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5장. 신들의 군림 (9)
초위군 백부장이 상양관 성 꼭대기에 올랐다. 수비 교대를 하기 전 마지막으로 방어진을 살펴보려 했다.
성벽 위에는 군사를 듬성듬성 남겨두었다. 중병들은 모두 새로 짓는 공사에 투입되거나 일부 옹성에 모여 있었다. 상부에서 행시 떼를 나누어 섬멸할 것이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성 위에 남은 군사들은 감시와 더불어 등유가 가득 담긴 항아리를 던지는 일이 주 업무였다.
군사 하나가 성가퀴에서 몸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백부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
백부장의 목소리가 돌연 목에 걸렸다. 군사의 어깨를 치는 순간 그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것을 알아챘다. 군사는 몸을 내밀고 밖을 감시하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엎어져 있던 것이었다. 백부장은 힘껏 군사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몸은 이미 시뻘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치명상은 목에 있었다. 누군가가 단칼에 그의 목을 갈라 피를 몽땅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첩자!’라는 생각이 백부장의 뇌리를 스쳤다.
첩자가 어떤 방법으로 성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성벽의 군사를 암살했으니 다음 단계는 성 공격이었다. 백부장은 성 밖을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리군의 깃발이 아니면 성 아래 빽빽하게 서 있는 행시 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갑주가 부서져 몸에 이끼가 돋아났다.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흐리멍덩한 눈을 껌뻑거리며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광경이었다. 온 천하가 무덤 같았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몸을 내밀어 바깥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때, 반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이 순간적으로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군사의 피가 성벽을 따라 흘러내리며 수직으로 무시무시한 검붉은 색이 칠해졌다. 바깥 성벽에는 이런 검붉은 색 핏줄기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장마다 하나씩 있었으며 그 핏자국 아래로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던 행시들이 모여 탐욕스럽게 피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메마른 손으로 성벽 벽돌 틈을 타고 소리 없이 위로 기어올랐다. 하나 뒤에 또 하나가 연이어 올라갔다. 성벽 위의 인간 사다리 같았다.
백부장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놀라서 헉 하고 들이킨 숨에 목이 메고 말았다.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어떻게 맨손으로 상양관 성벽을 타고 오르겠는가. 이곳은 천하에서 두 번째로 험준한 요새였다. 운제도 닿지 못하는 높디높은 성벽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이 방법은 애초에 배제되었다.
그러나 성 아래의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들은 이미 더운 김이 나는 선혈에 유인되었다. 저것들은 손가락이 부러져도 안 아픈 것 같았지만 산 것을 죽이겠다는 강렬한 갈망이 있었다.
사지를 허우적대며 허둥지둥 동종 옆으로 달려간 백부장은 힘껏 칼자루로 동종을 쳤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상양관 전체가 깨어났다. 동종이 연이어 성 구석구석까지 경보음을 전했다. 나흘째 밤, 결전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사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세상의 온갖 소음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여귀진은 일어나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서 기다란 불길이 구불구불 덮쳐오고 있었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횃불을 든 철기병들이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쇠칼도 들고 있었다.
여귀진은 철기병이 몇이나 되는지 헤아려 보았다. 어림잡아도 100명 이상, 혼자 처리하기에 약간 골치 아픈 숫자였다.
빠른 말이 한 마리 있다면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기병대를 뚫고 들어가 십수 명을 죽인 다음 철수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군마가 없으니 한 마리 훔치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여귀진의 사고가 끊겼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여귀진은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그 여인은 여귀진이 어머니처럼 오랜 세월 의지해온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많이 미련했던 그는 남녀 간의 일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이 여인이 다른 이에게 시집갈까 봐 무척 걱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다른 이의 장막에 가서 살아야 했기에 여귀진은 이 여인에게 장가들 궁리를 했다. 그러면 이 여인은 그와 매일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잠자리에 들 때면 길고 졸린 이야기를 들려주고 살며시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춘 다음 조용히 물러갈 것이다.
“유모, 무서워 마.”
여귀진은 그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 내가 지켜줄게.”
지금 그는 기병 100명이 와도 두렵지가 않았다. 영월도가 수중에 있으니 대담하게 한판 싸울 수도 있다.
그런데 여귀진은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여인을 향해 내민 손은 작고 하얬으며 부드럽고 근육은 전혀 없었다. 불현듯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 몸을 본 그는 돌연 깨달았다.
그는 아이였다. 여덟 살 난 아이. 군마도 없고 영월도도 없었다.
가륜첩은 여귀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달려와 여귀진을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제 어깨에 눌러 안고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무서워 말아요! 무서우면 눈 꼭 감아요!”
여귀진은 근접해 오는 구불구불한 불길을 보았다. 기병들은 너무 빨랐다. 여귀진은 이상하다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애써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여귀진은 아득히 펼쳐진 초원에 엎드려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구 불어왔다. 누군가가 그를 그곳에서 짓누르고 있었다. 등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힘에 여귀진은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여귀진은 두 손을 뻗으며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그러나 소매 밖으로 드러난 작은 팔은 가냘파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여귀진은 애써 고개를 들어 보았다. 사내들이 제가 가장 의지하던 여인의 몸을 덮쳤다.
다섯, 여섯, 어쩌면 더 많았다. 누군가는 갑옷을 끌렀고 누군가는 여인의 옷을 잡아 뜯었다. 그들은 여인을 내리눌렀다. 여인이 가느다랗고 하얀 두 다리로 힘껏 발길질을 하자 누군가가 즉시 여인의 다리를 붙잡았다. 여인의 옷이 한 조각, 한 조각 뜯겨나가며 윤기가 흐르는 가슴과 미끈한 허리가 드러났다. 마음이 급해진 사내들은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핥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핏자국이 묻은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여귀진은 사내들 틈으로 가륜첩의 눈을 보았다. 눈빛은 그날 밤의 초승달 달빛처럼 사나웠지만 사내들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절망한 건가?’
여귀진은 생각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여귀진은 또 생각했다.
‘왜 또 이런 거지? 어째서 또 이런 거야? 난 이미 노력했어! 사람도 죽였다고! 난 그 아이가 아니야! 내 칼! 내 칼…….’
여귀진은 온힘을 다 썼지만, 등을 짓누르는 사내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다. 거대한 힘이 집게처럼 여귀진을 구속했다. 몸부림칠수록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발버둥 쳤다.
포기할 수 없었다. 속으로 그가 아는 모든 악랄한 욕을 외치며 죽기 살기로 몸부림쳤다.
그 여인은…… 조용한 밤에 그에게 아주 길고 졸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살며시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떠나갔다…….
“내 칼!”
여귀진은 앳된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내 칼은…… 어디 있지?”
경보를 알리는 종소리에 상양관 전체가 뒤집어졌다.
하당군 치중 부대의 한 막사 안에서 엽근은 저 멀리 불빛을 보았다. 깨어난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겁내지 마요.”
엽근은 소주 공주를 품에 안고 창가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엽근은 소주를 내려놓고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알몸이 될 때까지 입고 있던 옷을 하나, 하나 벗더니 조용히 서 있었다. 엽근의 몸은 늘씬하고 날렵했다. 군살 하나 없었다. 피부 아래로 어렴풋하게 드러난 근육의 윤곽은 약간 사내 같기도 했다. 소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엽근을 쳐다보았다. 엽근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엽근은 준비해둔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재질을 알 수 없는, 몸에 딱 붙는 갑주가 한 벌 있었다. 어둡고 무광인 갑주는 비방(祕方)으로 만든 물고기 껍질 같았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보호용으로 검은색 금속 조각이 덧대어졌다. 엽근은 그 갑옷을 맨몸에 꽉 조여 입었다. 이 갑옷은 그녀의 몸에 맞춰 제작된 것이었다. 내의를 입을 수도 없었지만 몸에 걸치니 피부와 하나로 어우러진 듯했다. 이대로라면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달릴 때면 바람이 그녀를 피해가듯 그녀의 몸 양옆으로 흘러갈 것이다.
엽근은 마지막으로 보따리 맨 밑에서 비수를 꺼내 허리춤의 칼집에 꽂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둘둘 감아 올렸다.
소주는 이상하리만치 무서워진 엽근의 눈빛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괴상한 갑옷을 입은 엽근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라 몹시 무시무시한, 사람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분위기의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
엽근이 소주와 눈을 맞추었다. 눈동자가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시간이 됐어요. 난 이제 떠나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어요. 저들이 못 이기면 알아서 도망쳐요. 당신은 공주니까 해치지 않을 거예요.”
엽근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너무 비참해요. 죽어도 기억되지 못하죠. 이 난세에 살아 있어도 잉여라 쓸모가 없어요. 공주는 귀한 몸이에요. 많은 사람이 당신을 신경 쓰죠. 당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과 얘기 많이 나눠요. 그럼 난 갈게요.”
엽근은 뒤돌아 문을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희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척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가 시간을 알리는 북을 쳤다. 폭신한 침상에 누운 희야는 막 오수에서 깬 참이었다. 비몽사몽 하던 그의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크고 헐렁한 옷을 입은 여인이 침상 가에 앉아서 실 끝을 물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여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야는 마음이 무척 편안해져 눈을 감고 더 자고 싶었다.
문 밖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지 슥슥 발소리가 났다.
희야는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너무 무서워요. 밖에…… 사람이 많아요.”
여인은 살며시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빗질을 하듯 손끝으로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기분 좋은 저릿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희야는 여전히 무서웠다.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자들이 문 앞을 지날 때마다 괴상한 눈빛이 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여인은 나직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희야를 재웠다. 희야는 노래가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인의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몸을 웅크려 여인의 곁에 바싹 기댄 희야는 깨끗하게 빤 그녀의 옷에서 나는 조협(皂莢)1) 냄새를 맡았다. 문득 자신이 작은 쥐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게 몸을 웅크리고 여인의 헐렁한 옷 속에 숨은 자그마한 쥐.
그곳은 이 세상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 * *
1) 쥐엄나무의 열매를 말린 한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