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18화 (21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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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18)

희야는 엽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새카만 눈동자 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희야는 등줄기를 타고 뒤통수까지 치오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저 두 눈! 그래, 저 눈! 새카맣고, 피가 흐르는 눈.

“그녀를 놔줘!”

희야는 제 목소리가 왜곡되기 시작했음을 느끼지 못했다. 눈빛도 분노한 짐승처럼 변해갔다.

“아주 훌륭한 눈빛이야. 네게서 살인의 충동이 느껴지는군.”

시무사가 칭찬했다.

“그럼 덤벼봐라. 어쩌면 네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나를 죽이기 전에 이 여자가 먼저 죽을 것이다.”

계속 한 걸음씩 물러나던 시무사가 갑자기 성벽 위, 비를 피하는 용도의 굴문으로 달려갔다.

호아창이 격렬하게 떨렸지만 희야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엽근의 눈을 보았다. 엽근도 희야를 보았다.

엽근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놈을 죽이고 나도 죽여요. 그래야 당신들이 살아요. 장관…… 아니, 희 공자님. 미안해요……. 계속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어요. 나는 줄곧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엽근의 말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다만 자신과 몹시도 비슷한 눈을 가진 소년을 보니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 뿐. 엽근은 희야의 눈에 깃든 어마어마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 슬픔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엽근은 여귀진의 10분의 1만큼도 미치지 못할 만큼 말수가 적었던 이 소년이 자신을 얼마나 믿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죽일 텐가, 아니면 이 여자를 구하러 올 텐가? 범인이여, 선택해라!”

시무사는 굴문 안에 숨겨두었던 것을 홱 끌어냈다.

어느새 그들에게 가까워진 식원은 그 물건을 보고 머릿속이 뎅 울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전체 뼈대가 고정축 위에서 거대한 익막(翼膜)으로 펼쳤을 때, 식원은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새의 날개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것이 있으면 바람을 타고 활공(滑空)할 수 있었다. 그것 없이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시무사의 심장이라고 해도 부서질 것이었다.

“젠장! 희야! 멍하니 있지 말고 놈을 죽여! 빨리!”

더 속도를 낼 수가 없었던 식원은 그저 큰 소리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식원은 소리를 지르다 숨이 턱 막혔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휘청하더니 땅에 굴러 떨어졌다.

“범인의 마음은 이렇게도 나약하지.”

시무사가 희야를 쳐다보며 냉담하게 웃었다.

“결국 네 약점이 너의 모든 벗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후회하지 않겠나? 그리고 너는 네가 구하려던 사람도 못 구한다. 그녀는 신의 제단에 바쳐질 것이다. 신을 배신한 자의 피와 살과 영혼은 전부 깊은 연못에 매장될 것이다!”

시무사는 날개 중간의 손잡이를 잡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거슬러 내달렸다. 그는 바람을 안고 달렸고, 곧 거대한 힘이 그의 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힘껏 발을 디디며 지면에서 떨어졌다.

“희야!”

여귀진이 큰 소리로 외치며 횃불을 던졌다.

여귀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와 시무사 사이에는 아직 얼마간의 거리가 있었다. 횃불은 날개를 태우지 못하고 환한 호선을 그리며 어둠을 지나 성 아래로 떨어졌다. 횃불의 호선이 번쩍 비추는 순간 희야는 엽근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말을 할 수 없었던 엽근은 그저 희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희야가 달리기 시작했다.

시무사는 벌써 성벽의 성가퀴로 훌쩍 날아올랐다.

희야도 성가퀴에 올랐다.

희야의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날개만 보였다. 그는 땅을 딛고 도약하며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어깨의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약하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바짝 조여들며 모든 힘이 조수처럼 터져 나왔다.

희야는 높디높은 성 밖으로 날아올랐다. 도약한 힘이 아직 몸을 받쳐주어 추락하지는 않았다. 희야의 모습은 날아오르는 거대한 매 같았다.

호아창이 포효하며 시무사의 등에 명중했다. 썩은 나무를 꺾듯 시무사의 갑옷을 부서뜨리고 그의 몸을 꿰뚫었다. 먼저 꽂혀 있던 고검 정도도 부딪쳐 날아갔다. 거대한 창날은 시무사에게 무시무시한 손상을 입혔다. 놈의 심장은 이 일격에 완전히 부서졌다. 호아창은 순금처럼 빛났고 창에 내재된 힘이 시무사의 몸에 흘러들었다. 녹아내린 강철이 온몸 구석구석을 훼멸하는 것 같았다.

희야는 창대를 꽉 움켜쥐었다. 창은 시무사의 몸에 꽂혀 있었다. 희야는 그 약간의 힘으로 버텼다. 그러나 시무사의 날개는 벌써 균형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희야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졌고 오후의 햇살만이 그곳을 비출 뿐이었다. 희야는 힘껏 손을 뻗어 시무사가 붙잡고 있던 엽근을 잡았다.

시무사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제 몸에 벌어진 일체의 상황을 믿을 수 없는 듯, 의아한 눈빛이었다.

“마목이두사……과리아!”

시무사는 힘겹게 창의 이름을 말했다.

시무사의 온몸에 무수한 상처가 다시 나타났다. 광분한 벌레들이 상처 부위를 파고 나와 창대를 타고 불가사의한 속도로 희야를 향해 기어왔다. 그러나 벌레는 우렁차게 울리는 창대에 닿는 순간 경이로운 힘에 의해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벌레들은 빙글빙글 돌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범인이여, 무슨 용기지?”

시무사가 손을 옮기자 엽근은 희야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단 2척, 하지만 희야가 전력을 다해도 다가설 수 없는 거리였다.

“너는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마지막…… 신의 벌이다!”

시무사가 엽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엽근은 우수수 떨어지는 잎처럼 추락했다. 시무사의 몸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불이 몸속에서 타오르는 듯 상처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몸에서 어렴풋하게 빛이 새어 나왔다. 희야는 창대를 놓고 엽근을 따라 낙하했다. 그러나 한 발 늦고 말았다. 희야의 귀에 육신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야는 생각했다.

‘죽었네. 결국 또 죽었어.’

세상은 온통 칠흑같이 캄캄했다.

여귀진과 식원의 비명 속에서 흰색 날개 한 쌍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 칼새가 사냥감을 덮치는 듯했다. 새는 추락하는 희야를 따라잡았고, 거대한 호선을 그리며 희야를 데리고 멀리 사라졌다. 모두 그 우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다.

시무사의 거대한 날개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재가 되어 있었다. 시무사는 그렇게 사라졌다. 인체 모양의 붉은 재는 금세 빗물에 꺼졌다.

그 시각 상양관 안에서 격전 중이던 군사들은 돌연 상대가 멈춘 것을 알아챘다.

정규는 강무외의 등 뒤를 덮치던 네모난 만도를 막았다. 그런데 만도에 실린 힘이 돌연 사라지더니 만도를 들고 있던 행시가 칼자루를 놓고 굼뜬 동작으로 물러났다.

모든 행시가 무기를 내려놓고 말없이 서 있었다. 생기가 그것들의 몸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진작 잠들었어야 했던 그것들에게 지금, 영원한 잠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모든 행시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늘의 어딘가를 보았다. 그곳에는 먹구름이 빽빽해 별이 보이지 않았다. 맑은 날이었더라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 별은 본래 빛 한 점 없는 별이기에.

행시들은 신성하게 기도라도 하듯 말없이 그곳을 응시했다. 피에 굶주린 부활자들은 지금 이 순간 이상할 정도로 장엄하고 숙연했다.

이후 그것들은 풀이 베어지듯 줄줄이 쓰러졌다. 이 망자들을 거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행시 떼의 몸은 빠른 속도로 말라갔다. 부풀었던 혈관의 피가 심장으로 돌아갔지만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하여 피는 그곳에서 차츰 말라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던 군사 하나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가 칼로 행시의 등을 찔러 보았다.

그는 기뻐하며 무기를 내던지고 팔을 마구 휘두르며 말했다.

“이겼다! 이겼다! 놈들이 전부 죽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환호성이 상양관에 울려 퍼졌다.

그 시각, 상양관 남쪽과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대군은 하늘을 뒤흔드는 환호성을 들었다. 본디 적군이지만, 그들 모두 홀가분해졌다.

리국 뇌기군 좌도통 사현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사의한 힘도 결국 도검보다 믿음직하지는 못하군. 시골 제후에게도 그만의 처세학이 있는 법. 전군 300보 후퇴한다. 공격 준비를 해제하고 방어 진형을 준비해라.”

같은 사씨 성을 가진, 상양관 북쪽 우림천군의 장군 사성도 양익의 불안해하는 노수들을 슥 훑어보고는 손을 내두르며 명령했다.

“전쟁은 끝났다. 전군 후퇴한다.”

사성은 마지막으로 전방의 진지에서 철수했다. 철수하기 전, 그는 저 멀리 드문드문 불빛이 번쩍이는 상양관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장군, 과연 당대 천구 중에 최강자답군요. 부디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 형제, 도와주어 고맙소. 그대의 목적이 무엇이든…… 아마 지금쯤 또 도망 다니고 있겠지? 무사히 살아있기를 빌겠소……. 천하가 통일되는 그날까지.”

빗속.

상양관의 묵직한 성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고 흑마와 백마 한 마리가 나란히 나왔다. 백의와 식연은 각각 횃불을 들었다. 근위병은 거느리지 않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맞은편 리국 진영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사현이 말을 타고 나왔다. 그는 투구도 쓰지 않았다.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세 마리 말은 하나같이 사람과 교감하는 명마였다. 그들은 도처에 널린 시체를 피해 천천히 접근했다. 전장에는 썩은 시체의 악취가 짙게 퍼졌다. 썩기 시작한 갑옷 아래로 음산한 백골이 드러났다. 전사자들의 긴 창이 땅에 꽂혀 있는데 듬성듬성 비뚜름하게 휘어진 숲 같았다. 마침내 세 사람이 전장 가운데에서 만났다. 십여 보를 사이에 두고 각자 군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 장군은 곧 회군한다고 들었소만?”

식연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었다.

사현도 웃으며 코를 막고 말했다.

“그렇소. 오늘밤 철수할 것이오. 국사의 덫이 끝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우리가 다시 싸워 봤자 결국 양쪽 모두가 다치게 될 뿐이오.”

“사 장군은 솔직한 사람이로군.”

식연이 칭찬했다.

“과찬이외다. 우리 같은 군인도 신술의 힘에 혹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소. 원래는 나도 이 세상에 한 사람의 힘으로 대군(大軍)에 맞설 수 있는 법술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소. 하지만 계획을 듣고 속으로 조금은 기대했지. 이곳에서 백 장군과 식 장군을 제거한다면 우리 리국이 동륙을 통일하는 길이 평탄해질 테니까 말이오.”

사현은 잠시 멈추었다가 자조하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한데 역시나 안 되더군.”

세 사람은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곤 살짝 말문이 막혔다. 식연도 입을 열었으나 말을 잇지는 못했다. 각자 허리를 숙여 경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 횃불이 밝게 비추는 곳마다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결국 사현이 침묵을 깨트렸다.

“왕야께서 명령을 남겼소. 국사의 전략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아군은 모든 치중품을 버리고 즉시 후퇴하라 하셨지. 남겨둔 막사 안에 양식과 약재가 있소. 편히 가져다 쓰시오.”

“감사히 받겠소.”

식연은 허리를 굽히고 공수하며 인사했다.

“한데 질문이 하나 있소. 우리를 토벌하는 전략인데, 어째서 리공 전하는 급히 귀국하고 사 장군만 위험한 곳에 남아 전쟁을 치르게 한 거요? 리공께는 우리보다 국내의 난이 더 중요했던 것이오, 아니면 신술을 믿지 않는 거요?”

“그건 내가 대답하기 어렵소. 왕야께서는 그저 명령을 내리실 뿐, 이유는 말씀하지 않았소.”

사현은 예까지 말하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9월 초이레 전에 구원으로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왕야께서 직접 전쟁을 지휘하지 않은 거라 생각되오.”

“9월 초이레?”

식연은 의아했다.

“부인의 서른여덟 번째 생신이오. 왕야와 부인께서도 못 본 지 오래 되었다오.”

“아.”

식연은 잠시 침묵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추락이란 이름의 공주였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구려…….”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존함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소.”

내내 말이 없던 백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시체 더미 속에서 회포는 그만 풉시다. 도처에 널린 시체는 한때 우리의 군령을 받고 싸우던 이들이오. 지금 우리의 대화는 마치 의기투합하는 것 같은데 이들이 살아서 들었다면 어찌 생각하겠소? 사 장군은 마음 편히 철수하시오. 절대 추격하지 않겠소. 내 이번 전쟁에서는 리공에게 패했소. 리공의 패기를 경험했구려. 리공께 탄복했다고 대신 말을 전해주시오.”

“일리 있는 말이군. 백 장군이 전할 말은 ‘탄복했다’는 네 글자가 다요?”

사현이 물었다.

“그렇소.”

“기억해 두겠소. 사실 왕야께서도 백 장군과 식 장군에게 전하라 한 말씀이 있었소. 상양관 아래에서 한 사람과 반 사람밖에 못 보셨다 했지. 한 사람은 백의 장군, 반 사람은 식연 장군이라 하더이다. 하나 반으로 우리 리국의 4만 적려와 5천 뇌기를 가로막고 이러한 성과를 거두다니 명불허전의 동륙 제일 명장이라 하셨소. 장군과는 적이라 벗이 될 수 없음이 안타깝다더군.”

사현의 말에 식연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반밖에 안 되오?”

“식 장군이 왕야를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아마 한 사람이었겠지. 그러나…… 나는 식 장군이 왕야를 놓아주어 감사하오.”

사현은 말안장 위에서 허리 숙여 절했다.

“좋소! 좋아!”

식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백의는 소리 없이 말머리를 돌려 상양관으로 향했다. 작별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식연과 사현은 함께 백의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얀 옷에 횃불을 든 사람이 어둠 속에 홀로 있는 모습이 꼭 유령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식연과 사현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고 공수로 작별인사를 했다. 사현은 말을 몰아 본진으로 달려갔고 식연은 뒤돌아 멀어져가는 백의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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