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19화 (21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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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19)

탁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깨졌다.

촛불이 뇌벽성의 얼굴을 비추었다. 명상 중이던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맞은편 작은 탁자의 백자병에 닿았다. 백자병은 이미 깨진 상태였다. 병은 갑자기 저절로 갈라졌다. 손댄 사람도 없고 바람도 한 점 없었다. 백자병의 매끈한 표면에는 본래 선명한 붉은색 백급쇄(百扱碎)1) 무늬가 있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색채와 광택이 투명해 병속에서 자라난 것 같은 무늬였다. 병이 깨지고 붉은색 액체가 흘러나와 탁자에 흥건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점점 어떤 문양이 드러나는 것 같더니 그 무늬는 불빛 아래에서 얼마 가지 못했다. 이름 모를 액체에서 저절로 푸른색 불씨가 일어나더니 이내 소리 없이 타올랐다. 잠시 후 불길이 꺼지고 탁자에는 흰색 자기 파편만 남았다. 파편 표면의 붉은색 무늬도 사라졌다. 탁자에는 타들어 간 흔적도 남지 않았다.

입구에는 무쇠로 만든 것 같은 그의 제자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에 삼엄한 철가면을 쓰고 눈만 드러냈다. 묵묵히 도자기 파편을 보던 스산한 눈에 어렴풋이 비통함이 어렸다.

“네 형이 우리를 떠났구나.”

뇌벽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나 보구나. 결국 한때 천구 무사였던 소월과 묵우를 대면했겠지. 그들은 우리를 상대하는 방법을 안다. 네 형은 아직 젊거늘. 그는 내 자랑이고 또 내 잘못이다.”

“이곳을 떠나는지요?”

제자가 나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고 여전히 침착했다.

“아니. 나는 저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좀 쉬어야겠다.”

뇌벽성은 천천히 눈을 감고서 면전의 도자기 조각 쪽으로 손을 내둘렀다.

“기념으로 거둬두어라. 네 형이 남긴 유일한 물건이다.”

제자는 앞으로 나와 살며시 자기 파편을 받쳐 들었다. 파편을 수건에 싸서 흉갑 안에 넣은 그는 다시 문가로 물러났다. 그도 뇌벽성처럼 눈을 감았다. 유실(幽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촛불도 저절로 소리 없이 꺼졌다.

하늘이 부옇게 밝아왔다. 밤이 지났음에도 유실의 구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뇌벽성과 그의 제자는 명상에 잠긴 듯도 하고 깊이 잠든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고 옷자락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이때 제자가 눈을 떴다.

“왔습니다!”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었다. 발소리와 더불어 무사의 무거운 장화 소리와 도검이 갑옷에 부딪치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상대가 다가오는 속도는 몹시 빨랐다. 제자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고 뇌벽성의 뒤에 섰다.

덜커덩. 누군가가 세게 문을 밀어 열었다. 장공주가 성큼 들어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뇌벽성을 직시했다. 그녀의 등 뒤로 군장을 한 정예 무사들이 서 있었다. 백리녕경은 두 손을 옷소매 안에 그러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장공주의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는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수갑의 갑옷 조각이 맞부딪치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뇌벽성은 눈을 뜨지 않고 살며시 손을 내두르며 제자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상양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벽성 선생이 내게 건의한 전략은 이미 실패했고 리국 대군은 밤중에 철수했다더군요.”

장공주의 냉랭한 말에 뇌벽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장공주께서 제 목을 가져가야 분이 풀리신다면 그리 하십시오. 저는 이미 너무 오래 살았기에 노쇠한 목숨 따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월의 대교장이 자기 목숨을 중시하지 않는다고요?”

장공주가 싸늘하게 물었다.

“벽성 선생은 내가 죽이지 않을 것을 짐작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장공주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아름다웠지만 이미 늙어버린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무섭고도 처량해 보였다. 뇌벽성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진월교? 장공주께서는 어떻게 저와 그 종파를 연관시키셨는지요?”

“산벽공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장공주께서는 무엇을 아십니까?”

뇌벽성이 되묻자 장공주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벽성 선생께 사죄를 드려야겠습니다. 제 수각에 발을 들이신 후로 제 사람이 선생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별 소득은 없었으나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더군요. 9년 전 선대 황제께서 파견한 특사가 천척해협을 건너 북륙 청양부에 사절로 갔지요. 벽성 선생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 같던데.”

“오?”

뇌벽성이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장공주는 득의양양해 길게 그린 양 눈썹을 치켰다.

“선제께서 파견한 특사의 이름이 산벽공입니다. 어떤 작위도 없었으며 내력도 배경도 알아낼 수 없었지요. 저희가 아는 내용은 그자가 입궁해 선대 황제 폐하를 뵙자마자 극도의 신임을 얻었다는 것뿐입니다. 그 후로 선대 황제께선 많은 일을 산벽공에게 직접 맡겨 외부인은 알 길이 없었지요. 더 흥미로운 점은 무기고에 있던 중노(重弩) 2만 5천 자루도 바로 그때 선대 황제께서 산벽공의 건의에 따라 공조부에 지시해 제작되었다는 겁니다.”

장공주는 말을 멈추고 뇌벽성의 눈을 직시했다. 뇌벽성의 눈에서 일말의 동요든 두려움이든 끄집어내려는 듯했다. 그러나 뇌벽성은 태연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눈빛은 맑고 투명했으며 가을날의 잔잔한 호수처럼 담담했다.

한참의 적막이 흐르고 뇌벽성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산벽공과 저는 사형제 간입니다. 같은 스승을 모셨고, 같은 신을 받들지요. 산벽공은 또 다른 뇌벽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의 목적과 능력은 거의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장공주께서는 어째서 우리가 진월의 교도라 확신하시는지요?”

장공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500년 전 진월의 대교종 고륜아가 국사를 맡은 전말을 사관이 분명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궁중에 보관되어 있지요. 외부에 유출하기 곤란했을 뿐입니다. 벽성 선생, 당신들은 우리 백씨 면전에 그대들의 얼굴을 드러냈고 황실에 영예와 살육을 불러왔습니다. 우리 백씨 자손들은 이를 잊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장공주를 위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벽성 선생이 한 사람을 위해서만 일했으면 합니다.”

“제가 천리를 마다않고 온 것은 제 힘을 장공주께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장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황성에서 제가 뭐라고요? 이곳은 숨은 병폐가 만연하고 권세가가 없는 곳이 없지요. 일개 아녀자인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와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선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저를 능가하지요. 오늘 아침 제가 그에게 벽성 선생 이야기를 했더니 무척 흥분하면서 직접 벽성 선생을 뵙고 가르침을 얻고 싶다 하더군요. 하여 바로 달려온 것입니다. 상양관 계획의 실패를 따져 묻고자 함이 아니라 선생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지요.”

“누구입니까?”

“그야 현 백씨 황제이지요!”

장공주가 뒤편으로 손짓을 했다.

줄곧 맨 뒤에 숨어 있던 군장한 무사들이 성큼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영민하고 준수한 청년들로 전신에 장엄한 검은색 중갑을 걸쳤다. 흉갑은 거울처럼 환하게 빛났고 암홍색 비단 전포를 덧입었으며 견갑에는 금색 장미 군 휘장을 늘어뜨렸다. 그들은 뇌벽성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반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주홍색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로 암홍색 두꺼운 비단 장포와 검은색 관(冠)이 놓여 있었다. 장포와 관은 모두 황금으로 무늬가 장식된 극도로 화려하고 장엄한 예복이었다. 황성 고관들의 조복(朝服)2) 수준이었다.

“태청궁 금오위가 청합니다. 벽성 선생께서는 예복을 갖춰주십시오. 폐하께서 선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두머리 청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억양이 다채롭고 운율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는 황실의 가장 정중한 예우였다. 그 어떤 중신이든 이런 예우를 받으며 태청궁에 입성한다면 기쁨과 자랑으로 여길 것이었다. 그러나 뇌벽성은 별로 흥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예복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내내 잠자코 있던 녕경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 그 예복을 잡으며 말했다.

“이 예복을 입기 전에 선생께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녕경 공자, 편히 말하시오.”

“벽성 선생께서 리국에 출사하고, 벽공 선생께서 황실에 충성한 시기가 2년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리국과 황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숙적이었지요. 같은 목표를 위한다면서 왜 두 분께서는 다른 진영을 선택했습니까?”

“우리가 다른 불씨를 선택했기 때문이오.”

“불씨요?”

“선대 황제와 위무왕 전하는 모두 가슴속에 화염이 타오르는 분들이라오. 완벽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지. 우리 진월의 신도들은 어떤 하나의 세력을 선택하지 않고 불씨를 선택할 뿐이오. 사람의 마음속 불은 이 천하에 활력을 준다오. 우리는 목숨을 신께 바치고 신께서 하사해주신 힘을 불씨들에게 나누어주지.”

뇌벽성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것이 내가 이곳에 온 이유요. 장공주든 녕경 공자든 마음속에 모두 불씨를 갖고 있소. 심지어 그 불씨는 영무예에 뒤지지 않는다오.”

“불씨들 사이가 적대적이라 해도요?”

뇌벽성이 녕경을 흘긋 보았다.

“그렇소. 결국 누군가는 우리의 보좌를 받아 승리를 거두고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될 거요. 물론 권력의 장악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한 수 배웠습니다.”

백리녕경은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뇌벽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쟁반에 놓인 예복을 잡고 툭 털어서 펼친 뒤 어깨에 걸쳤다. 대군을 지휘하는 듯한 거침없는 동작이었다. 실내의 모두가 예복이 펼쳐질 때 정면으로 휩쓸려오는 바람을 느꼈다. 금오위들도 경외하며 그에게 관을 씌웠다. 황제를 모시는 것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뇌벽성은 늠름하게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금오위들이 옷을 정리하도록 몸을 맡겼다. 그는 체구도 우람하고 용모도 삼엄해서 가까이 다가가 볼 수가 없었다.

장공주도 뇌벽성의 뒤로 걸어가 주름진 옷을 정리해주었다.

“장공주께 폐를 끼쳤군요. 우리의 계획을 완성하지도 못했는데 용서와 더불어 폐하께 천거까지 해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뇌벽성은 그리 말하면서도 별로 황송한 기색 없이 장공주가 그를 위해 어깨의 옷주름을 매만지도록 두었다.

“계획은 완성하지 못했으나 벽성 선생의 힘은 우리 모두가 이미 똑똑히 보았지요. 이런 힘을 얻었는데 못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장공주가 가볍게 웃었다.

“제가 처음에 말했었지요. 여러분이 신의 사자라면 가져오는 것이 파괴든 은혜든 아무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최선을 다해보지요!”

노인은 예복을 휙 털며 성큼 밖으로 나갔다. 장공주와 녕경, 금오위와 제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 * *

1) 송나라 때 가요청자의 개편열(금이 간 듯 잘게 갈라진 무늬)의 한 종류.

2)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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