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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11)
여귀진이 달려 나갔다!
문득 손에 칼이 잡혔다. 어느 순간,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칼자루의 거친 촉감이 매우 사실적이었다.
여귀진은 달려 나갔다. 여귀진을 제압했던 그자는 더 이상 그의 힘을 통제하지 못했다. 힘은 소년의 몸에서 회전하고 포효하고 내달리며 바닷물이 밀려오듯 여귀진의 몸 구석구석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여귀진의 몸은 사자처럼 돌진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유약하던 손에는 힘줄이 불거졌고, 가녀린 팔에는 근육이 탄탄하게 엉겼다. 등 근육이 수축할 때는 돛단배의 돛을 올리는 종려나무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았다. 흉포하게 부릅뜬 두 눈은 피가 뚝뚝 떨어질 듯했다.
‘그렇지!’
여귀진은 속으로 포효했다.
‘이래야 맞지!’
보름달처럼 환한 칼 빛이 그 사내의 뒷덜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도적떼는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을 쏘았다.
고월의는 화살비 속에서 고개를 들고 밤하늘에 메뚜기 떼처럼 날아오는 총총한 쇳빛을 보았다. 이장근은 껄껄 웃는 것 같았지만 미소는 굳어 있었다. 활의 쥔 고월의를 본 것이다.
아주 오래전, 전우와 백성들의 죽음을 보고 절망했던 젊은 궁기병은 이장근이 피비린내 나는 욕망을 채운 후 만족스럽게 마을 광장을 떠나려 할 때, 발견하기 힘든 초가집 틈에서 미친놈처럼 달려 나와 유일하게 남은 화살 한 대를 비릿한 피 맛이 남아 있는 이장근의 커다란 입에 쏘았더랬다.
고월의가 고개를 들고 활을 당겼다.
“내 너를 한 번 죽였으니 또 죽일 수 있다!”
식연이 식원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문득 식원은 제 앞에 숙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불이 붙은 적 없는 거목 더미 앞에 서 있었고 뒤로는 정예병 500명이 있었다. 식원의 손은 무언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제 숙부의 검, 고검 정도였다. 식연은 그에게 당부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검자루를 놓지 말라고.
희야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희야의 목구멍이 살짝 꿀렁였다.
“난 어머니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던 거군요. 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떠오르니까요…….”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꿈이었다. 모두가 동시에 깨어났다. 그들 곁의 무기가 길게 울부짖었다. 이 무기들은 분노한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했다. 불현듯 장궁 추익을 쥐고 있던 고월의는 어째서 백의가 자신의 활을 정중하게 건네주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이것은 대못이었다. 무궁무진한 엄폐를 꿰뚫고 제 마음속 가장 어두운 곳을 보게 하는 대못.
무엇이 가장 두려운 일일까? 행시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서서 똑똑히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귀매다. 사람의 기억을 먹고 살아가지만 강제로 기억의 밑바닥에 봉인된 채 고개도 내밀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죽일 수는 없다. 싸워 이길 수도 없을 것이다.
교전의 함성이 천지를 뒤덮었다. 깨어난 모든 이들은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식연은 조카의 검을 허리에 차고 팔짱을 낀 채 다른 거목 더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말을 던졌다.
“거의 다 됐겠지? 다들 깨어나야 할 때야.”
행시는 이미 화문의 외성을 돌파했다. 그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행시가 한 구만 성벽을 기어올라도 그 일대를 점령해버려서 십 수 명의 군사로는 무찌를 수가 없었다. 뒤편의 행시들이 계속해서 기어 올라왔다. 성벽 전체로 공격해 들어오는 통에 병력을 이동해 막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옹성 성벽 위에 선 강무외는 외성의 몇 안 남은 군사들이 절망적으로 긴 창을 행시 몸에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공격은 소용이 없었다. 행시 떼의 딴딴한 근육에 창끝이 걸려 일반 군사의 힘으로는 놈들의 심장을 꿰뚫을 수 없었다. 전사한 군사들의 피가 성벽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행시 떼는 피 냄새를 맡고 더욱더 미친 듯이 날뛰었다.
“군인은 언제고 나라를 위해 난을 평정해야 하는 법.”
강무외가 무표정하게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남은 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등유 항아리를 던져라!”
선별된 100명의 힘 센 군사들이 옹성 성벽 위에서 무게가 수근이 나가는 항아리를 힘껏 던졌다. 항아리는 외성 성벽에 떨어져 부서졌다. 등유가 도처에 흩뿌려지고 행시들의 몸도 흠뻑 젖었다. 생명을 잃은 것들은 액체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때 곧바로 불화살이 쏘아졌다. 휴국 자형장사의 궁수들은 명성답게 보통 우전보다 8촌이나 긴 화살을 정확히 행시 떼의 몸에 맞추었고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외성 성벽은 불바다로 변했다. 행시 떼는 팔을 휘두르며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로 마지막 남은 군사들의 슬픈 울부짖음이 섞여 있었다. 하나, 또 하나 불붙은 인영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산 사람이든 행시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성문…… 성문이…… 뚫렸습니다!”
척후가 옹성 성벽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성문이 뚫려?”
“누군가가…… 행시 떼에 끼어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이미 성안으로 돌진한 행시가 있으며 계속해서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역시 식연의 짐작대로 누군가가 행시 속에 섞여들어 문을 열었군.”
강무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문을 버릴 준비를 해라. 옹성 안에서 일부를 섬멸한 다음 성안으로 들어오게 둬라!”
“정말 들어오게 둡니까?”
척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강무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들과의 전쟁은 사람하고 치르는 전쟁과 다르다. 저것들은 두려움이 없고 물러날 줄도 모른다. 마지막 한 놈까지 죽이지 않는 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옹성이 지리적으로 이점이 있으나 돌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저것들은 이미 외성을 돌파했다. 같은 방법으로 옹성에 기어오를 것이다. 수가 너무 많아 우리는 막을 수 없다.”
강무외는 몸을 돌려 성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강무외의 군마가 있었다. 군마는 말발굽까지 전신에 철갑을 둘렀다. 이런 희귀한 마갑은 매우 무거워서 군마가 금세 지치기 때문에 돌격할 때라고 해도 잘 쓰지 않았다.
강무외는 말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주 훌륭하구나! 내게도 갑옷을 입혀다오!”
근위병이 다가와 갑옷을 바쳤다. 손가락 끝까지 보호하는 기병 중갑으로 가슴에는 풍호 기병 고유의 호랑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드물게 몇몇 곳에서만 이렇게 특출한 중갑이 생산되었다. 강무외는 근위병이 중갑을 하나하나 몸에 입히도록 고개를 들고 똑바로 섰다. 투구를 쓰기 전, 강무외는 냉담하게 감탄의 한마디를 뱉었다.
“풍호 갑옷은 정말 성능이 뛰어나군. 내가 전사하더라도 저놈들 수십 구는 죽일 수 있겠어!”
지, 수, 풍, 화, 운, 뢰의 여섯 개 성문이 연달아 뚫리거나 버려졌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척후의 파발이 연이어 도착했다. 앞선 척후가 비안의 앞에 무릎을 꿇자마자 뒤이어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진국에 겨우 남은 4천 여 명의 군사는 새로 쌓은 방어 구축물에 등을 맞댄 채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 방어물을 짓기 위해 백의는 상양관 내 절반에 달하는 막사를 철거하라 명했다. 장미 황제가 죽기 전 후손들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은 오늘날 벽돌 하나까지 모두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700년 전의 벽돌은 여전히 견고해 구축물을 짓기에 최고의 재료였다.
전세(戰勢)의 흐름은 비안의 예측대로였다. 경보 종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뇌문의 성벽으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이 목도한 광경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천수만의 행시가 성벽 틈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밤빛 아래, 그들의 인영은 빽빽하기 그지없었다. 개미집의 개미 전체가 나무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이미 녹이 슨 군도를 들고 있었다. 볕에 그을리고 비에 젖으면서 성 밖에 서 있은 지 매우 오래되었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이들을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벽돌을 던지거나 긴 창으로 찔렀다. 하지만 행시들은 유난히 건장하고 힘이 넘쳤다. 심지어 성벽 위에서 빠르게 가로로 이동하며 벽돌을 피했다. 기다란 창이 몸을 찔러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들은 심지어 단번에 창대를 붙잡고 훌쩍 솟구쳐 올라 칼을 휘둘러 창을 든 군사의 목을 베어버렸다.
막아낼 수 없는 군대였다. 그것들이 모여 돌격하면 십만 명이 성에 올라도 막아낼 수 없었다.
“장군!”
부장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먼 곳을 가리켰다.
비안은 무표정하게 시선을 옮겼다. 검은색 형상이 빽빽했다. 그것들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행시 떼의 돌격은 리국의 적색 조수와도 같이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침묵의 돌격이 살아있는 일체를 집어삼켰다.
“어떡하죠?”
부장은 방어물 뒤편에 있는 자신들이 행시 떼의 관심을 끌게 될까 봐 두려워 목소리를 극도로 낮게 깔았다.
“너무 많습니다. 놈들이 전부 들어왔어요. 옹성에서 몇 놈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닥쳐라! 쓸모없는 자식!”
비안이 나직하게 호통쳤다.
“식연과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생각 중이다. 교활한 여우 자식.”
“어서 도망치시지요, 장군!”
부장은 손발에 힘이 빠졌다.
비안은 광풍처럼 빠르게 덮쳐오는 행시들을 냉랭하게 쳐다보았다. 저것들은 더 이상 굼뜨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 건장해졌다. 어둠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놈들의 이빨은 무시무시하게 하얬다. 잇몸은 썩은 것처럼 까매서 완전히 어둠에 녹아들었다. 그 다음으로 회백색 눈은 무작정 전방을 향해 있었다. 비안은 코를 벌름거렸다. 시체 냄새가 느껴졌다. 오래전 시독술을 써서 들어갔던 오하성이 떠올랐다. 그 냄새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오하성을 탈환한 영웅으로 성에 들어가는 지금도 당시 코끝으로 퍼지던 구역질나는 냄새가 느껴졌다. 환각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행시들은 자기들이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놈들은 본능에 따라 돌아다니는 짐승처럼 6개 성문으로 들어오더니 성에 들어온 후에는 전진할 길과 살아있는 생물만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전체 상양관 구조는 이미 바뀌었다. 새로 지은 방어물은 높고 두꺼운 벽으로 길 일부를 봉쇄하고 또 어떤 곳은 일부러 틈을 내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 보면 벽돌로 쌓은 거대한 빗 같았다. 행시 떼는 작은 무리로 나뉘며 계속해서 함정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백의가 천재는 천재로군. 성벽을 버려 적을 갈라놓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영무예는 확실히 돌격하는 부류이니 저들의 위치가 바뀌어 백의가 성을 지키고 영무예가 공격했다면 그 전쟁이 좀 더 보기 좋았을 거야.”
비안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성 꼭대기에 올라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놈들을 싹 죽여라!”
“누구를요?”
부장은 화들짝 놀라며 비안의 귓가에 다가가 상기시켰다.
“백리 흠차의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왜 백의와 함께 목숨을 바쳐야 합니까?”
비안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부장을 쳐다. 백의가 쳐다보았다.
“나는 백리 성을 쓰는 그자를 믿지 않는다. 백의가 좀 더 짜증나긴 하지만, 최소한 그는 지금 일부러 우리를 이 죽은 것들의 칼날 아래 들이밀지는 않아.”
“하지만 황성의 장공주께서…….”
“일개 여인이다!”
비안이 싸늘하게 웃었다.
최전방에서 돌진하던 행시가 벌써 비안의 외침을 들었다. 놈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성큼성큼 비안이 서 있는 높은 담장 아래로 달려와 훌쩍 몸을 날렸다. 벽 뒤에 숨어 있던 군사들은 악귀와도 같은 행시가 뛰어오르며 필적할 수 없는 기세로 비안을 압박하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경직된 얼굴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시체의 희열이었다!
그 순간 비안의 검이 활시위를 떠난 우전처럼 내질러지며 정확히 행시의 미간을 찔렀다. 비안은 손목을 비틀어 행시의 두 눈을 으깨버렸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허리춤의 짧은 패도를 뽑아 가로로 휘둘러 행시의 목을 절단 냈다. 행시의 몸은 묵직하게 벽 아래로 떨어졌고 머리는 비안의 검에 걸려 있었다.
검날을 앞으로 가져온 비안은 음산한 눈으로 입을 쩍 벌린 놈의 머리를 조롱하듯 쳐다보았다.
“이미 한 번 죽었으니, 지금 또 죽어도 되겠군!”
비안은 유난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고 모든 군사가 똑똑히 들었다.
그는 검을 털어 머리를 내던지고 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착지하면서 한 발로 놈의 머리를 흙속에 밟아 넣었다.
“죽여라!”
비안이 휙 검을 들어올렸다.
통수의 용맹함에 군사들은 돌연 사기가 진작되었고 모두가 비안을 따라 함성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전우의 어깨를 밟고 벽 위에 올라 수중의 무기로 아래를 찔렀다. 진국의 정예 칼잡이들은 단도를 긴 창대 끝에 단단히 묶고 행시의 심장과 두 눈을 찔렀다. 누군가가 수십 대의 횃불을 벽 쪽으로 던져 방어물에 에워싸인 공터를 환하게 밝혔다. 불빛 속에서 행시 떼는 벽 위로 달려들었고 군사들은 포효하며 놈들을 찔러 죽였다. 행시에게 다리를 붙잡힌 군사가 아래로 떨어지면 이내 뒤따라오던 행시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갔고 그 군사의 자리는 즉시 다른 이가 메웠다.
전체 상양관이 교전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솟구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수한 인영이 불빛 속에서 아른거렸다. 행시들은 산 사람을 궁지로 몰아붙이며 자기들도 산 자의 덫에 빠져들었다. 함정으로 세워진 모든 방어물 안에서 공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산 자도 죽은 자도 오로지 힘으로 끝까지 맞붙어 싸웠다.
비안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오겠구나. 우리가 이대로 죽는다면, 시체에서 금세 악취가 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