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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3)
“계시의 군주는 자신이 신의 계시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자에게는 자신이 우리가 기다려온 사람임을 증명할 증거가 있지만, 우리는 그와 마주할 기회가 없었네. 당시 구주에 요행히 살아남은 천구의 정예 무사들이 전부 출동해 찾아다녔지만 그는 도망 다녔네. 그는 자기 신분을 증명한 그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추격을 당했어. 누군가는 그의 머리를 사겠다며 천라산당의 자객들에게 거금을 내걸었고, 제후들에게 충성하는 정위들도 그자를 죽이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지. 그렇게 누군가는 그자를 죽이려 했고, 누군가는 그를 보호하려 했네. 계시의 군주는 계속 북으로 도주하다가 추엽 산성에 도착했네. 이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나타난 장소일세. 그는 죽었을 것이네.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는 천구를 구원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네. 다행이면서도 불행한 일은 그가 죽기 전에 마침내 당대의 천구 대종주를 만났다는 것이네.”
식연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 종주의 이름은 유장길이네!”
“그자는 천구의…… 반역자가 아닌가!”
“맞아. 아직도 유장길은 천구에서 반역자로 여겨지지. 당시 천계성의 금오위였던 자네와 나는 그때 제일 처음으로 천구의 내부 정보를 접했네. 모두가 유장길이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다고 알고 있었지. 그는 천구의 정신을 배반하고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 최대의 적인 진월교를 물리치기를 바랐네. 종주들은 유장길에게서 폭군이 될 가능성을 발견했고, 하여 그는 도리어 천구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 그러나 가장 은밀한 사건은 유장길이 천구를 배반하기 전에 계시의 군주라 불리는 자와 만났다는 것이네. 두 사람이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는 사람은 아직 없네. 유장길이 그해 남긴 자료들 중에서 단서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는 대단히 신중해 관련된 글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어.”
식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된 것이네. 하여 지금의 천구는 일부 무사들로 구성된, 목표도 없고 앞날도 알 수 없는 조직이라네. 천구는 가슴 가득한 열정만으로 남은 목숨을 겨우 부지해 나가고 있는데 진월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지. 그들은 이 기회에 전면 출격해 그들의 뜻대로 유일한 주재자가 되려 한다네.”
백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저들이 우리에게 한 행동은 그 일환일 뿐이군. 저들은 이 세계의 정신적 주재자가 되기를 바라니까.”
“맞네. 한주와 청주, 뇌안산에서 온 하락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네도 검은 깃발을 든 사자가 벌써 암암리에 그들의 고향에 다녀갔음을 알 수 있을 걸세. 지난 십수 년간 진월교는 이미 거대한 세력의 그물을 구주 전 대지에 걸쳐 펼쳐놓았네. 이제 그들은 그 그물을 거두려 하고 있어. 이 상양관 전투로 저들은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정식으로 선포했네.”
“그렇다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노쇠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백의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이 일어섬과 동시에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었다. 그는 주먹 한 방이면 뚫릴 듯한 얇은 문을 마주한 채 조각상처럼 정지해 있었다.
문 밖 목소리의 주인공이 담담히 문을 열었다. 거대한 검은색 피풍을 덮어쓰고 깃을 높이 세워 얼굴을 가렸다. 키가 크고 깡마른 이 사내는 긴 창을 꽂아둔 것처럼 입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쪽은 천구 무사단 종주, 푸른 바다의 매. 이쪽은 초위국 백의 장군입니다. 이제 두 분도 인사를 나눈 셈이군요. 기왕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는 바, 적의는 거두고 앉아서 얘기하십시다.”
식연이 느긋하게 말했다.
“푸른 바다의 매?”
백의는 여전히 검자루를 잡고 있었다.
“그렇네. 나는 자네의 유일한 지원군일세.”
익천첨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식연에게 매 휘장을 찍은 서신을 받고 이틀을 꼬박 말을 달려 도착했네.”
“성에는 어떻게 들어왔죠? 밖은 온통 행시들인데.”
탁자 옆으로 다가간 익천첨은 부시를 비벼 등불을 밝혔다. 그는 등불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젊은이, 내가 우인이라는 걸 알아보겠나.”
백의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노인의 백발을 보았다.
“지금은 보름이 아닙니다. 날아 들어올 수가……. 당신은…….”
“나는 학설이네. 천구이기도 하고. 한때는 한 성방의 주인이기도 했지. 고막이라 부르게. 고막 사달극.”
익천첨은 싸늘하게 백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듯했다.
“그렇게 검자루를 쥐고 날 쳐다보지 말게. 자네가 적의를 품고 나를 보면 나 역시도 ‘반역자’란 세 글자로 자네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익천첨은 말하는 속도를 늦추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천구의 반역자! 내가 젊었을 적 우리 천구는 더욱 엄격한 규율을 받들었네. 과거 자네의 모든 행위는 이미 종주회가 사살 명령을 내릴 충분한 이유가 돼!”
백의는 잠자코 위엄 있는 눈빛으로 익천첨의 두 눈을 마주했다. 도검이 성벽에 부딪힌 듯했다. 백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어 묵묵히 검자루를 놓았다.
식연의 미소가 둘 사이의 얼음장 같은 침묵을 녹였다.
“과거 일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구도 기고만장하던 방대한 조직에서 보는 사람마다 때려잡으라고 소리치는 거리의 쥐새끼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규율은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선배님. 게다가 저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고작 열여섯이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지요.”
“심문하러 온 것은 아니네.”
익천첨은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피식 웃었다.
“다만 젊은이에게 약간 경고를 주었을 뿐이야.”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손님이 올 줄 알았다면 차라도 준비했을 텐데요.”
백의가 침묵을 깨트렸다.
“이곳에는 넘치는 게 핏물이네. 자네가 즉각 행동하지 않으면 이 핏물은 점점 불어나 자네 목구멍까지 차오를 걸세.”
익천첨이 냉랭하게 말했다.
“자네에겐 시간이 얼마 없네!”
“무슨 시간 말입니까?”
백의는 늠연했다.
“적의 마지막 공격이 곧 시작될 것이네!”
“언제입니까?”
“자네는 천구를 스치듯 겪었을 뿐이라 진정으로 우리의 적을 이해하지 못하네. 그러나 우리와 진월의 전쟁은 벌써 수천 년간 지속되어 왔네. 우리는 시체를 조종하는 비술 대사들을 너무나도 잘 알아. 백의 장군.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행시들이 밖에 서 있은 지 얼마나 되었나?”
“거의 한 달이 되어갑니다.”
“저들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행시는 산 사람과 같아. 혈액이 천천히 흐르고 몸의 활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네. 저들은 영혼을 잃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몸이 곡현(谷玄)1)의 힘에 소환되어 깨어났지. 몸에 겨우 남아 있는 힘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네. 보통 사람에 비해 소모되는 속도가 많이 느리지만 말이야. 자네 생각엔 저들이 저곳에서 오랜 세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가?”
“활력을 잃겠군요.”
“그렇네. 시고는 그저 저들의 사라진 혼백을 대신하는 존재일 뿐이네. 예인(藝人)이 꼭두각시 인형을 조작하는 것과 같지. 그러나 이 인형들도 힘이 다하면 결국 쓰러지고 마네. 행시 중에서도 극도로 복잡한 금지술로 만든 시무사만이 오래도록 활력을 유지할 수 있어. 심지어 그들은 사람처럼 밥도 먹을 수 있지. 성문 밖의 저것들은 거의 명이 다했네. 저들이 쓰러지면 리국 군대의 1만 적려가 자네에게 위협이 되겠는가? 자네 수중에는 아직 싸울 수 있는 수만 명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진월은 행시가 쓰러지기 전에 진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익천첨이 냉소를 던졌다.
“그렇네. 진월의 의도는 자네들을 죽이는 것이야. 그냥 가둬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지. 저들은 한 번 더 공격해야 하네! 그리고 나는 저들의 공격 시간을 알고 있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언제입니까?”
백의는 벌써 안달이 났다. 기회가 눈앞에 있음을 알아챈 그는 오만함을 버리고 스승 앞의 제자처럼 다급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익천첨은 웃으며 고개를 들고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득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보이지 않는 별이 천정(天頂)에 떠오를 때 그들의 힘은 최대로 강해지지. 그때가 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세.”
“곡현!”
백의는 이해가 되었다.
“습득이 빠르군!”
익천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곧 곡현의 힘이 가득 차오를 것이네. 끝까지 당겨진 활시위처럼 말이야! 곧 완전히 죽게 될 행시들은 그때 최대의 힘을 얻고 몸속의 말라가던 피는 더욱 빠르게 흐를 것이네. 그럼 그들은 발광하는 야수처럼 변해 살아있는 모든 걸 죽이려 할 걸세!”
백의의 안색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처음부터 저들은 별의 작용을 계산해 두었군요!”
“그렇지. 수천 년에 걸친 천구의 경험상 우리의 적은 너무 똑똑하고 인내심도 강하네. 저들은 덤불 속의 뱀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자네를 관찰하네. 그리고 저들이 자네를 조준할 때는 이미 자네에게 퇴로가 없음을 정확히 계산한 후이지.”
익천첨이 돌연 큰 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영무예를 포위하는 작전에서 자네들은 그가 뛰어들 함정을 이미 설치해둔 것 같았겠지? 자네는 비밀 모의에 참여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모의의 핵심 인물이 아니었네. 하여 이 모략으로 진짜 제거하려는 사람이 영무예가 아니라 자네란 사실을 조금도 몰랐던 거야! 배후가 누군가?!”
백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단호하게 익천첨을 노려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온몸에 경계의 기색이 어렸다.
익천첨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없이 등불만 바라보았다.
“난…… 말 못 합니다!”
백의가 이를 악물었다.
“아니, 자네는 모른다고 말해야겠지.”
익천첨은 담담하게 말했다.
“진월은 누군가를 조종하려 할 때 대체로 겹겹의 막후에 숨어 있네. 앞에 드러난 졸(卒)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어. 자네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니 당연히 모를 것이네. 군인의 오만함과 용맹함도 비술 대사들의 눈에는 한낱 아이의 용기처럼 가소로울 뿐이야.”
익천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캐물으려는 것도, 자네를 조롱하려는 것도 아니네. 사실상 나와 식연도 다른 사람의 바둑판 위에 놓인 말에 지나지 않아. 진짜 배후에 있는 자가 보기엔 우리의 반격 또한 그자의 계산속에 있는 것이지.”
백의는 맥없이 앉아 나직이 숨을 골랐다.
“근데 그럼 또 어떤가?”
익천첨은 교만하고 고고하게 냉소하며 등불을 응시했다. 독기 어린 눈빛이었다.
“계시의 군주가 없던 700년간 우리 가소로운 천구들은 신에게 잊혔지만, 여전히 수도 없이 진월과 싸우지 않았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저들도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네! 신의 힘으로 인간의 반격을 억눌렀으나 진월 역시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백의가 휙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제 속 시원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비장의 무기가 뭡니까?”
“사람 하나를 죽여야 해.”
식연이 말했다.
“누구를!”
백의의 물음에 식연은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우리를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네. 그자가 전서구로 내게 서신을 한 통 보내왔어. 이 방대한 비술 의식이 시장진(屍藏陣)이라더군. 비술로 만든 진이니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진의 주인이 여전히 상양관 안에 있다고 하네. 그리고 진의 주인이 이 진의 최대 약점이라는군.”
“그자를 어떻게 찾지?”
“아마도 무척 어려울 걸세.”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음지에 숨어 있는 자야. 자네를 죽이려는 자객과 같지. 하지만 자객이 언제 얼굴을 드러낼까?”
“살해의 순간!”
백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맞아! 곡현의 힘이 가득 차오르는 밤, 곡현이 밤하늘을 지나가는 궤적이 가장 길어지는 그때 상대는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행시 떼로 조직한 군대를 유인해 공격을 개시할 걸세!”
식연은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한 뒤 다시 눈을 떴다.
“그때가 그자를 죽일 유일한 기회야.”
“그러니까 양측이 동시에 공격을 시작한단 얘기군.”
백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네.”
식연은 눈을 가늘이며 오만하면서도 냉담하게 웃었다.
* * *
1) 태음, 태양의 맞은편에 자리하는 전설 속의 죽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