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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6)
엽근은 희야의 몸에 어린갑을 고정시키는 가죽 띠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단단히 묶었다. 갑옷 아래로 오른쪽 어깨를 두꺼운 붕대로 동여매는 바람에 본래는 몸에 딱 맞는 갑옷이 살짝 들어맞지 않았다. 희야는 약간 눈썹을 찌푸렸다. 어깨뼈가 다시 벌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희야는 두 팔을 쭉 편 채로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엽근이 군장을 입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남의 손이 온 몸을 더듬게 두긴 싫었지만 아직 손을 들어 자기 뒷목도 만질 수 없는 상태라 갑옷을 입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의관은 붕대와 쇳조각으로 희야의 오른팔 전체를 고정시키면서 걱정스럽게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젊은이. 아직 반밖에 안 나았어. 이번에 또 부러지면 정말 평생 불구가 되네. 정말 선봉에 나갈 사람이 자네뿐인가? 그냥 군영에 있지 그러나. 자네 하나 더 나간들 별 소용도 없을 텐데.”
노인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무력감을 내비쳤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군령입니다!”
희야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좋네.”
늙은 의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내 많은 군인을 봤는데 자네는 전장에서 죽어야 할 그런 사람이야.”
의관은 희야의 어깨를 특별히 두껍고 튼튼하게 싸맸다. 떠나기 전 자신의 걸작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하면 팔은 쓸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많이 쓰면 부러져. 그 힘 아껴두었다가 다 죽게 생겼을 때, 그때 쏟아 붓게나!”
엽근이 드디어 가죽 띠를 단단히 묶었다. 너무 힘들었던 엽근은 살짝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다시 쭈그리고 앉아 신발부터 시작해 희야의 무장을 확인했다. 비뚤어진 끈을 정리하고 삐져나온 옷자락을 다시 동여맸다. 희야는 고개를 숙이고 엽근을 보았다. 가지런한 긴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졌다. 머리를 묶은 끈에서 빠져나온 몇 가닥이 땀에 젖어 살짝 발그레한 뺨에 붙어 있었다.
“고마워.”
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개 여인이라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이네요.”
엽근은 희야 대신 견갑 위의 먼지를 털어주었다.
“남은 건 신께 보살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에요.”
“신?”
희야는 문득 농담이 하고 싶어졌다.
“난 그 사람 모르는데.”
살짝 얼이 빠진 엽근은 나직하게 투덜댔다.
“애들이나 그런 시건방진 말을 하죠.”
엽근이 희야의 농담을 무시하자 희야는 살짝 낙담했다. 희야는 자기가 너무 아둔하다고 생각했다. 우연이 맨날 그를 물소라고 부를 만도 했다. 우연을 기쁘게 해줄 몇 마디도 잘 하지 못했으니까.
희야는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는 여귀진을 보았다. 여귀진은 탁자 앞에서 천천히 장도를 뽑아 들고 냉혹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살펴보았다. 칼날의 삼엄한 빛 한 줄기가 여귀진의 두 눈에 되비쳤다. 희야는 문득 위안이 되었다. 벗이 여전히 그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귀진도 농담을 잘 못했다.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우연이 오만 데서 긁어모은 우스갯소리로 두 사람을 웃겨주었다. 희야는 심지어 여귀진이 자기보다 농담을 더 못하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매우 적은 여귀진은 가끔 빨리 말을 할 때면 약간 말더듬이 같기도 했다.
“다 됐어?”
식원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됐어!”
여귀진이 대답했다.
“다 됐어요.”
엽근도 대답했다.
“그럼 출발하자!”
식원의 말에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키는 거점은 어디야?”
“난 남대영 동쪽이고 희야는 북대영 동쪽. 세자는 용수로 옆이고.”
“거기만 지키면 돼? 공격이 시작되면 성 위에 있어야 하지 않아? 근데 용수로 옆을 지키면 된다고?”
여귀진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숙부께서 뭘 해야 한다고는 말해주지 않고 그냥 그곳을 지키고 있으라고만 했어. 한시도 떠나서는 안 된대.”
식원은 패검을 들었다. 고검 정도는 형태가 예스럽고 소박하면서도 삼엄했다.
“숙부께서 본인 검도 주셨어.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말라고 하시더라.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군령이 그래. 몰라도 되는 건 이유도 물으면 안 되지.”
희야는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귀진은 희야를 부축하려 했으나 희야가 밀어냈다.
입구에 닿기 전 희야가 갑자기 엽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곳을 사수하지 못하게 되면 공주 데리고 북쪽으로 도망가. 거기엔 우림천군이 있어. 공주를 데리고 있으니까 화살을 쏘진 않을 거야……. 큰 소리로 공주를 데리고 있다고 말해……. 저들이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엽근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웃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져 귀 뒤에 꽂았다.
“혹시 리군을 만나더라도 별일 없겠죠? 리군 군관들을 많이 아는데.”
“그러게……. 그러고 보니 너는 우리 사람이 아니지.”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세에 누구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엽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세 소년은 뒤돌아 방문을 나섰다. 식원은 희야의 등을 너무 약하지도, 세지도 않게 툭 치더니 놀리듯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네 사람 내 사람 찾기는. 예쁜 누님한테 장가들고 싶냐? 창고에서 저 여자를 구해온 나와 아소륵 세자도 그런 음흉한 맘은 안 먹었거든?”
식원의 예상과 달리 희야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그저 나직하게 말했다.
“그 농담, 하나도 재미없다.”
도리어 식원이 군색해지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실 창가에 앉아 있는 소주 공주를 보았다. 아름다운 비단옷을 걸친 소녀는 한손에 흙 인형 하나를 쥐고 얌전히 앉아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식원은 혹시나 방금 그 농담을 공주가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소주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희야는 공주의 곁을 지나가면서 애써 허리를 굽히더니 손가락으로 흙 인형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들하고 놀고 있어요. 엽근 말 잘 듣고요.”
“새로운 이야기를 생각했어.”
소주가 말했다. 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녀와서 들을게요.”
세 사람은 막사 밖을 향해 걸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발을 내디디기 전, 희야는 고개를 돌려 소주 공주를 보았다. 어린 공주는 어리둥절해하더니 흙 인형을 잡았던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식원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난 소주 공주가 좀 바보 같단 말이지.”
“바보 아니야. 말수가 적을 뿐이지.”
멀리서도 소주 공주는 식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식원에게 같은 말을 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살짝 민망해진 식원은 고개를 돌리고 찍 소리 없이 줄행랑쳤다. 희야와 여귀진은 식원을 쫓아갔다.
완주, 남회성.
우연은 뒷짐을 지고 자량교를 걷고 있었다. 다리 아래 굴 사이로 쏴아아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사람들 말소리로 온통 시끌시끌했다. 모든 야시장 노점에 궁중풍 등롱이 걸려 있었다. 붉은 천 안으로 따스하고 화려한 빛이 감돌았다. 어떤 노점에서는 콩 소가 들어간 찐빵을 팔았고, 어떤 노점에서는 자환궁 자기를 복제해 팔았다. 또 어떤 노점에서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비수를 팔았다. 상어 가죽으로 만든 칼집도 한 쌍이었다. 비수를 한 자루 사서 장식품으로 허리에 차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쓸 만한 무기를 사려면 어둑한 곳에 세워진 노점에 가야 했다. 그들은 일반 상인과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들이 파는 무기도 색이 어둡고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하게 생긴 비수를 들고 칼날에 머리카락을 대면 머리카락이 소리도 없이 잘려 나갔다. 그럼 구매자는 왜소하고 쓰개를 덮어쓴 노점 주인을 다시 보게 되고, 그제야 그가 영락없는 하락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남회성은 이렇게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황제급 향락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천계성의 거상들은 이런 향락을 거저 주어도 법도를 거스를 것이 염려되어 고사했다. 천계성에서는 그 누구도 제후나 제왕의 삶을 누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감히 그리하는 사람들은 언제고 목이 달아났다.
그러나 이곳은 남회였다. 멀리서 전쟁을 해도 여기에서는 밤마다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연은 이곳이 무척 좋았다. 상대적으로 그녀의 고향은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적막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우연은 오늘 밤이 썩 즐겁지가 않았다. 벌써 내리 며칠 밤을 혼자 나와 돌아다닌 까닭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좋아하는 콩 소가 들어간 찐빵도 먹고 진한 오리탕도 한 그릇 마시면서 유유자적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금세 지루해졌다. 할아버지를 보내준 것이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새끼 사자에 매수되어 버렸다. 희야와 아소륵도 아주 먼 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겼다고 들었는데 대군은 영 개선해 돌아오지 않았고 할아버지마저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은 미간을 구긴 채 생각했다. 들고 있던 양매(楊梅)1) 반 봉지를 버렸다. 설탕에 절인 과실도 먹다 보니 약간 입이 썼다.
우연은 조금 더 구경하다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끼 사자에게 예쁜 비단 끈을 사주려고 했다. 그러면 침대 맡에 걸어둘 수 있으니 매일 아침 일어나면 천진난만한 녀석이 햇빛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작은 골목 안을 걸으며 좌우를 둘러보던 우연의 뒤에서 고풍스럽고 나직한데 듣기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에 고개를 돌린 우연은 원숭이를 보았다.
흑단을 조각해 만든 원숭이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표정과 자세가 전부 다른 것이 극도로 정교한 솜씨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구부러진 꼬리가 가로장대에 걸려 있고 손과 발에는 똑같은 흑단 나무로 조각한 방울을 쥐고 있었다. 고풍스럽고 나직한 소리는 그 방울에서 흘러나왔다.
“와!”
우연은 놀라워하며 뺨을 불룩 내민, 가장 말썽꾸러기처럼 생긴 원숭이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익천첨이 말한 대로 우연은 손버릇이 좋지 않았다. 언제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손부터 나갔다.
“풍경(風磬)입니다.”
방울소리처럼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사내의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청주 특산품, 나무 풍경이지요.”
우연이 고개를 들고 나무 풍경을 파는 사내를 보았다. 단출하고 소박한 차림새가 부유한 동륙 장사꾼 같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큰 키와 쓰개 사이로 드러난 한 가닥의 옅은 금색 머리카락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말해 주었다. 그는 우인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동륙에 숨어든 우족 상인. 그들은 동륙인의 생존 기술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금발을 쓰개로 가리고 다녔다. 쓰개 안으로 드러난 얼굴은 잘생기고 상냥해 보였지만 젊지는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눈꼬리에 새겨져 있었지만 젊은 시절 매우 출중한 우인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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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열대 과수. 소귀나무 열매로 체리나 매실같이 씨가 중앙에 하나 있는 핵과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