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12화 (212/360)

212

5장. 신들의 군림 (12)

익천첨의 거점 위치가 가장 높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전장은 불타는 바둑판같았다.

“대열은 완비되었는가?”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네, 대인!”

그가 통솔하는 500인 부대 대장이 대답했다. 최정예 병사로 이루어진, 백의의 근위병이었다. 백의는 이 군대를 익천첨에게 맡겼다. 그는 이 노인을 가리키며 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이분이 날 죽이라고 해도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익천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을 보며 천천히 두 팔을 펼쳤다.

“나의 형제여, 그대들의 눈으로 다시 하늘에서 내려다보게. 전장에서 자네들을 잃었지만, 나는 자네들의 영혼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내 자네들을 저버리지 않았어. 자네들이 목숨을 희생해가며 살려준 내 목숨, 헛되이 쓰지 않았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네. 자네들의 용기를 젊은 친구들에게 빌려주게. 마음은 끝없는 탄광, 타오르기 시작하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야!”

익천첨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시 구절 같은 기도 속에서 익천첨의 인영은 매우 거대해 보였으며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친 익천첨은 매우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전력을 다해 뱉어냈다! 하얀 수염이 포효 속에 휘날리고 포효성은 맹렬한 바람을 머금었다!

500명의 군사단은 익천첨의 포효에 깜짝 놀랐다. 마치 거령(巨靈)1)이 구리로 주조한 거대한 종 안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매번 종 벽에 부딪칠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가 널리 퍼져나갔다. 수차례 부딪친 소리가 중첩되며 종 벽을 뚫고 나오려 하는 것 같았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바다 위의 선원이 깊은 바다 속 거대한 용의 긴 울음소리를 듣고 두려운 마음에 절하고 싶어지는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태곳적부터 전해오는 거대한 생명체가 느리고 묵직한 걸음으로 바다 속 깊은 곳을 걸으며 바닷물을 삼켰다 뱉었다 하면서 하늘을 향해 탄식하는 것 같았다.

주위 일체의 금속이 이 포효성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쇠로 만든 검과 금속 갑옷 조각, 거대한 나무에 박아둔 못까지 격렬하게 진동하며 튀어나오려고 했다. 이어 진동이 주위로 울려 퍼지며 검을 쥐고 있던 손이 검자루의 격렬한 떨림에 마비되었다. 진동은 뼈를 타고 내려가며 다리뼈에서 지면으로 전해졌다. 땅 아래에 숨겨둔 거대한 짐승이 깨어나 등으로 힘껏 지면을 떠받치며 뚫고 나오려는 것 같았다.

익천첨이 손에 든 긴 창에서 태양처럼 강렬한 빛살이 뿜어져 나왔다. 검푸른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대장은 마음속 경외감을 꾹 누른 채 불붙인 등유 잔을 거목 더미에 던졌다.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강렬한 진동이 그의 뼈를 타고 위로 전해졌고 두개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듯한 진동이었다. 턱뼈의 진동에 대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온힘을 다해 폐 속 공기를 뱉어냈다.

대장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499명의 수하들도 포효를 내질렀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울부짖는 그들의 핏줄이 활짝 열리고 새빨간 피가 용암처럼 사지로 흘러들었다.

으르렁거림은 해수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화염의 색깔도 점점 변해갔다.

“불을 붙여라! 불을 붙여!”

여귀진이 통솔하는 부대의 백부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벌써 높은 곳에서 밝혀진 불빛을 보았다. 이것 또한 불을 지피라는 신호였다. 그가 막 등유 잔을 거목 더미에 던져 넣었을 때, 포효성이 지면을 휩쓸며 다가왔다. 포효성이 닿는 곳에는 바람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수천만 명이 사나운 말을 몰고 소리를 지르며 질주하는 듯한 바람소리가 포효성을 휘감았다. 철갑이 쟁그랑 울리고 검에서도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여귀진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의 어두운 세계가 갑자기 얇은 한 장의 막처럼 변한 것 같았다. 막 너머의 태곳적 무사 국왕들이 저승 깊은 곳에서 다시 소생해 재차 무기를 들고 군마의 영혼을 타고 돌아온 듯했다. 그들이 곧 이 막을 뚫고 나오려 했다. 천군만마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마침내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에 잔뜩 쌓여 있던 구름이 부서지고 뇌화가 밤하늘 사이를 지나다녔다.

폭우, 세찬 천둥, 불빛, 포효,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들이 상양관 안에 난무했다. 여귀진도 함께 큰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수많은 못이 전신을 찌르는 듯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상양관의 화염이 하나둘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과 함께 포효성도 전해졌다. 7개의 푸르스름한 불빛은 오래된 상징 문양을 이루었다.

정규는 풍호군 한 부대를 이끌고 칼을 휘두르며 행시 떼를 마구 베었다. 이들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정예 기병이었다. 사람도 말도 전신을 보호하는 연강 갑옷을 걸쳐 행시 떼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가 지키는 방어물은 이미 함락되었다. 행시들은 새로 세운 벽을 강제로 밀어 넘어뜨리고는 빈틈으로 뚫고 들어와 순국 군사를 베어 죽였다.

제 손으로 키워낸 군사들이 행시들과 육탄전을 벌이다가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정규는 군도를 뽑아들고 허리춤의 짧은 패도를 잘라낸 뒤 마지막 정예 기병들과 함께 말을 몰아 출전했다. 정규를 따르는 기병들은 모두 그의 뜻을 이해했다. 짧은 패도는 장군들만 지니는 것으로 포로로 잡혀 치욕을 당할 것 같으면 이 패도를 뽑아 자진했다. 그러나 정규는 자결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적을 죽일 생각뿐이었다.

행시 떼는 거침없이 내달리는 정예 기병들의 기척을 느꼈다. 끊임없이 새로운 행시가 이쪽으로 모여들며 겹겹이 군마 옆으로 덮쳐왔다. 군마의 힘으로도 길을 뚫을 수가 없었다.

정규는 발치에 달려든 행시 하나를 걷어차고 말안장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칼을 휘둘렀다. 칼날은 이미 톱니처럼 부서졌다. 정규는 자신이 직접 키운 애마에게로 달려드는 행시 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는 놈들이 환장하며 애마의 시체를 조각내기를 기다렸다가 달려 나가 등 뒤에서 놈들의 심장을 한 칼, 또 한 칼 찔러줄 것이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정규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눈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해일처럼 포효성이 덮쳐왔다. 지면이 진동하기 시작하고 양측 막사의 기와 조각이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힘과 포효성이 함께 전해졌다. 행시들도 느꼈다. 놈들은 이미 군마를 쓰러뜨린 상태였지만 곧 손에 들어올 먹잇감을 포기하고 가까스로 일어나더니 필사적으로 몸을 뒤흔들었다. 무언가를 몸에서 떨쳐내려는 것 같아 보였다.

“이게……. 지진인가?”

정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예 기병들은 그 틈에 돌진해 주위 행시들을 베어버리고 정규의 군마를 끌고 돌아왔다.

행시들은 발버둥 쳤다. 그들은 더 이상 움직임이 민첩하지 않았고 풍호군의 군도를 피하지 못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쓸모가 있다는 건 알겠군!”

정규가 군도를 꽉 움켜쥐었다.

“반격하라! 반격!”

정규가 군도를 높이 들고 뒤따르는 모든 이들을 호령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상양관 곳곳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행시 떼는 불타는 7개의 거점을 향해 돌격했다. 놈들은 빠른 속도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것들은 쓰러지기 전에 이 신비한 진을 파괴해야 했다. 그러나 놈들에게 압도되었던 연합군은 밀려드는 포효성에 혈관의 피가 끓어올랐고 막다른 궁지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미 높은 곳에서 명을 기다리던 하당군 귀복영 무사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갑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전부 새카만 갑주를 걸치고 눈과 허리춤의 은색 장식용 비수만 드러낸 100인 부대였다.

백부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각자의 길을 기억하고 의심스러운 자를 찾아라. 그자는 벌써 나타났을 것이다.”

백부장이 휙 손을 내둘렀다.

“가라!”

귀복영 무사들은 끝없이 퍼붓는 빗속으로 소리 없이 질주해 들어갔다. 드넓은 바다 깊은 곳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같았다.

“북극성의 힘이 소환되었나? 곡현의 영향력이 상쇄되는군. 어리석은 천구들.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발아래 엎어져 비천하게 힘을 사사해 주십사 간청하는구나.”

검은 인영이 매우 높은 곳에 서서 전쟁 중인 상양관을 굽어보았다.

“범속한 인간들이로다! 보잘것없는 힘으로 신의 뜻에 맞서려 하다니. 안타깝게도 무지가 그들의 눈을 가렸도다. 개미나 다를 바 없는 생물이 잔혹한 천벌에 저항하려 하다니.”

그자의 말투는 위엄이 넘치면서 싸늘한 조소를 띠었다.

“북극성의 신이라 한들, 정녕 또 너희들과 한곳에 설까? 이 또한 어리석은 미물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겠지.”

폭우가 검은 외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쓰개를 덮어 쓰고 얼굴을 가렸다. 그는 북대영 안의 목탑루에 서 있었다. 백의가 전군을 호령하던 곳이었다. 북대영 내에는 원래 백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텅 비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각기 다른 진지에 보내졌고 이곳에는 텅 빈 병영만 남았다. 어두운 밤, 남자는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고 그자의 인영은 칠흑 같은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발아래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성을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벌린 그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싸워라! 범인(凡人)들이여,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신의 힘을 목도하라!”

그자처럼 새카만 인영이 그의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폭우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까만 갑옷을 입은 엽근이었다. 빗물에 머리카락은 이미 흠뻑 젖었고 물방울이 몸의 유려한 곡선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벌써 그곳에 오랫동안 꿇어앉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휙 손을 내둘렀다.

“저 일곱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가져와라. 저들은 일곱 개의 불길 속에 있다. 망자와 격투를 벌이고 있으니 은밀하게 파고드는 칼날은 대비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지. 너는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네 기회다. 성공하면 우리는 신을 향한 경건한 네 마음에 자유로 보답해줄 것이다.”

“네! 대인.”

엽근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풀어주어야 할 의혹이 있는 것이냐?”

남자가 몸을 돌려 엄숙하게 물었다.

“정말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제 아버지도 함께요?”

“네 아비를 이토록 아끼니 그자의 자유도 함께 하사해주마.”

“아버지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구나!”

남자가 나직하게 호통쳤다.

“이 아래 수만에 이르는 망자가 신의 힘에 소환되어 일어선 것을 못 보았느냐? 우리가 못하는 일이 뭐가 있지?”

“저는 예전 같은 아버지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은 아버지는…….”

엽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뭐라 했느냐? 네가 지금 신의 힘을 의심하는 것임을 알고 있느냐? 어디 신을 모멸하는 그 말을 큰소리로 다시 해보아라!”

남자가 진노하며 성큼 앞으로 나왔다. 그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단 한 걸음 만에 엽근의 면전에 당도했다. 산처럼 거대한 체구가 압박해오자 엽근은 살짝 몸을 떨었다. 엽근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예전 같은 아버지를 원합니다…….”

남자는 이 발칙한 여인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커다란 빗방울이 가녀린 여인의 목을 때렸다. 피부를 뚫고 들어갈 것 같았다. 새햐안 목덜미에 흠뻑 젖은 머리칼이 들러붙었다.

“저는…… 더 이상 당신의 허황한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엽근이 휙 고개를 쳐들었다. 검은색 동공에 바늘이 감추어진 듯,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번득 스쳤다.

몹시도 시건방진 말과 눈빛에 검은 외투를 걸친 사내는 순간 흠칫 놀랐다.

엽근은 이 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별안간 튀어 오르며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녀의 장화 속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칼날은 공기 속에서 거대한 호선을 그리며 무수한 빗방울을 갈랐다. 엽근은 몸을 칼몸으로 삼아 극도로 음험하고 악독한 베기를 시도했다!

공기 속에 금속이 맞부딪치는 거대한 울림이 일었다.

엽근은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았다. 이 동작을 수천 번도 더 연습했기에 칼날이 적의 몸을 베어 들어갈 때의 느낌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녀가 찌른 것은 한 덩이 금속일 뿐이었다.

공중제비를 넘는 힘으로 두 걸음 물러난 엽근은 불가사의하게 몸을 젖힌 사내를 보았다. 그 동작 덕분에 그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음도(陰刀)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은 절대 할 수 없을 움직임이었다. 보통은 저 각도로 몸을 젖히면 나자빠지고도 남았다. 엽근은 남자가 뒤로 젖힌 상태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똑바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엽근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공격은 멈출 수 없었다. 엽근은 이 남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 탑루 난간 위로 훌쩍 뛰어오른 엽근은 힘껏 난간을 디디며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그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미 수중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고 칼은 사내의 심장을 향해 내질러졌다.

또 한 번 금속의 충돌음이 거대하게 울렸다.

* * *

1) 강한 힘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강물의 신. <수신기>에 황하를 가로막는 화산(華山)을 반으로 쪼개 강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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