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5장. 신들의 군림 (2)
식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태곳적 혼돈의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그러니 우리도 불을 끄는 것이 좋겠네.”
식연은 손으로 등불 심지를 비벼 불을 껐다. 막사 안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이 막사에는 창문이 없었다. 천장 나무판의 성긴 틈으로 약간의 별빛이 비출 뿐이었다.
식연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편한 자세로 바꿔 앉았으나 목소리는 더 나직하고 엄숙해졌다.
“백의. 인간은 평화를 갈망하는 종족일까, 전쟁을 갈망하는 종족일까?”
백의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말하기 어렵네. 너무 복잡한 문제야. 많은 사람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매 왕조, 매 시대에 영토를 확장하려 시도하는 사람이 있었지.”
“맞네.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지. 그러나 누군가는 늘 이 문제를 생각했네. 고륜아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왕조의 국사였지. 훗날의 역당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후로 진월도 천구처럼 황실에 배척당했지.”
“고륜아가 무시무시한 사람이기는 하나 진월 역사상 가장 사교성이 뛰어난 대교종 중 하나였어. 고륜아는 진월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권력자와 나누고 싶어 했네. 그래서 신도들을 데리고 천계성으로 들어갔지. 그는 실패했지만, 수천 년에 걸친 진월의 문헌과 경전을 정리해 성문화된 이론을 만들어냈어. 그 이론은 진월이 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는지, 막후에 숨은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네.”
“흥미롭군. 철학자인가?”
“진월의 비술 대사들은 너무 큰 힘을 장악하고 있네. 그들은 위로는 별과 호응하고 아래로는 망자를 소환하지. 불과 얼음, 폭풍우의 힘을 가졌으며 정신만으로 금속을 절단할 수도 있어. 이들은 보통 사람과 달라. 평생 이 세상의 궁극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자체는 신경 쓰지 않아. 과부, 하락, 우족도 개의치 않지. 그들 눈에 생물은 미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애당초 중요치 않아. 아니면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것들일 수도 있네. 소를 기르는 것도 고기를 먹기 위함이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논리지. 다만 소가 죽는 고통은 그들이 고려하는 범위 안에 있지 않아. 고통은 그들 눈에 일종의 기제(機制)일 뿐이네. 통각이 있으므로 생물은 다치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할 테니까. 좋은 일이고, 쓸모 있는 기제이지. 그러나 그 역시도 기제일 뿐이네. 신의 시야에 고통은 미미한 일에 불과하니까. 생존도 그렇고 희망도 마찬가지네.”
“그들 자신도 생물이지 않은가.”
“그래서 자신의 범속한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 진월 교도의 최종적인 갈망이지. 그들은 평생 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자 한다네.”
식연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은 그저 이 세상의 궁극적인 힘과 의미만을 사랑한다네.”
“그런 게…… 존재하는가?”
“나도 모르겠네. 나는 천구잖나. 하지만 진월 교도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또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네. 그들은 개별적인 개체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지만 모든 종족의 생존과 발전은 신경 쓰거든. 구주의 모든 종족이 세계의 중요한 일부이자 이 세상의 힘이 순환하는 근원이기 때문이지. 세계는 강줄기와 같고 모든 종족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일세. 물이 없으면 힘은 순환할 수 없고 강은 마르게 되지. 진월 교도들은 이 세계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종족도 사랑하는 것이야. 소위 ‘큰 사랑’이라는 개념이지.”
“큰 사랑?”
백의가 물었다.
“신의 자격으로 사랑하는 것이네. 진월 대사들의 눈에 그들은 우리를 구원하러 온 자들이지.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평등하다고 할 수 없네. 우리도 뭘 간절히 바란 적이 없고. 그들은 이 세계의 미래에 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든 소멸시켜버릴 수 있네. 다시 말해 그들은 신에게 충성하고 신을 대신해 주재하는 자, 신이 속세의 사람들 중에 선택한 그들의 사자인 것이지.”
“훌륭하네. 갈수록 미치광이 같군.”
“1대 진월 대사들도 매우 당혹스러워했네. 그들은 세상의 전쟁을 보았어. 세력의 흥망성쇠와 야심가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뜨거운 피를 보았지. 대사들은 모든 종족의 마음속에 자리한 전쟁과 권력에 대한 갈망이 이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네. 이것은 타락이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어. 대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세계에 어째서 이렇게 많은 분쟁과 살육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매우 고심했네. 그래서 그들은 신께 답을 구했지. 그들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자신했네.”
“환각인가?”
“그럴 수도.”
식연이 미소를 지었다.
“진월 대사들은 자기가 세상의 궁극적 의미에 가까워졌다고 자신했네. 세상에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 세상이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전쟁터가…… 되기 위해서?”
백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렇네! 그들이 말하는 전쟁은 사실 일종의 힘이고 완벽한 기제일세. 신은 전쟁이란 수단으로 세상의 성장을 조정해 왔네. 신은 먼저 전쟁을 통해 각 종족 중 약한 이들과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개체부터 제거했어. 그리고 전쟁을 이용해 각 종족에 왕성한 활력을 유지하게 만들었지. 그들은 반드시 전쟁을 해야 하고 한시도 소홀해서는 안 되었네. 전쟁에서 멀어지면 인간은 나태하고 나약해지니까. 살아 있지만 그들의 생존 능력과 개척을 향한 포부는 퇴보하게 되지. 이렇게 되면 전체 종족이 서서히 죽어가게 되네. 말을 방목하는 것과 비슷해. 그들은 제일 먼저 가장 약한 말을 제거하네. 안 그러면 말떼의 번영에 지장을 주게 될 테니까. 다음으로 수컷 말들을 싸우게 만들고 승자는 말떼의 우두머리가 되지. 이러면 모든 수컷 말이 우두머리 자리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게 될 테고 동시에 가장 우수한 우두머리를 뽑을 수 있게 돼. 우두머리는 암컷 말들과 종족 번성의 권력을 갖게 되네. 그러나 우두머리는 일시적인 자리야. 말떼에 끊임없는 활력을 일으키기 위해 결투가 끝나자마자 벌써 다음 결투 준비가 시작되지.”
“그럼 그들이 말치기란 소린가?”
“그렇네. 그래서 진월의 대사들은 스스로를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지도자라고 본다네. 그들은 이 이론을 도출한 뒤 기뻐 날뛰면서 자기가 이 세계의 궁극적인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고 여겼네. 이후로 그들 눈에 전쟁은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변했지. 그들은 도발하고 조정하기만 할 뿐이네. 우리가 사상자를 볼 때 그들은 전쟁 안에 잠재하는 거대한 ‘활력’을 보는 것이야.”
백의는 한참을 침묵했다. 식연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부시를 비벼 담뱃대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손이 살짝 떨렸다. 불똥이 연신 튀며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지만, 시종 불을 붙이지 못했다.
식연은 웃으며 불을 붙이는 걸 포기하고 탁자에 담뱃대를 던졌다.
“처음 그 이론을 들었을 때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네. 밤하늘 아래로 달려가 하늘에 대고 그게 무슨 소리냐며 소리쳐 묻고 싶었지. 정말 그런 것이냐고, 진짜 그것이 세상의 진실한 참모습이냐고 말이야.”
식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입으로 말하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이 느껴진다네. 손까지 떨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군.”
“자네도 그 논리 중의 어떤 것들을 생각해본 적 있기 때문이겠지. 심지어 옳다고 여겼을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 겁먹을 이유가 뭔가? 정말 미친놈의 논리라면 미쳐 날뛰게 두면 될 것을.”
백의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진월의 신도들을 미친놈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어리석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럴지도.”
“그럼 천구는? 천구 무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천구는 죽지 않는다는 전설이 오랫동안 이어져왔지. 자네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전진해 왔어. 무엇을 위해 이리 버텨온 것인가? 신의 힘과 존엄에 도전하기 위해서? 세상을 장악하는 신에 대항하기 위해서?”
백의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살짝 번쩍였다.
“아니면 고상한 이유를 앞세워 자네들도 권력을 쟁탈하려는 것인가?”
“천구는 지지할 이론 따위 없네.”
식연이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천구의 이론은 잊혔는지도.”
백의는 흠칫했다.
“사실이네. 다수의 천구 무사는 그들이 평안한 세상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깨달을 기회가 없네. 천구의 이론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아.”
식연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종주들이 그들을 속인 거지. 비록 종주들도 핍박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말이야.”
“말도 안 돼. 수천 년을 이어온 조직이 강대한 이론과 구조도 없이 고작 몇 사람의 열정에 의지해서는 지속될 수 없어! 식연, 뭘 숨기려는 것인가?”
백의가 나직한 목소리로 엄하게 물었다.
“종주회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조직이 사실은 이론 하나 없이 버텨왔음을 인정하는 것은 맹인이 무기를 휘두르며 강대한 적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과 같지. 이보다 더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식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사실이네. 우리는 이 답을 찾아온 지 오래되었어. 역대 전설에 보면 우리도 신의 계시를 얻을 기회가 있었네. 신의 계시를 가져다준 자를 우리는 ‘계시의 군주’라 불렀지!”
“계시의 군주?”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네. 어디에서 왔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는 태곳적 혼돈의 시기부터 전해져온 하나의 정신이지. 언제 누구의 몸에서 부활할지 알 수 없어. 그의 부활은 태고 시대 최강의 무사들을 소환할 것이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철황(鐵皇)’이라 부르지. 계시의 군주는 천구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줄 것이야. 힘과 구원을 포함해서 말이야.”
식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계시의 군주는 죽임을 당했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백의는 놀라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다.
“자네 말대로라면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죽임을 당할 수가 있는가?”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어. 각종 정보들은 계시의 군주가 나타났었으나 죽었다고 말하고 있네. 과거 그의 정신은 거듭 우리 무신의 추종자들에게 분명히 그 존재를 알려왔지만, 700년간 줄곧 침묵한 채 나타나지는 않았어. 한데 19년 전이었네!”
식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누군가가 계시의 군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제후들을 선동해 장장 30년간 천구를 토벌했네. 수많은 천구 무사들이 형틀에 묶이고 참수되고 교살되었지. 그들의 최종 목표는 계시의 군주가 깨어나기 전에 죽이는 것이었어!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네. 계시의 군주는 여전히 나타났네. 그러나 그자는 진월 교도였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얘기로군.”
백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낯빛이 창백해졌음을 알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식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의 식연은 백의와 환난을 함께하는 벗은 아닐지 몰라도 그를 속일 리는 없었다. 그 정도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백의는 과거 수십 년간 왕조의 정책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비밀 조직에 의해 교묘히 조작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다. 전쟁이든 백성의 힘을 억압하는 일이든 그저 한 신명을 받드는 집단과 다른 신명을 받드는 집단이 벌인 암투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