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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늑대 떼의 주인 : 늑대왕 (2)
상도로합음은 몸의 무력감을 떨쳐내려 크게 호흡했다. 아첨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도로합음의 마음속에서 스승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어떤 내용들은 지나치게 놀라우며 세상 사람들이 쉽게 들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세상의 끝은 우리가 평생을 다 바쳐도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신의 땅이며 공허한 땅이다.”
노인은 멀리 눈 쌓인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그곳에 도달하려는 사람은 먼저 죽어야 한다.”
상도로합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이 말하는 이야기에는 모종의 진의(眞意)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앞의 설곡(雪谷)을 지나자마자 큰 설산의 산맥이 보일 것이다. 이 빙하는 얼어붙기 전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야.”
노인이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그곳에 가기 위해 왔다.”
상도로합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럼 산 아래에 바람을 피할 만한 장소를 찾아 쉬면서 재정비할 수도 있었다. 확 트인 곳에서는 멈출 수가 없었다. 눈보라가 너무 심한 탓에 멈추면 백자선처럼 영원히 이곳에 남게 된다.
“스승님. 설산에는 뭐가 있습니까?”
상도로합음은 조금 궁금했다.
“늑대가 있다.”
상도로합음은 그 대답 또한 이해하지 못했지만 되묻지 않았다. 이들 무리 중에는 이 사지(死地)에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스승의 걸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으니.
무리는 설곡에 가까워졌다. 올려다보니 이곳은 거인의 성 입구 같았다. 양쪽으로 눈 덮인 산봉우리가 성벽처럼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로 너비가 반리 정도 되는 틈이 나 있었다. 전방의 도로는 평탄했으며 눈도 점점 잦아드는 것 같았다.
상도로합음은 스승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드넓은 강이었는데 천만 년 전 밀려온 한기에 얼어붙으며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들도 주위의 늑대 이빨처럼 날카로운 빙하 속에서 넓고 평탄한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지세를 보면 강줄기가 좁아지고 있었으니 전방이 바로 이 강의 발원지라는 소리였다.
나그네 무리는 분발하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럼 또 하루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허하고 적막한 곳에서 삶이란 외로우면서도 소중한 것이었다.
“앞이 보이느냐? 설산의 산등성이는 소녀의 등처럼 따스하고 부드럽구나.”
노인이 전방을 가리켰다.
상도로합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력이 우인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저 멀리 온통 새하얀 곳에서 어렴풋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호선이 보였다. 그것은 명명백백 설산이었다! 대설산은 웅장함의 극치였다. 상주 북쪽의 설산보다도 더 위용이 넘쳤다. 산체는 거대하고 하얀 눈은 거룩하고 깨끗했다. 내리쬐는 빛 아래, 눈 쌓인 봉우리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분홍빛을 띠었다. 커다란 설산은 갑자기 면사포를 젖힌 소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눈이 그쳤다. 그 찰나, 구름층 틈으로 스며 나온 햇살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황무지 위로 흩뿌려졌다.
“주제산이다. 성녀의 설산이라고도 하지. 주제는 만족의 언어로 성녀란 뜻이다. 이름을 지은 자가 대략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성녀처럼 수천수만 년 동안 이곳에 있었으며 신비롭고 아름답고 위험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녀의 전설만 알고 영원히 그녀의 진면목은 보지 못한다.”
노인이 탄식했다.
“이곳에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상도로합음이 물었다. 노인이 대답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처음 이곳에 도착한 무리라 여길 것이었다.
“있었다. 게다가 살아서 돌아갔지. 안 그랬다면 주제산이라는 이름을 후대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사실 이 이름은 만족 부락에 전해진 지 벌써 수백 년이 되었다.”
앞에 가던 이들 사이에서 경미한 소란이 일었다. 노인과 상도로합음은 보고 깜짝 놀랐다.
사슴이었다.
연달아 십수 일간 이들은 어떤 큼지막한 동물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동물을 본 것은 이레 전이었다. 얼음 계곡 부근에서 물소리를 듣고 얼음 표면을 뚫자 그 아래로 회색과 흰색 물고기가 보였다. 그들은 신선한 물고기로 한 끼 든든히 배를 채웠다. 생선뼈도 모아서 불태운 덕에 목탄을 소비하지 않고도 한동안 불을 쬘 수 있었다.
한데 이번엔 놀랍게도 사슴을 본 것이다. 처음 보는 종류였다. 우아하면서도 다부지고 체형은 성년 야북마와 비슷했다. 온몸에 난 농밀한 금색 긴 털이 모우처럼 얼음 표면에 드리워져 있었다. 등줄기는 힘 있는 활처럼 구부러져 뜀박질에 매우 능한 동물처럼 보였다. 머리의 커다란 뿔 한 쌍은 매혹적인 연한 금빛을 띠었고 잘 다듬은 옥기(玉器)처럼 유난히 반질반질했다.
사슴은 낯선 방문객들에게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대권을 장악한 황제 같은 태도였다. 이곳은 이 사슴의 땅이었다. 사슴은 태연하게 인간과 과부가 섞인 무리를 훑어보았다. 밤색 눈동자는 별로 적의를 띠지 않았다. 사슴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떠나갔다.
제자 하나가 등에서 활을 떼어냈다. 저 사슴을 쏘아 죽이면 대엿새 정도 먹을 식량이 더 생겼다.
천천히 걷던 사슴은 인간의 마음을 감지했는지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슴이 얼음 표면을 밟으며 쿵쿵 굉음이 울렸다. 질주하는 말 같았다. 무리는 잇달아 활을 뽑아 사슴의 뒤로 쏘았다. 그러나 기름을 바른 쇠심줄 활시위가 얼어서 뻣뻣해진 탓에 위협적인 화살은 단 한 대도 쏘지 못했다. 사슴은 설곡으로 내달렸다. 건장한 나그네 여럿이 등 뒤에서 창을 뽑았다. 사슴은 달리기가 빠른 편이 아니어서 아직 그들의 시야에 있었다.
쿵쿵 울리는 거대한 굉음에 이상한 소리가 뒤섞였다. 상도로합음은 주위를 훑어보았다. 위험을 감지한 그는 경계하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발아래 얼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새로 내려 쌓인 눈이 얼음 위에서 바스락바스락 미끄러졌다. 사슴을 쫓아갔던 무리도 이상을 감지했다. 이미 설곡 중앙으로 달려간 제자들은 긴장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눈사태다! 스승님, 눈사태입니다!”
상도로합음이 설봉 위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제자들도 보았다. 양쪽 봉우리 위로 한가득 쌓인 눈이 바슬바슬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설층(雪層)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하늘에 눈먼지가 일었다. 눈사태는 이미 시작되었다. 수백만, 수천만 근의 쌓인 눈이 세찬 조수처럼 휩쓸려오면 설곡 안의 모든 것이 파묻힐 터였다.
상도로합음은 행낭을 내던지고 노인의 어깨를 붙잡아 둘러메고 달아났다. 한 사람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과부인 상도로합음은 질주하기 시작하자 준마처럼 빨랐다.
노인이 손을 내밀어 상도로합음을 제지했다.
“나는 상관 말고 빨리 가라. 가장 긴 보따리를 가지고 가려무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청용원을 지키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제산 아래에서 죽었다고 전해다오.”
“스승님.”
상도로합음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키가 노인만 해져서 눈높이가 맞았다.
“이런 협소한 곳에서 눈사태는 매우 위험하다. 아마 너는 수 리, 심지어 십 수 리를 달려가야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야 한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가라.”
노인이 상도로합음의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누군가를 데려가면 너도 이곳에서 죽는다.”
가장 긴 보따리를 들고 뒤돌아선 상도로합음은 왔던 방향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는 스승의 명령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스승이 이대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상도로합음. 이곳에 데려다주어 고맙구나.”
노인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방에서 세찬 눈의 파도가 노인을 향해 모여들었다. 노인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 묵직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이제 혼자 남았다. 제자들도 곁에 없으니 자신의 망설임과 피로를 그대로 직면할 수 있었다. 사실 상도로합음이 사흘에서 닷새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했을 때 노인도 자신의 체력을 가늠해보았다. 이틀을 넘기기 힘들었다. 노인은 과거 비할 데 없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 힘이 고갈되는 고통을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자선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인은 생각했다.
‘뇌벽성, 나는 이제 이곳에 묻히네. 결국 동륙으로 돌아가 자네가 일으킨 전쟁을 보지 못하게 되었군.’
노인은 앉고 싶었다. 백자선이 말한 것처럼 좀 쉬고 싶기도 했다.
그는 백자선보다 좀 나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외롭고 무력하게 죽어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노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노인을 에워싸고 휙휙 불었다. 바람 속에서는 야수와 요괴가 울부짖는 듯했다. 그들이 곧 허공에서 달려들어 노인을 갈가리 찢을 것만 같았다. 울부짖음은 나직하고 아득했다. 늑대가 달빛 아래에서 길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늑대!”
노인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늑대의 울음소리였다. 쌩쌩 부는 바람 속에 나지막한 늑대의 울음이 휘감겨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절대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미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던 때, 그는 성공에 가까워져 있었다.
노인의 마음속에서 의지가 마치 부활하는 야수처럼 포효하며 솟구쳤다. 노인은 제 몸의 자생하는 힘이 느껴졌다. 몹시도 강대한 힘이었다. 아주 오래전, 그의 스승이 한 번 호흡하는 잠깐 사이에 전쟁터의 선혈을 흙 속으로 스며들게 만들고 그 흙에서 매우 화려한 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었다. 고요함 속에 내재된 위대한 힘이 제 스승이 호흡하던 순간 왕성하게 사방을 휩쓰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거대한, 일체를 바꿀 수 있는, 일체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지금 노인의 몸에 생겨나고 있었다!
상도로합음은 뒤편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걸음을 멈추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몸을 돌렸다.
노인이 빙원(氷原)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상도로합음도 예전에 부족 내 무당들이 별하늘 아래에서 짧은 지팡이를 휘두르고 느릿느릿 춤을 추면서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과 감응하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춤에서도 이 순간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적막한 달밤에 밀림 깊은 곳에서 천년 묵은 고목(古木)들이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자연의 소리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태고의 춤이자 신비의 춤이며 하늘의 춤이었고…… 신의 춤이었다!
그 순간 상도로합음은 넋이 나갔다. 세상 끝으로 통하는 문이 눈앞에 활짝 열린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