 가셨다. 경직되었던 손가락은 살짝 구부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겨우 손가락 하나 했소. 아파도 조금만 참으시오. 천천히 합시다. 관절들을 펴주지 않으면 앞으로 평생 말고삐를 쥔 자세로 살아야 할 거요.”

여수우의 말에 낙자언이 혀를 쑥 내밀었다.

“보십시오. 제 혀도 얼어붙었습니까?”

여수우는 낙자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약간 놀리는 표정인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할 수 있으니 당연히 괜찮겠지.”

여수우의 말에 낙자언이 웃었다.

“손가락이야 망가질 테면 망가지라지요. 나는 세객(說客)이지 무사가 아닙니다. 칼을 쥐지 못해도 이 혀만 남아 있으면 1왕자와 전쟁에 나갈 수 있어요.”

“세객을 여럿 보았으나 낙 형제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드물지.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요?”

여수우도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순국 특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초원에서 자주 보는 동륙 행상들과 달랐다. 낙자언은 분명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문인이 분명한데 초원인의 거침없는 야성을 지녔으며 독주를 좋아하고 목소리도 컸다. 유세를 시작하면 득의양양해지고 눈이 반짝거렸다.

낙자언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남망협 어귀로 상륙해 북쪽으로 쭉 달려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랑눈이었는데 반쯤 왔더니 말 가슴까지 눈이 쌓이고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길을 구분할 수가 없더군요. 가져온 말이 야북마라 다행이었지요. 역시나 추위에 강하더이다. 또 1왕자가 말씀해 주신 대로 새끼가 죽은 늙은 말을 데리고 왔는데 녀석 덕분에 태납륵강의 강줄기를 찾을 수 있었고 얼어붙은 강을 따라 북도성까지 왔습니다. 50명을 데려왔는데 살아남은 건 17명뿐이네요.”

여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눈이 무시무시하게 내렸소. 북도성은 외부와 소식이 끊긴 지 여러 날이 되었지. 하지만 이 눈이 아니었다면 북도성은 이렇게 고요하지 못했을 거요. 낙 형제가 이제 막 도착해 잘 모르겠지만 칸들이 금장궁 안에서 나와 반목했소. 아버지께서 대군 자리를 내게 물려주시면 자기 식솔과 가축을 이끌고 북도성을 떠나겠다고 선언했지. 한데 폭설로 길이 막혀 그들도 참고 있는 것뿐이라오.”

“참고 있다니요?”

여복이 콧방귀를 뀌었다.

“칸들이 참긴 뭘 참습니까? 밤마다 자기 장막에서 칼을 갈며 우리 형제의 목을 벨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요! 낙 선생, 형님 좀 설득해 보시오. 영 움직이질 않아 내가 초조한 맘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소.”

낙자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1왕자, 사실 2왕자 말이 맞습니다. 제가 북도성엔 없었지만 제 짐작대로라면 칸들은 북도성을 떠날 리 없습니다. 그들은 1왕자의 백부로 파소이 성을 쓰며 자기들도 북도성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북도성을 떠난다면 그들 수중의 사람들과 가축들로는 이 초원에서 언제 집어삼켜질지 모르는 작은 부락밖에 되지 못합니다. 머리 좋은 칸들이 왜 바보짓을 자처하겠습니까?”

여수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소. 철유는 내가 무르다고 하는데, 나도 인정하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와병 중이고 아직 표범 꼬리를 내게 넘겨주지도 않으셨소. 지금 칸들을 징벌하면 내가 가족을 죽이고 대군 자리를 찬탈했다고 전해질 거요. 그리 되면 밖으로는 다른 부락을 위협할 수가 없고 안으로는 청양의 대귀족들을 설득할 수가 없소. 내가 북도성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결국 이들이 고리격대회에서 나를 대군으로 추대해야 하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는 평생 초원인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가 없소.”

낙자언이 허허 웃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약간 왕조의 정통성을 따지는 우리 동륙인 같습니다. 1왕자께 동륙의 전고(典故)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여수우가 공손하게 말했다.

“1왕자께서도 풍염 황제를 아시지요. 그는 초원인의 마음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악마입니다. 하지만 우리 동륙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이고 사서에서는 그를 ‘무 황제(武皇帝)’라 부릅니다. 무 황제는 사서 전편에 수두룩하게 나오는 찬양의 표현이지요. 하지만 백씨 황족의 족보를 뒤적여 보면 풍염 황제는 서출 황자입니다. 황위에 오를 기회가 절대 없는 사람이었지요. 당시 풍염 황제의 형들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의 맥이 동륙의 모든 제후국에 두루 잇닿아 있었으며 황실 대신들도 지지하는 황자에 따라 파가 나뉘어 있었지요. 그러나 풍염 황제는 신분이 미천한 데다 나이도 어려서 그를 진정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수천 명의 금오위뿐이었습니다. 이들 금오위를 움직여 형들을 제치는 것은 승산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천계성 내부에서 승리한다 해도 물밑에서 형들을 지지하는 동륙의 귀족 세가와 제후국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풍염 황제의 부친인 인 황제가 붕어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인 황제의 유서에 쓰인 이름이 풍염 황제 백청우가 아니라면 그에게는 더 이상 동륙의 권력을 잡을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낙자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풍염 황제는 어떤 결단을 내렸소?”

여수우는 한참 몰입해서 듣다가 이야기가 끊어지자 공중에 들어 올려진 것처럼 견디기가 힘들었다.

1) 철유는 2왕자 여복의 만족 아명. 만족인은 가까운 사이일 때만 아명으로 부른다. - 저자 주

2) 욱달한은 3왕자 여수우의 만족 아명이다. -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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