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23화 (223/360)

223

6장. 그 이후 (2)

땅거미가 내려앉은 남회성 밖 대류영 북측 운대(雲臺). 이 높은 누각은 갓 짓기 시작한 것으로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국주가 군의 위엄을 떨치고 백성들에게 상무 정신을 권할 목적으로 이 운대를 짓는다고 했다. 훗날 좋은 집안의 자제 중에서 전공(戰功)이 혁혁한 이는 이곳에서 상을 수여해 전국에 알릴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은 쇠난간이 높은 누대로 오르는 통로를 막고 있었다. 난간 너머로 두 무리의 젊은 군관들이 눈을 부릅뜨고 난간을 발로 차며 욕을 퍼부었다.

“자신 있으면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나와서 붙어보자고!”

“자신 있으면 너나 머릿수로 밀어붙이지 마! 너네 패거리 다 물러가라고 해. 나 혼자서도 너희 넷은 거뜬히 패줄 수 있어. 그것도 한 손으로!”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숨은 주제에 허풍 그만 떠시지! 한 발짝만 나와 봐 아주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줄 테니까.”

“한 발짝? 자, 여기 한 발짝!”

한쪽 발을 들어 난간 틈으로 뻗은 희야는 방기소를 차서 계단 아래로 넘어뜨렸다.

방기소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옆에서 돌멩이를 찾아 희야에게 내던졌다. 희야는 팔을 휘둘러 돌멩이를 쳐냈다. 방기소 일행은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누각 아래에서 올라가지 못했고 주위에 널린 것이 벽돌이었다. 그들은 잇달아 벽돌을 집어 들고 위쪽의 네 사람에게 던졌다. 네 사람은 버티지 못하고 누각 위로 철수했다. 방기소 일행은 작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달려가서 놈들을 실컷 패주면서 분풀이를 할 수 없으니 아래에서 분노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순시 교위는 한 무리의 군사들을 데리고 와 멀리서 지켜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못했다.

저들 두 무리는 오후에 주점에서부터 치고받고 싸우다가 거리로 나왔다. 몇 개의 거리에 걸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방관자들은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군인들이 길거리에서 싸우는 것은 보기 좋지 않지만 이런 일이 남회에는 적지 않았다. 다만 오늘처럼 이런 큰 싸움은 매우 드물었다. 방기소 일행은 자기들이 불리하자 싸우면서 끊임없이 제 편을 불러댔고 결국 100명이 넘는 젊은 군관들이 갑옷을 입고 저들 편에 모였다. 상대편은 보통 이상으로 용맹했다. 들으니 막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소년 셋은 탁자 다리를 휘두르며 수도 없이 물건을 때려 부수었다. 소녀 하나도 민첩했다. 그녀는 탁자 다리를 좌우로 휘두르며 뒤쪽의 친구들에게 떠밀려온 사람들을 꽤 많이 막았다.

순시를 돌던 교위는 이 소년 소녀를 알았다. 앞에 선 셋은 남회성에서 명성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이는 뜻밖에도 무전도지휘사의 조카였다. 승리하고 돌아온 대군의 입성식에서 이 소년이 맨 앞에 있었다. 그때는 전혀 이렇게 악독하지 않았다. 이 소식은 빠르게 식연부에 전해졌다. 그러나 무전도지휘사 대인은 이미 자환궁에서 퇴청한 후였고 가족들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소식은 다시 탁발산월부로 전해졌다. 탁발산월부에서는 유일한 하인이 나와서 금군 일은 장군 관할이 아니며 무전도지휘사 대인에게 물어야 한다고 전했다.

하여 교위들은 어쩔 수 없이 성안에서부터 성 밖까지 추격하며 싸우는 이들을 쫓아갔다. 누각까지 간 네 사람은 방기소 일행이 올라오지 못하게 위에서 쇠 난간으로 막았고 양측은 난간을 두고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방기소 일행이 피해를 입은 입장이었다. 주점 사장도 희야와 식연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고 했다. 방기소는 이마도 다쳤다. 찰과상이긴 하지만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교위들은 먼저 싸움을 시작한 사람을 잡아들여야 했다. 게다가 방기소 무리는 남회성에서 예전부터 권세가 있는 자들이라 순시 교위도 이 도련님 군관들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네 사람도 만만치가 않았다. 더구나 한 사람은 만족 청양부의 작은 주인, 세자였다.

결국 순시 교위는 양쪽을 말리지 못하고 저대로 난간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두었다. 어차피 나중에 벌을 받더라도 저들이 받지 교위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양쪽 모두 든든한 뒷배가 있고 찰과상을 내는 정도의 싸움에 불과하니 순시 교위가 나서서 해결할 필요까지는 없기도 했다.

바짝 독이 오른 방기소는 사람을 시켜 성안의 큰 주점에서 요리와 술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형제들과 난간을 에워싸고 앉아서 절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배가 고팠던 교위들도 방기소 무리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 시각, 운대 위.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벌써 머리가 빙글빙글 돌 정도로 술에 취했다. 그들은 인파 속에서 길을 뚫고 나오면서 뜯지 않은 술까지 훔쳐왔다. 희야는 한 손에 술 단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탁자 다리를 휘둘렀다. 아는 사람들은 그가 싸운다고 했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물건을 훔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도망치지도 못하게 된 이들은 봉해진 술 단지를 뜯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섞지 않은 술이라 주점에서 파는 술보다 훨씬 진했다. 주량이 세지 않은 이들은 금세 취했다.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은 여귀진이었다. 그는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온갖 추태를 부리는 친구들을 보며 속수무책이었다.

“아래에 있는 너희, 잘 들어라! 이 몸이 이제 깨달았다!”

식원은 두 팔을 휘두르며 운대 가장자리의 돌담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상을 못 받은 건 죽었기 때문이야. 내가 상을 받은 건 살아남았기 때문이고. 정말 합당하지. 더럽게 합리적이야!”

고성을 동반한 무의미한 욕에 아래에서는 또 벽돌을 던졌다. 하지만 식원을 맞추지는 못했다. 벽돌이 운대 외벽에 부딪히며 굉음이 울렸다. 이어 순시 교위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새로 지은 운대를 망가뜨리는 건 좋지 않았다. 식원은 아래를 가리키며 오만방자하게 껄껄 웃었다.

우연은 날개를 펼치고 날렵한 흰 제비처럼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람을 안고 날개를 치며 높은 누각 밖으로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우연!”

여귀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와아!”

우연은 의기양양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여귀진이 다가가 우연을 붙잡으려 했지만 우연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여귀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지만 술에 취하면 하나같이 끔찍해졌다.

고개를 돌려 희야를 본 여귀진은 깜짝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야는 식원과 함께 거리에서 자란 부랑배처럼 온갖 더러운 욕을 다 퍼부었더랬다. 한데 지금은 몹시도 차분하게 운대 너머 저 멀리 우거진 푸른 산을 바라보며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희야, 왜 그래?”

희야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야?”

여귀진은 희야를 불렀다. 그는 희야의 이런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그가 아닌 것처럼.

“아소륵. 그날 밤, 상양관에서 넌 뭐 본 거 없어?”

희야가 불쑥 물었다.

여귀진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기가 본 광경이 지나친 피로로 야기된 환각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다. 지금도 그의 몸이 급속도로 자라날 때 근육이 불근거리며 튀어나오던 느낌과 분명한 어떤 힘이 몸 전체로 쏟아져 들어가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희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짐승 같은 남자가 가륜첩의 몸을 짓누르던 것을 보았다고, 여귀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희야……. 너도…….”

여귀진이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나도 봤어. 원래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희야가 일어나며 한마디를 더 했다.

“그녀가 죽었어.”

희야는 밑도 끝도 없이 툭 그 말을 던졌다.

여귀진은 아연해졌다.

“생각났어……. 그녀는 생김새가…… 우리 엄마를 많이 닮았어…….”

희야는 그 말을 하는 데 온몸의 힘을 다 끌어 쓰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귀진의 눈을 보았다. 독주에 발갛게 달아오른 희야의 까만 눈동자가 서서히 식어가더니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귀진은 흠칫 놀랐다. 불현듯 희야가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 까만 눈동자를 가진 여인의 얼굴은 그의 머릿속에 유난히 또렷했다. 그녀 삶의 마지막 순간, 여귀진은 횃불을 던졌고 횃불은 먹처럼 새카만 어둠 속을 굴러갔다. 따스한 불빛은 차분한 엽근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비추었다. 희야는 매처럼 성벽 위에서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호아창은 포효했고 뇌벽성의 제자는 미소를 지으며 팔을 놓았다. 횃불이 스쳐 지나가고 엽근은 주사(朱砂)빛으로 물든 종잇장처럼 나풀나풀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 엽근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여귀진은 힘껏 희야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희야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비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운대 한가운데에 선 그는 별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고 나는 연습을 하는 새끼 매 같았다.

“그녀가 또 죽었어. 또 한 번 죽었어.”

희야가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죽었어. 근데 나는 여전히 그녀를 구하지 못했어.”

희야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 슬픔이 아무래도 감당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희야는 힘껏 제 머리를 그러쥐었다.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엄마…… 나는 쓸모없는 아이예요……. 엄마, 나는 쓸모가 없어요……. 난 쓸모없는…… 자식이에요…….”

희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귀진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고통을 느꼈다. 제 벗의 까만 눈동자가 어째서 증오가 어린 듯 늘 사납게 보였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희야는 타인을 증오했던 것이다. 아니면 사실 그는 스스로를 증오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증오에서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란 뭘까?

죽음은 완전한 끝이고 영원이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기억할 수는 있지만,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

희야는 얼굴을 뒤로 젖힌 채 그대로 둔중하게 땅에 나자빠졌다. 여귀진은 희야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다가갔다가 그가 그대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음을 알았다.

그날 밤, 남회의 하늘은 맑고 투명했으며 별빛도 영롱했다. 우연은 하얀 날개를 가진 제비처럼 먼 하늘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아직 “와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식원은 몽롱하게 운대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 몸을 반쯤 내밀고 속을 게워냈다. 희야는 차디찬 청석 위에서 여귀진의 외투를 덮고 아기처럼 쌔근쌔근 숨을 쉬며 조용히 누워 있었다.

여귀진은 운대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유목민이 말안장 위에서 평원의 숲과 먼 산을 돌아보듯 여귀진의 피리 소리는 아득했다. 여귀진은 정말 외로웠다. 모든 사람이 바람 속에 흔들리는 민망초 잎처럼 외로우리라.

그리고 여귀진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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