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08화 (208/360)

208

5장. 신들의 군림 (8)

천계성, 계궁.

상양관의 구름이 이곳까지 뒤덮지는 않았는지 황성의 밤하늘은 씻어낸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장공주의 궁전에는 바위로 만든 샘이 있었는데 뇌벽성과 장공주는 그 위에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아래에는 바위가 겹겹이 우뚝 쌓였고 바위 아래로는 샘물이 졸졸 흘렀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 하나가 뇌벽성의 뒤에 서 있고 백리녕경은 미소를 지은 채 장공주 옆에 서 있었다.

뇌벽성과 장공주 사이에는 커다란 모래판이 놓였다. 방 안에서 옮겨온 것으로 바둑판처럼 평평하게 놓여 있었다. 모래판 위에는 짚으로 만든 표시용 인형이 있었는데 검은 옷을 입은 제자와 녕경이 계속해서 인형을 새로운 위치로 옮겼다. 대국하는 고수처럼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뇌벽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녕경 공자, 가끔은 정말 공자가 맹인인지 믿어지지가 않소. 한 번도 머뭇거리지를 않는구려.”

“바둑 솜씨가 괜찮은 편입니다. 바둑을 둘 때도 매 착점(着點)1)을 외울 수 있지요.”

녕경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과 일반인의 차이겠지요? 제 세계에서는 빛과 색이 없습니다. 기억과 상상이 제 세계이지요. 하여 저는 많은 일을 기억하며, 눈이 보이는 사람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녕경,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라.”

장공주가 녕경을 제지했다.

“네.”

대답하며 물러나온 녕경은 장공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갑자기 새끼 양처럼 고분고분해졌다.

“모래판의 진군 시연은 이미 마쳤습니다. 검은색 인형이 망자이며 붉은색이 사현의 1만 적려입니다. 북쪽에서 움직이지 않는 황색 인형이 우림천군이며, 흰색은 백의의 대군입니다. 벽성 선생의 전략대로라면 우리 군대가 금세 모든 흰색 병사들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장공주께서 살펴보시지요.”

복잡한 모래판 시연에 어질어질해진 장공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인형을 왔다 갔다 하는 이런 시연은 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것이 잠이 오지 않아 벽성 선생과 대화를 나눌까 하여 왔습니다.”

“우리 전략을 전장에 있는 자들은 이미 완벽히 이해했겠지?”

뇌벽성이 모래판을 응시하며 제자에게 물었다. 제자가 대답했다.

“전부 이해했습니다. 대략 3각 후에 이 전투가 시작될 것입니다.”

“380리 밖에서.”

뇌벽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니 저는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뇌벽성이 옷차림을 정돈하고 일어났다.

“벽성 선생께서는 결과를 기다리실 생각은 없습니까?”

장공주는 약간 의아했다.

“주방에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명해 두었습니다. 벽성 선생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전장의 소식을 기다리려고 했는데요.”

뇌벽성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략을 세우는 일은 무사가 날카로운 화살을 쏘는 것과 같지요. 우리는 지금 상양관에서 380리 떨어져 있고, 전서구도 한나절은 지나야 소식을 가지고 올 겁니다. 제 명령은 이미 전달되었고 결전이 곧 시작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이미 제 손을 떠났으니 관망하든 안 하든 전세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요. 제 화살은 이미 쏘아졌고 이제 되돌릴 수도, 궤적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벽성 선생은 기개가 남다르십니다. 진정한 병법의 대가로군요. 궁술에서는 사성(射聲)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활의 고수는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면 더 이상 보지 않고 화살이 맞는 소리만으로 목표물에 명중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라지요. 벽성 선생도 그런 것이겠지요?”

장공주가 감탄했다.

“동기들 중에서는 제가 병법에 가장 뛰어났지요.”

대답한 뇌벽성은 뒤돌아 떠나갔다.

“한데 목표에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내일 벽성 선생은 약속대로 목을 내놓으실 겁니까?”

장공주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 나직이 웃었다.

“실패한 자가 목숨으로나마 윗분의 노기를 달랠 수 있다면 기쁘기 한량없을 일이지요.”

뇌벽성은 뒤돌아 허리 굽혀 절했다.

“저는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벽성 선생처럼 풍모가 뛰어난 사내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정말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장공주의 요염한 눈이 고의인 듯 아닌 듯 뇌벽성에게로 향했다.

“언제나 이렇게 영웅적인 기개를 지닌 벽성 선생이 정말 이 전쟁에 져서 나 같은 아녀자의 연민에 기대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겠지요?”

장공주는 미소를 싹 거두고 말을 덧붙였다.

“내 벽성 선생의 목을 소중히 여겨드리지요!”

식원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엄지에 무쇠 빛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식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식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은 갑자기 텅 비었다. 정예병 500명과 수만 대군은 그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엔 그 무엇도 없었다. 타오르는 거목 더미 하나만 있을 뿐. 식원은 나무더미 옆에 앉아 제 숙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식원은 살짝 분간이 되지 않았다. 꿈을 너무 길게 꾼 것 같았다. 꿈엔 무척 많은 사람이 있었다. 창을 든 용맹한 소년도 있었고 점잖은 만족 세자도 있었다. 휘황찬란하고 풍요로운 성도 한 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상에 이것들은 없었다. 그의 세상에는 성 한 채뿐이었는데 이 성은 그의 감옥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식연의 손을 만져보았다. 그 손은 따뜻했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안정적이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진짜 숙부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식연은 그가 무척 낯설었다. 같은 핏줄임에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안 가요. 숙부가 내 부모님을 해쳤잖아요.”

식원은 자기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말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진심이었다. 식원은 느낄 수 있었다.

식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차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식원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둑하니 비가 올 것 같았다.

그 시각, 고월의는 적막한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진짜 성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하고 야트막한 흙벽과 조교(弔橋)식 성문을 보아 변방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고월의는 마을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마을의 이름은 정련진. 과거 그는 평생 이곳을 지키며 수십 명에 불과한 마을 소녀들 중에서 온순하고 착실한 이를 아내로 맞아 살게 될 줄 알았다.

아내는 천을 짜고, 고월의는 귀리를 심어 군영에 말먹이로 팔 것이다.

지금 이 마을은 얼떨떨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주 오래된 부락이 사막에 묻히고 수백 수천 년이 흐른 뒤, 나그네 하나가 풍화(風化)된 장벽 안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고월의는 정련진의 군용 도로를 걸었다. 사람들이 길 양쪽에 늘어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고월의의 귀에는 자기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슥. 슥. 스윽….

그들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고월의는 다부진 체구의 창기병 십장을 보았다. 그는 자기 창에 꿰뚫린 채 성벽에 박혀 있었다. 조용히 그곳에 기대어 있는 그는 평소 게으름을 피울 때 담배를 태우며 멍 때리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몸이 탄탄한 마부도 있었다. 그는 마부였지만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병 소부대 안에서 힘은 제일 셌고 온몸의 근육도 불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을 쓸 수 없었다. 근육은 조각조각 베어나가 거대하고 으스스한 뼈대와 눈을 부릅뜬 머리만 남았다. 고월의는 처음 자신에게 활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노병을 보았다. 그는 활시위에 걸려 높은 곳에 매달린 채 흔들거렸다.

고월의는 의아해하지 않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진북후에게 상을 받을 때 그의 전우들은 정련진 밖의 무덤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우연히 걸어 나와 이 적막한 마을에서 잠시 쉬는 것뿐이었다.

고월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침내 그 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마을 중앙에 있는 광장의 석단(石壇)에 누워 있었다. 잠이 든 듯 희고 깨끗한 얼굴은 조용히 하늘을 향해 있었다. 엄청 예쁜 편은 아니지만 따뜻하고 촉촉한 엿당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출중한 소녀였다. 기병들은 은근슬쩍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퍼트렸다. 군인들은 그녀가 바로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감미로운 데다 오래 쓸 수 있는 천도 짤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군인들을 가로막으며 자기 딸이 알을 품은 암탉이라도 되는 양 보호했다.

고월의는 문득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당시 그는 작은 부대 내에서 가장 과묵하고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제일 젊기도 했다. 고월의는 늘 노병들이 그 소녀를 두고 저속한 이야기들을 나눌 때마다 피했다. 몰래 길모퉁이에 서서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군 소식을 전하는 전서구에게 먹일 쌀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조용히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옷은 너덜너덜하게 찢겼고 풍만했던 가슴은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고월의는 야택 도적떼의 우두머리 이장근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자는 독사처럼 흉포한 두목이었다. 그는 소녀의 가슴을 베어 생으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고월의는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음이 공허할 뿐, 별로 슬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고월의는 뒤돌아 밤하늘 아래 칠흑 같은 담벼락을 마주했다.

담장 뒤에서 거대한 인영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인영은 담벼락보다 몇 배는 더 컸다. 그자가 한 걸음을 내디디며 담을 밟아 무너뜨리고 으스스하게 웃었다.

고월의는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 보았다. 북방의 과부보다 더 우람했다. 한데 얼굴이 낯익었다. 야택의 도적, 이장근이었다.

그의 주위로 수천수만 명의 도적이 나타났다. 지붕 위, 담벼락 위, 길모퉁이, 높은 곳에 있는 깃대에까지 전부 나타났다. 그러나 고월의는 혼자였다.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고월의는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활은 없었다.

도적떼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광풍처럼 회오리쳤다. 바람이 고월의의 곁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바람 속에서 요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핥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하나다. 그를 죽여버리자.”

“나약한 자식. 다른 사람이 먼저 죽는 모습을 보여주자.”

“우는 것 좀 봐. 놀라서 오줌은 안 쌌나 몰라?”

“왜지, 왜일까. 아까 어디에 숨어 있었길래 못 찾았지? 안 그랬으면 공을 인정받을 머리 하나가 더 늘어났을 텐데.”

고월의는 미친 듯이 웃는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더 많은 일이 떠올랐다. 그랬다. 저들 말이 맞았다. 그가 이장근을 향해 화살을 쏘았을 때 전우들은 모두 전사했다. 고월의가 살아있었던 건 제일 어린 그에게 전보를 알리라며 전우들이 빠른 말을 남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리에 화살을 맞은 그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고월의는 은밀한 곳에 숨어서 그가 동경하던 소녀가 이장근에게 안겨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정련진은 이미 무너졌고 살인과 약탈만이 남았다. 이장근은 그의 승리를 한껏 누리려 했다.

그리고 최후의 출운 궁기병 하나는 초가집 틈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 이게 진실이지.”

고월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전보의 내용과는 달라. 진북후 대인이 동륙 무사들에게 칭송했던 것과도 달라. 지금처럼 사실은 그랬어.”

고월의가 야택에서 화살 세 대로 도적의 혼을 빼앗다.

이 찬양의 말은 조소나 다름없었다. 말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믿음도 커져갔다. 전체 동륙이 진북의 새로운 장군 고월의를 알게 되었을 때, 거짓 전보는 사실이 되었고 다른 것은 서서히 잊혔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스스로도 가끔 혼동하곤 했다.

진북후가 새로운 장군을 만들어내고 그 자리에서 참수한 기장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진북후는 그저 기장의 피로 새로운 장군의 깃발을 붉게 물들이고자 했을 뿐이었다.

고월의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음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는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 *

1)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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