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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21)
여귀진은 백의의 수업 역시 로 선생처럼 큰 도리를 논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논리적인 내용도 다시 생각해보면 약간 공허했다.
그러나 백의는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요.”
백의는 여귀진과 식원은 보지도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진 채 막사 안을 천천히 걸으며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식 장군이 공주를 이곳에 보내 나와 만나게 해준 것은 오늘 공주께서 하당군과 함께 남회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 만남이 마지막 만남입니다. 국주께서는 출정 전 반드시 공주를 모시고 돌아와 달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공주를 많이 걱정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거듭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미 하당국과 약조를 하였으니, 도중에 물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또한 공주를 구하는 일도 하당국에서 큰 힘을 보태주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공주께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백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멀찍이 선 소주 공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공주는 놀라 어리둥절했는지 입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원도 자그마한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어린아이의 눈에서 저렇게 큰, 저렇게 깊은 실망감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쓰라렸다.
“공주께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백의가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어린 공주는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았다. 식원은 공주의 눈시울에 맺히는 눈물을 보았다. 맑고 투명한 눈물이었다. 그러나 눈물은 끝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 공주는 고개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좋습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초위국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만큼 공주로서의 책임도 져야 합니다.”
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능력 하나 믿고 살아왔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어린 공주께 전쟁의 피해를 나누어지게 하다니 참으로 우습군요.”
백의는 그곳에 선 채로 아득하게 공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여귀진은 백의의 눈을 보았다. 그 짧디짧은 눈맞춤은 얼떨떨해질 정도로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백의의 눈빛 속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여귀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소주 공주는 이해하는 것 같았다. 소주 공주는 백의를 마주한 채 꽃잎 같은 입술을 애써 말아 물며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백의는 무심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는 듯했다.
챙 소리가 났다. 무기가 뽑혀 나오는 소리였다. 식원이 패검을 뽑아 비스듬하게 땅에 꽂으며 소주 공주의 앞을 막았다. 식원은 긴장해 저도 모르게 방어를 했다. 왠지 식원은 지금 다가오는 백의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백의는 걸음을 멈추고 떨어져 있는 식원과 소주 공주 곁의 검을 보았다. 한참 뒤 그는 걸음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나 원래 자리에 섰다.
“남회에 도착하면 하당국 국주가 최고의 스승을 마련해줄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제가 가르쳐준 것처럼 열심히 새기십시오. 제가 전에 가르쳐드린 내용들 중 일부는 아직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아마 오랜 세월이 지나야 진정으로 이해가 되겠지만 억지로라도 반드시 외워두십시오. 세상엔 늘 만남은 적고 헤어짐은 많습니다. 저라고 해도 평생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죽으니까요. 앞서 가르쳐드린 것들은 훗날 떠올리면 쓸모가 있을 겁니다.”
백의는 어린 공주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용감해지십시오.”
여귀진은 울컥해서 “그런 거였구나” 하고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라 말하는 이유는 훗날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동굴 깊은 곳에서 칼을 든 순간 역대 선조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그 노인은 여귀진이 기억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훗날 그가 영웅으로 성장했을 때 이 기억 속의 지식이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보게.”
백의가 여귀진과 식원을 향해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한 식원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무지 비단을 공주의 머리에 덮어씌우더니 그녀를 안고 성큼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여귀진은 백의를 흘긋 보았다. 당대 최고 명장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돌연 백의가 몹시도 지쳐 보였다. 여귀진은 어쩌면 난세의 대장부에게 이보다 더 실망스러운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꽃봉오리 같은 소녀에게 짊어지게 하였으니.
난생처음으로 여귀진은 이 난세를 종횡무진하는 사내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일에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사 밖, 식연이 백의의 참모인 사자후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양측 모두 깍듯했다. 예절이 장황하고 신중했다.
“고월의 장군은 황성에 가지 않는답니다. 진북후 뇌천엽이 그리 명했다더군요. 식 장군도 황성에 안 가십니까? 하당국 국주께서는 황실과 사이가 매우 가까운데, 장군께서 직접 폐하를 뵙고 문후를 여쭙지 않으면 나무라지는 않으실는지요? 이번 대전에서 하당국의 공로가 매우 크니, 폐하께서는 반드시 하당국을 크게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리실 겁니다!”
사자후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식연도 미소를 띤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고 사자후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나는 백 대장군이 아니네. 뻣뻣하게 굴다가 작살나느니 알아서 기는 충견이 되겠어. 황성의 어리석은 것들은 상대도 하고 싶지 않네!”
사자후는 식연의 말에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백의 장군이나 사 선생이나 심정은 내가 말한 것과 비슷할 텐데? 그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울 뿐이지. 지금 여기엔 그대와 나뿐이고 그대가 황제께 내 행태를 고발하려 해도 증인이 없으니 나는 사실대로 말한 것이네. 외람되었다면 양해해주시게.”
식연은 씩 웃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몇 걸음 물러난 식연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고서 사자후와 헤어졌다.
뒤따르던 하당 군사들이 말을 끌고 왔고 세 사람은 말에 올라탔다. 여귀진은 소주 공주를 식원에게서 받아 제 말안장에 태웠다. 군사들은 그들의 뒤에서 문장(紋章)이 없는 검은 깃발을 들고 진북군과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그들이 진영 문을 나섰을 때 돌연 멀리서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퉁소 소리가 그치고 누군가 처연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크게 노래를 불렀다.
나 그대 위해 연꽃을 따러 물에 들어가리
나 그대 위해 깃발을 들고 전장에 나가리
나 그리워할 그대 위해 공명을 버리리
나 그대의 백발을 슬퍼하며 천천히 노래 부르리
본래 부드럽고 완곡한 노래인데 지금은 격앙되고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식원은 오싹해져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았다. 식연이 손을 내둘렀다.
“백 대장군의 노래는 듣기 매우 어렵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세 사람은 말을 세우고 한 사람만 있는 막사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하염없이 이어지던 노랫소리는 끝에 가서 바위가 갈라지듯 웅장해졌다. 노랫소리라고는 하지만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에 가까웠다. 주위의 군사들은 모두 하던 일을 내려놓고 멍하니 서서 듣고 있었다. 순간 분주하던 군영 안에서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보다 낫군.”
식연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우리의 음악적 조예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지. 심지어 내가 좀 더 나았거늘. 게으르게 통속적인 곡조만 연주하는 동안 퉁소 하나에만 공을 들인 백의만 못해졌군. 노래 부르는 것을 들으니 내가 또 뒤처진 기분이 드네. 앞으로 음악, 이 두 글자는 백의 앞에서 꺼내지 말아야겠어.”
백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시 고요함이 흐르고 백의가 다시 그윽하고 길게 읊조렸다.
“꽃이 피고 5년이 흘러도
출정한 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네.
임이 내 무덤을 보면
황량하고 차디찬 풀뿐이리!”
식원은 노랫소리가 웅장하고 힘찰 때는 그래도 태연할 수 있었다. 지금 백의의 구슬픈 읊조림을 들으니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관통한 것처럼 가슴 한 편이 공허해지면서 식은땀이 갑옷 아래 내의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목소리가 흩어지고도 오래도록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금 술잔을 기울이며 단판1)에 맞춰 노래를 부르나 외로운 배는 이미 천리를 갔구나.”
식연이 나직하게 웃었다.
“숙부, 백 장군이 무슨 노래를 부르시는 겁니까?”
식원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앞의 노래는 초위국의 민가로 한 사내가 여인을 위해 출정하고 또 그 여인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는 이야기다. 출정하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자주 부르지. 하지만 뒤에 부른 곡은 나도 못 들어봤다. 옛 곡조 같은데 앞의 노래와 의미가 이어지는 듯하구나. 출정하고 5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면 그의 무덤을 찾아가보라는 이야기다. 업적을 세우지도 못하였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게지. 직접 쓴 시 같구나.”
“백 장군께서 시도 쓰십니까?”
식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데 저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요.”
“네가 어찌 알겠느냐. 수십 년을 알고 지낸 나도 그를 모르겠는데. 하지만 저 시에 왠지 암시하는 바가 있는 것 같구나.”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의 시는 언제나 대범하지 못해. 지나치게 고요하고 서글프지. 늘 생사의 갈림길에서 멀리 떠난 이를 슬퍼하거나 영웅이 검을 들고도 만회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한탄하는 느낌이야.”
백의의 처량한 초혼가(招魂歌) 속에서 식연은 말을 몰아 멀어져갔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여귀진은 들었다. 말안장 앞에 앉은 무지 비단을 두른 어린 공주가 중얼거리는 그 말을.
[역사]
상양관의 근왕전(勤王戰)과 쇄하산 팔록원 혈전은 윤말섭초 역사상 의의가 깊은 두 번의 결전이자 모두 리국 한 나라가 제후국 연합군과 대결한 전쟁으로 병칭된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민부들을 비롯해 총 30만 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매 전쟁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전장에는 산더미처럼 시신이 쌓였다.
상양관 근왕전은 윤성제 3년 10월 열이레, 리국 사현의 군대가 상양관 아래에서 철수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총 석 달을 넘기지 않았고 결정적인 전투는 겨우 한 번이었으나 각 제후국 사상자의 총합은 7만 명을 넘었다. 처참한 정도는 대윤 개국 당시 장미 황제가 양관을 강공(强攻)했던 그 일전 못지않았다. 불세출의 패주와 불세출의 영웅들은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볐다. 후세의 병법가들은 이 전쟁을 돌아보며 연구했는데, 모두가 양측 지휘관의 책략을 격찬하면서 후대 사람들이 당시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선대 사람들을 능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여겼다. 이 전쟁은 요새 공방전의 고전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실상 이 전기는 피로 쓰인 것이었다.
7만 구의 시체는 거두고 묻을 힘이 없어 황야에 방치되었다. 이듬해 봄까지 초위국은 계속해서 현장에 시체를 묻을 민부를 징발했다. 상양관은 이 전쟁 중에 수만 구의 시체가 쌓인 죽음의 성이 되었다. 백의 등 6개 제후국 군대가 철수한 다음 날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이 오래된 요새를 포악하게 씻어냈다. 인근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하늘의 통곡’이라 말했다. 망자의 원한이 하늘에 쌓여 만들어진 먹구름이 무너지면서 그들의 눈물이 장대비처럼 콸콸 쏟아진 것이라고. 그 비로 성안 수심은 4척이나 되었고 시체가 부패함에 따라 역병이 유행해 아무도 그곳에 주둔할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다. 하여 상양관 주위는 사지로 변했다. 연합군은 상양관 밖 60리 지점에 토성 ‘남정(南靖)’을 짓고, 이듬해 여름 상양관 정리가 끝날 때까지 상양관을 대신하는 황성 입구로 삼았다. 그러나 ‘남정’ 토성은 상양관 정리가 끝난 후에도 계속 남아 상양관의 전초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남정’이라는 이름은 잘 알지 못하고 이 성을 ‘곡성(哭城)’이라 불렀다.
이 전쟁의 영향은 수십 년 후까지 이어졌다. 초위국 토지는 결국 대섭의 지도에 편입되었고 경덕제 재위 기간에 처음으로 인구를 조사했다. 대섭의 관원들은 초위국의 수천 가구가 여자끼리 결혼해 부부라 부른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경덕제는 조세 회피를 의심하며 진상을 규명하라 명을 내렸다. 그런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초위국은 상무정신이 성행해 시골의 남자들이 무리를 이뤄 군에 지원했는데 상양관 일전으로 초위국 군대는 사상자가 심각했고 시골 마을의 사내들이 모두 상양관 아래 묻혔던 것이다. 한동안 여인들은 시집갈 곳이 없었다. 용모가 출중한 여인들은 부잣집에 첩으로 가느니 여자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힘이 좋은 사람은 농사일을 하고 연약한 이는 집에서 실을 뽑고 천을 짰다. 마을에서도 부부로 불렸고 한 가구로서 세금도 냈다.
경덕제는 한탄하며 말했다.
“그해 상양관 아래에서 십만 명이 죽었는데 그 시체들이 나란히 선다면 태청궁이 아무리 크다 해도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참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전율을 금할 길이 없다. 내 형님은 그런 전쟁에서 귀신을 죽였으니 과연 강심장이라. 하여 천하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형님의 업적을 이어받은 황제이고 내 형님은 개국의 영웅이라더군. 그것은 나를 기만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나 영웅의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이 피를 흘린다. 남자가 전쟁터에서 죽으니 부모는 슬퍼하고 여인은 의탁할 곳이 없어 서로 결혼하여 인륜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도다.”
그리하여 경덕제는 은혜를 베풀어 여인들끼리 혼인한 가구에는 평생 세금 납부를 면제해주었다. 여인들끼리 혼인한 가구는 그 소식을 듣고 감격해 서로 얼싸안고 통곡하였다.
상양관 혈전으로부터 41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윤 말기의 어지러운 전쟁이 끝난 지도 20년이 다 되었다. 과거 이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영웅들도 어느새 그들의 부하 장수들처럼 영원히 흙 속에 묻혔다. 과거의 웅대한 포부도 흩어져가는 혼백으로만 남아 흐르는 구름처럼 하늘을 내달렸다. 소리치고 포효하고 과거의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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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자(拍子)를 치는 데 쓰는 널빤지 모양의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