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5장. 신들의 군림 (13)
엽근은 또 실패했다. 검은 외투를 찔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그녀는 재차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뒤집으며 물러났다. 근접한 상태에서 상대를 찌를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이런 척살(刺殺)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근접전으로는 척살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었다. 목표를 놓치면 즉시 철수해 다음 기회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균형을 잃는 바람에 물러나지 못했고 엽근은 상대에게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거대한 두 손이 엽근의 허리를 매우 아프게 움켜잡았다. 남자는 엽근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호되게 땅에 내던졌다. 엽근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비수는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엽근은 고통을 억누르며 눈앞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따귀를 날렸다. 엽근의 소매에서 소리 없이 칼침이 튕겨 나갔다. 짧은 칼침이지만 상대의 목을 긋고도 남았다.
이 또한 스승에게 배운 것이었다. 스승은 어떤 사내든 여자를 제압하면 순간적으로 의기양양해져 경계심이 해이해진다고 했다. 심지어 이럴 때 여자가 보복으로 뺨을 때리면 기꺼이 맞아주면서 자신의 건장함을 내세워 여자의 무력함을 비웃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가 여자들이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했다.
칼침이 상대의 목까지 1촌 남은 거리. 엽근의 손은 상대의 커다란 손에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다.
상대방은 거대한 손바닥을 냅다 그러모았다. 엽근은 자신의 손가락뼈와 손바닥뼈가 갈라지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나를 죽이고 싶으냐?”
남자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깃들었다. 게다가 엽근의 무례한 행동 이후 더 많은 분노가 서렸다.
“당신을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니까! 나와 아버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시시때때로 반인반귀 같은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돼!”
엽근은 고통을 꾹 참으며 모질게 상대의 얼굴에 한마디를 더 뱉었다.
“구역질나는 그 얼굴 치워!”
“백의에게 매수되었나? 신을 배반하고 범인에게 의탁하기로 했어?”
“날 매수한 사람은 없어. 당신은 죽어야 해!”
엽근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지만 까만 눈동자 빛은 여전히 사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나는 자유를 원할 뿐이야!”
“내가 이미 신의 이름으로 네게 자유를 허락했다!”
“당신은 그냥 죽어가는 악귀야!”
“악귀?”
남자가 이를 사리물었다.
“여인이여! 너는 신의 사자를 모욕한 대가를 최대로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네게 자유를 주겠다. 너 같은 몹쓸 범인에게 최대의 자유는 죽어서 영혼이 하늘로 가는 것이다!”
남자는 돌연 엽근의 두 다리를 잡고 하늘로 들어 올렸다. 여인의 몸을 둘로 찢으려는 듯한 무지막지하고 난폭한 자세였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엽근은 제물로 바쳐지는 새끼 양처럼 무력하게 허공에 들려 있었다.
“군왕(軍王) 백의.”
남자가 천천히 두 마디를 뱉었다.
한 줄기 번개가 반쪽 하늘을 가르며 순간 지면을 환하게 비추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거대한 무기를 들고 빗속에 서 있었다.
남자는 엽근을 한쪽에 던져버리고 백의가 한 걸음씩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사내는 난간에 닿을 때까지 한 발, 두 발 물러났다. 백의가 목탑루 꼭대기에 올라 사내를 응시했다. 퍼붓는 장대비가 빤 지 오래 된 백의의 흰색 전포를 때렸다. 빗방울이 사방으로 흩튀었다.
또 한 차례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백의와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둘 다 무표정했다.
백의는 몸 뒤로 무기를 휘둘러 탑루에 오르는 나무 계단을 잘라내 버렸다. 목탑로는 매우 높아서 잘려나간 나무 계단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후에야 들렸다.
“날 죽이고 싶은가?”
백의가 나직하게 물었다.
“지금이 기회다. 여긴 무척 조용해서 결전을 치르기 적당한 곳이지.”
“이곳을 찾아냈군.”
“우리도 척후가 있거든. 모든 척후가 지금 이 성안에서 너를 찾고 있다. 운 좋게도 우리가 이 여인을 찾았고 이 여인을 따라와 네놈도 찾아냈지.”
백의는 거대한 무기를 휘둘러 남자를 가리켰다.
“자, 시작해라. 오랜 세월 직접 싸우러 나가지는 않았지만 네놈이라면 무척 구미가 당기는군.”
“말투에서 원한이 느껴지네.”
남자는 오만하게 백의를 보았다. 백의보다 키가 한참 더 큰 남자가 백의를 내려다보았다.
“복수에 급급한 어리석은 천구.”
“나는 천구가 아니야. 하지만 복수가 급하긴 하지.”
“어리석은 범인아.”
사내가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언제 원수를 졌지? 몽매한 너희 범인들은 오래갈 수 없는 태평한 시대를 세우려 신을 노하게 하고 신이 이 세계를 위해 만들어둔 규칙을 어기려 했다. 그러나 너희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다. 신의 비범한 힘에 비하면 망망대해의 모래알과 같지. 작디작은 너희는 커다란 바다에 휩쓸리면 제 미래조차 보지 못해. 발아래 세상을 보아라! 언제 평안하고 행복한 적이 있었는가?”
남자가 한 걸음 내디디며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너희들도 거듭 전쟁을 하잖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지. 그러나 신은 너희를 탓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이 너희를 위해 정해둔 이 세상의 법칙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우렁차지며 빗소리를 압도했다. 남자는 말투와 움직임에서 신과 다름없는 위엄과 기개를 풍겼다. 그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신은 너희의 어리석음을 내버려둘 수 없어 벌을 내리셨다. 이 벌은 구원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신께서 무지한 이에게 내린 벌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신은 너희를 훼멸시키려는 것이 아닌데 너희는 범인들에 대한 신의 사랑을 무시하지. 그렇다면 멸망도 너희의 숙명이다!”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백의가 성큼 앞으로 나와 거대한 무기를 남자의 머리로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귀청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일었다. 백의의 무기는 놀랍게도 날이 긴 참마도였다. 형태가 영무예의 칼과 비슷했다.
남자는 검은 외투 속에서 재빨리 두 손을 뻗어 정확히 참마도 칼몸을 손 사이에 끼워 잡았다. 맹렬한 내리치기 공격은 거대한 힘에 그대로 제지당했다. 백의는 두 손에 힘을 더 주었지만 칼을 빼내지 못했다.
남자는 손에 옅은 잿빛을 띠는 수갑을 차고 있었다. 전신에 이런 갑옷을 둘러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백의가 재차 힘을 가했지만 여전히 무기를 뽑을 수 없었다. 백의는 크게 놀랐다. 칼을 처음 손에 든 날부터 누군가가 맨손으로 그의 칼을 붙잡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발버둥 쳐보아라! 평범한 인간이여! 어디 개미처럼 가소로운 그 힘을 써 보시지.”
남자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멸망의 숙명 속에 그 몸부림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직접 보아라.”
“미안하지만…… 우리가 그날 이야기할 때 너는 그 자리에 없었지.”
백의가 남자의 눈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뭐?”
남자가 흠칫 놀랐다.
“나도…… 운명을 믿지 않는다!”
백의는 칼자루를 놓고 훌쩍 뛰어올라 남자의 얼굴을 발로 찼다. 전력을 실은 발차기가 명중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면서 잡고 있던 참마도를 놓았다.
백의는 착지하며 두 손으로 허공에서 칼자루를 잡고 즉시 돌진해 시원하게 내리쳤다. 남자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공격에 후퇴했지만 칼에 맞지는 않았다. 그는 물러나면서 두 팔을 휘둘러 칼을 막았다. 남자의 비갑에는 각각 두꺼운 보호 장비가 덧대져 있었다. 백의의 칼은 기세가 웅장하고 힘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괴상한 힘에 모조리 차단되었다.
백의의 기운이 거의 다 빠졌다. 공격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백의는 몸을 돌리며 칼을 휘둘러 남자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한쪽으로 물러났다. 양측은 서로의 실력을 간 보았다. 남자는 경계하며 방어 자세를 갖추고 백의의 칼을 응시했다.
“어떻게 리공 전하와 같은 칼을 쓰지?”
남자가 물었다.
“이상할 일인가? 너는 활 외에 백의의 진정한 무기는 본 적이 없지. 운 좋게도 지금 보았군.”
탑루 아래에서 다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네가 죽기 전에 빨리 눈감을 수 있을 비밀 하나를 알려줄 테니 죽어서는 저 행시들처럼 몹쓸 짓은 하지 말도록 해.”
흑마를 타고 막 도착한 사내는 조소를 띤 채 연신 숨을 헐떡였다.
“리공, 백의, 나. 우리 셋은 사실 같은 스승을 모셨다!”
“여우, 식연.”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진월, 뇌벽성의 제자.”
식연이 남자의 말투를 따라하며 냉소했다.
“하급 졸개지. 내가 팔뚝을 잘라버린 네 동료는 잘 지내나? 상양관 앞에서 네놈 주인을 죽여버렸어야 했어.”
“멍청한 것들! 너희가 어떻게 종사(宗師)를 죽일 수 있겠는가? 네게 팔이 잘린 자와 나는 다르다. 나는 이미 신의 은총을 받았다.”
남자가 호통쳤다.
“종사께서는 내게 신의 뜻을 받들어 너희들에게 벌을 내리라 하셨다. 너희의 오만함을 꾸짖는 것이지!”
식연은 잠시 침묵했다.
“신을 입에 달고 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로군.”
남자는 격노했다. 그때 백의에게 기회가 생겼다. 남자가 말하는 순간, 백의가 재차 돌진했다. 그는 훌쩍 뛰어오르며 칼을 휘두르는 힘에 체중까지 실어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자는 어마어마한 기세의 일격을 피할 방법이 없어 그저 두 손에 찬 보호 장비를 머리에 걸쳐 간신히 막아냈다. 굉음이 울리고 남자는 칼에 맞은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후퇴했고 백의는 칼을 끌고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번개가 공중에서 뱀처럼 흔들거렸다. 번갯불 속, 탑루 위에서는 검은색 인영과 흰색 인영이 거듭 위치를 바꿔가며 필사적으로 격투를 벌였다.
“하찮은 인간! 나를 격노케 하다니!”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격노해? 아주 좋군. 할 수 있을 때 좀 더 분노해보시지! 너희는 진즉 너희가 모시는 신과 함께 순장되었어야 할 짐승들이다! 일찌감치 죽었어야 해! 죽었어야 한다고!”
백의가 연속으로 칼을 휘둘렀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엄청난 힘으로 남자의 보호대에 충격을 가했다.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고막이 터질 듯한 금속 굉음이 울렸다.
“백의! 치열하게 싸울 필요 없네! 그냥 죽여! 죽이면 다 끝나!”
식연이 고함을 지르며 탑루 아래로 달려왔다.
“계단이…….”
식연은 절단되어 흙탕물 속에 쓰러져 있는 계단을 보고 아연해졌다.
“계단이 왜 부러졌지?”
“아래에서 기다리게! 이자는 이미 궁지에 몰렸네! 달아날 곳이 없어!”
백의가 소리쳤다.
“자네가 계단을 끊었나? 바보가 된 게야? 자네는 저자의 적수가 안 될 수도 있어!”
식연이 포효했다.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군! 자네를 안 이후로 20년이 흘렀는데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어쨌건 너무나도 오래된 벗이기에 식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백의가 왜 그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의는 식연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없었다. 연달아 칼을 휘두르면서 숨을 쉬지 못해 힘이 극도로 소모된 상태였다. 한 차례 더 힘을 다 써버리고 후퇴하려 할 때, 상대가 세찬 기세로 반격해 들어왔다. 진월 교도는 확실히 분노했다. 보호 방패를 휘두르는 힘이 무쇠도 구멍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백의는 상대의 공세에 압도되었다. 칼을 휘둘러 막아야 했지만 백의에게는 상대와 같은 견고한 보호 갑옷이 없었다.
빠른 말 두 필이 작은 경기병 부대를 뒤에 달고 북대영 대문으로 질주해 들어왔다. 여귀진이 큰소리로 외쳤다.
“장군! 고 장군과 함께 왔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다 데려오십시오! 놈이 도망치면 안 됩니다!”
식연이 호령했다.
여귀진은 거칠게 얼굴의 빗물을 훔쳐내고 대답했다.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 방어물 안에 있는 데다 사상자가 반이 넘었습니다. 희야에게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문을 지키십시오.”
식연이 탑루 높은 곳을 흘긋 보며 말했다.
“탑루엔 내가 올라가지요!”
식연은 고검 정도를 잇새에 물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두 손으로 탑루 기둥을 붙잡고 손과 발을 이용해 위로 기어 올라갔다. 탑루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위쪽에서 순전히 힘으로만 겨루는 격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