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204화 (204/360)

204

5장. 신들의 군림 (4)

지금 식연은 정말로 초원을 질주하는 강한 여우 같았다. 이 여우는 오만하고 강건했다. 밤사냥꾼의 활을 피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달아나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는 조롱하듯 말을 탄 밤사냥꾼을 돌아보았다. 마치 그의 무력함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지금 이 당당한 여우의 눈에는 달빛과도 같은 빛이 어렸다.

백의는 벗의 두 눈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이었다. 오랜 세월 백의보다 더 식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나태하고 호방한 사내의 몸에 어떤 피가 흐르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피가 아니라 화염이었다. 백의는 이 사내의 혈관에는 포효하는 화염이 내달리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식연의 눈빛은 평소 같아서는 안 되었다. 몽롱하고 상냥해서는 안 된다. 주점에서 간단히 한잔한 뒤의 알딸딸한 눈이 아니다. 그는 여우다. 여우는 교활해서 사람들은 종종 여우가 사납다는 것을, 그리고 사나운 여우는 늑대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녔다는 것을 간과한다.

“참 잘도 숨겼군.”

백의가 돌연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뭐?”

역으로 식연은 어리둥절했다.

“하당의 군인 무사들은 자네를 기품 있고 도량이 넓다고 평가한다지. 그래서 잘 숨겼다고 말한 걸세. 자네의 어디가 기품 있고 도량이 넓다는 겐가?”

백의의 이야기에 말문이 막힌 식연은 표정이 굳었다.

“자네 입에서 모처럼 농을 다 들어보는군. 언제나처럼 날 비웃는 말이긴 하지만.”

백의가 식연에게 물었다.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사로는 저 행시들을 무찌르지 못해. 특별한 전술이 있나?”

“좋은 질문이야!”

식연이 웃으며 익천첨을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종주 자격으로 푸른 바다의 매를 부르지 않았나. 이분이 다섯 번째네.”

“다섯 번째?”

식연이 또 백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여섯 번째야.”

“여섯 번째?”

“군림진!”

식연이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군림진을 한 번 더 써야 하네!”

백의의 볼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지니고 있던 화살 통에서 겨우 남은 장신전 한 대를 뽑았다. 화살을 등불에 비추자 화살대의 은회색 빛살이 살아 움직이듯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백의의 손에서 화살이 갑자기 진동하며 나직하게 울기 시작했다.

“이 화살은 곧 죽을 걸세.”

백의가 화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오랜 전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래 보이네.”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7대의 장신전 중에 6대를 잃었네. 겨우 남은 이 화살마저도 죽게 생겼어. 안에 봉인된 혼의 힘도 이미 무척 약해졌네. 요 며칠 밤마다 화살 자루에 귀를 대고 화살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심장처럼 소리가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하더군.”

백의는 화살을 식연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화살이 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거지?”

식연은 화살을 받아들고 손가락으로 화살촉을 닦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여러 차례 목표물을 꿰뚫은 후인지라 손으로 어루만져 보니 자잘한 이가 잔뜩 빠져 있었다.

백의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수중에 손상 없이 멀쩡한 장신전이 7대가 있다 해도 나는 군림진의 범위를 확대할 수 없네. 그날 밤 내가 군림진을 사용할 때 자네도 보았잖은가. 나와 이 활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는 북대영 정도네.”

“그 정도로는 부족해.”

“얼마나 더 커야 하지?”

식연이 막사 흙벽에 걸린 상양관 전도를 가리켰다.

“저 정도는 돼야지.”

“상양관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불가능해.”

백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하네. 법기를 사용하면 돼.”

익천첨이 말을 받았다.

“대동한 비술사도 없을뿐더러 군림진을 발동할 만큼 강한 법기는 더더욱 없습니다.”

백의의 말에 익천첨이 고개를 저으며 냉소했다.

“젊은이, 잘 모르는 주제에는 말을 아끼게. 나는 우인일세. 이 세상에 우인보다 더 비술을 잘 아는 종족은 없지! 법기가 꼭 비술 대사들이 봉인하고 비밀리에 감춰둔 보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야. 자네가 군림진을 발동했을 때 사용한 추익궁과 장신전처럼 혼이 새겨진 무기는 그 자체가 곧 법기이지. 어떤 법기든 내포된 영혼의 힘으로 별과 호응할 뿐이네. 자네의 화살에 봉인된 혼백처럼 말이야. 그러나 법기는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네.”

“살아있는 거요?”

익천첨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사람. 가장 강력한 법기지!”

“장신전 대신 사람으로 군림진을 가동하겠다는 겁니까?”

“그렇네! 싸워 이길 수 없는 적이 있을 땐 우리도 별의 신에게 비호를 청할 수 있지. 북극성의 신이 무사들에게 하사한 힘보다 더 용맹하고 강렬한 힘이 어디 있겠는가? 군림진이 소환하는 것은 북극성 신의 힘이네. 진월 교도들은 모든 별을 경배하지만, 북극성은 두려워하네. 북극성의 힘은 모든 별과 다르거든. 일체를 자를 수 있지. 금속 갑주든 산맥이든 전부 말이야. 북극성의 힘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네.”

“자신 있습니까?”

백의는 자신의 손바닥에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해봐야지.”

식연이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군림진을 가동하면 문제가 생기네.”

“희생이 발생하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식연은 백의를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등불이 일렁였다.

“법기를 대신할 사람은 반드시 북극성 신의 소환에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해. 무신의 강림을 받아들일 충분한 용기와 굳건한 의지가 필요하지. 아무에게나 이런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니야. 누군가는 이 때문에 이성을 잃을 수도 있지. 이전에는 가장 핵심적인 천구 무사로만 이런 성신진(星辰陣)을 가동해 왔네. 우리는 사람이 매우 귀하니까 말이야. 자네는 반드시 기용해야만 해. 천구는 아니지만 내면의 충격이 낯설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내면의 충격이라고 했나?”

“첫 소환!”

식연은 천천히 단어를 뱉었다.

“법기를 대신하는 사람은 첫 소환의 감각을 경험하게 되네. 무신의 힘이 자네 영혼에 들어가는 것이지. 그때 태곳적 무사의 왕, 철황들이 자네 영혼 깊은 곳에서 부활한다네. 그들의 군마가 자네 영혼을 짓밟듯 마음속을 질주할 거야. 자네의 가장 큰 근심, 가장 큰 두려움, 집착하는 모든 것이 악몽으로 눈앞에 펼쳐질 것이네. 이것이 추종자들을 향한 철황들의 첫 번째 소환일세!”

식연은 나지막하게 백의에게 물었다.

“20년 전 그날 밤, 천계의 작은 주점에서 그자가 검을 갈 때 자네는 무엇을 들었나? 무엇을 보았지?”

식연은 살며시 웃었다.

백의는 잠자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뒤 백의가 깊게 숨을 들이켜고 말을 꺼냈다.

“좋아. 두 사람을 믿어야겠지.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도 둘뿐이니. 하지만 일곱 사람이 필요해. 사달극 각하가 다섯 번째이고 내가 여섯 번째이면 일곱 번째는 누구인가?”

“이미 후보가 있네. 새로운 천구 무사지.”

식연과 익천첨이 시선을 맞추었다.

“징용될 법기라고 해야 할지도?”

백의가 냉랭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곧 경험하게 될 것들을 전부 알고 있나?”

“고월의 장군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몸을 일으킨 식연은 아까에 이어 두 번째로 막사 문을 열었다.

잠자코 밖에 서 있던 진북국 통수 고월의가 막사 안의 세 사람에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백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힘없이 의자에 도로 앉았다.

“갑자기 내가 참 우스운 사람이 된 것 같군.”

“식 장군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월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제 부하들과 이 음모에 매장되고 싶지 않습니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삽시간에 많이 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다들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나만, 나 혼자만 갈등에 몸부림치고 있었군. 여러분이 하려는 일을 나는 막을 수 없소. 당신들이 군 내에 세력을 침투시킨 것이 처음도 아니지. 당신들은 진월과 똑같은 미치광이 패거리요. 단지 그들보다 조금 덜 미쳤을 뿐.”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지.”

식연이 웃으며 백의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익천첨은 벌써 이런 대화가 물린 듯 조용히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밖으로 걸어갔다. 식연은 백의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는 익천첨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문가에 이르렀을 무렵 뒤에서 백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비호를 잃은 무리가 나아갈 방향도 모른 채 수많은 동료를 희생해 가며 미치광이처럼 또 다른 미치광이 무리와 다툰다니. 대체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사람의 힘으로 신의 사절을 무찌를 수 있습니까? 당신들의 열정은 참으로 무력하게 들립니다! 이 일체의 모든 행위가 그저 바둑돌이 운명의 바둑판 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도 짐작하고 있겠지요?”

익천첨이 불현듯 멈춰 섰다. 식연은 그를 흘긋 보았다. 익천첨의 얼굴이 싸늘했다. 식연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 표정은 종종 그가 분노할 때 보이는 전조이기 때문이었다. 이 연로한 천구 종주는 여느 우인처럼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식연은 알고 있었다.

“젊은이, 오늘 처음 만났으니 자네는 내 성격을 잘 모르겠지. 운명의 바둑판이라고?”

뒤돌아 선 익천첨이 냉담하고 오만하게 말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익천첨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약간 우악스러웠다.

“운명을 믿는다면 내 팔자는 너무 개떡 같지 않은가?”

문이 닫히고 백의는 홀로 탁자 옆에 앉았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채 손을 뻗어 등을 비벼 껐다.

어둠 속에 오롯이 그 혼자만 남았다. 주위는 정말 고요했다.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고 태곳적 황야처럼 드넓었다. 어쩌면 이 막사 밖이 바로 끝없는 어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등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20년 전 그날 밤 작디작은 주점에서의 느낌과 비슷했다.

“20년 전 그날 밤 천계의 작은 주점에서 그자가 검을 갈 때 자네는 무엇을 들었나? 무엇을 보았지?”

식연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20년 전, 검을 가는 소리가 들리던 그 주점.

백의는 생각했다.

‘내가 뭘 들었지……. 뭘 봤지…….’

그날 폭우가 내렸을 것이다. 세상천지에 온통 비가 내렸다. 밤은 매우 어두웠다. 구름도 안 보이고 번개도 천둥도 없었다. 그저 억수같은 비만 쉴 새 없이 내렸다. 쏴아아, 쏴아아. 비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천계성의 작은 주점에 앉아 있었다. 주점 안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주점 입구에서는 옷이 흠뻑 젖은 노인이 숫돌에 검을 갈고 있었다.

빗소리와 함께 금속이 돌에 갈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차츰 세계는 적막하고 광활해졌다. 주점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옅어졌다. 타인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백의는 검을 가는 노인을 보았다. 검은 숫돌 위에서 챙그랑 소리가 났다.

폭우가 쏟아졌다. 빗소리 속에서 누군가 숨을 쉬었다.

‘아니, 숨소리가 아니야.’

어쩌면 누군가가 물을 밟고 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준마가 코에서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갑옷 조각, 준마의 움직임에 따라 숙철로 만든 갑옷 조각이 달그랑 달그랑 내는 소리일수도 있다. 백의는 긴장이 되었다. 무언가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일어날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검을 가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검신은 어둡고 빛나지 않았다.

‘왔어! 빨리 가! 난 가야겠어!’

그러나 백의는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몰랐다. 주점 밖의 어둠이 살아났다. 누군가가 너털웃음을 지었고 준마가 숨을 쉬었으며 갑옷 조각이 땡그랑 울렸다. 어둠속에서 수천수만 가지 형태가 조수를 이루었다.

그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때 철갑 소리를 쟁쟁하게 울리던 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말을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들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갑옷 조각이 덜렁거렸다. 백의의 눈에 갑옷 물방울이 흩날리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지만 이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겨우 일자로 틈이 하나 나 있는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전신이 갑옷과 검은 외투에 뒤덮여 있었다. 그들이 주점으로 달려 들어왔다. 작디작은 문이 이렇게 많은 말과 말 등에 탄 거대한 신 같은 주인을 수용할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백의는 일어섰다. 그 준마들이 그의 곁을 질주해 지나갔다. 말들의 주인은 검을 뽑았다. 매우 눈에 익은 검이었다. 방금 전 노인이 이런 양식의 검을 갈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검은 눈부신 쇳빛을 띠며 무사들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쇳빛이 모여 하늘을 밝혔다.

백의가 고개를 들었다. 별들이 보이고 하늘이 서서히 회전했다. 하늘 아래에는 이미 주점도, 노인도 없었다. 수많은 준마가 질주하고 무사들은 중검을 휘둘렀다. 쇳물이 거세게 밀려오는 듯했다. 백의는 그 세찬 흐름 속에서 무형의 암초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백의는 그 사람들과 말이 실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일으킨 기류가 칼처럼 백의의 얼굴을 베었다.

그들은 세상 끝을 향해 갔다.

백의는 이미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워했고 전율했다. 심장이 말발굽처럼 급격히 뛰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들의 거센 흐름이 지닌 힘에 적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되고 거대하며 위엄 있고 순수한, 일체를 무시하는 힘이었다.

백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하지만 훌쩍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안 돼! 생각하면 안 돼! 뭘 생각한들 이미 아무 소용이 없어.’

백의는 호통을 치며 사고를 멈추었다. 그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길이 눈앞에 있어. 이 길 하나뿐이니 뭐라고 하든 갈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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