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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들의 군림 (1)
완주, 하당국, 남회성 밖.
익천첨은 별빛 가득한 하늘 아래 서서 닿을 수 없이 아득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그마한 삼첩 폭포 아래 서 있었다. 차디찬 계곡물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며 어깨와 등을 두드렸지만 끄떡하지 않았다. 몸은 얼음장 같은 자극에 긴장했다. 어깨 뒤의 강한 근육이 늙은 나무뿌리처럼 탄탄히 얽혀들었고 피부 아래로 혈액이 더욱 빠르게 흘러 피부 표면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처음 이 계곡에 발을 들였을 때는 그도 추워서 벌벌 떨었다. 하지만 참아냈고 이제 이런 추위쯤은 별것 아니게 되었다.
익천첨은 여전히 건장한 자신의 몸에 매우 만족했다. 그 나이 대 절대 다수의 우족 노인은 지팡이를 쥐고 숨이나 겨우 쉬었으니까.
그는 반 무릎을 꿇고 머나먼 별 하늘을 향해 나직하게 호소하듯 말했다. 그는 우인이었다. 역당이라 해도 가끔은 여전히 심원한 하늘에서 신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었다.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된 벗들도 그를 지켜보고 있다고 믿었다. 강철 호각이 울려 퍼졌다.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는 이제 벗들의 비호가 필요했다.
익천첨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갈라진 근육 사이로 물이 미끄러져 내렸다.
“우연, 돌 뒤에 숨어라. 고개 내밀면 안 된다!”
익천첨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알았어요, 알았어!”
바위 뒤에서 여자아이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이제 노인네예요. 노인네 벗은 몸을 누가 궁금해할 거라고요!”
익천첨은 실소하며 느릿느릿 계곡물을 나갔다. 몸을 깨끗이 닦은 그는 몸에 딱 붙는 하얀 장포를 입었다. 장포의 양식은 특이했다. 등 뒤가 커다랗게 벌어져 있어 용맹한 등 근육이 드러났다. 귀족 여인의 요염하고 화려한 예복 양식 같아 보였다. 바위에는 이미 갑옷 한 벌이 펼쳐져 있었다. 흑녹색의 갑옷에는 변화무쌍한 넝쿨 장식이 있고 그 가장자리는 어두운 금색 실로 장식된 것이 꼭 정교한 수공예품 같았다. 그러나 그 갑옷을 드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가벼운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재질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단히 단단하고 질겼다. 익천첨은 견갑 위의 칼자국을 어루만졌다. 입가에서 냉담한 미소가 흘렀다. 오래전이 떠올랐다. 당시 이 갑주는 새것이었다. 그는 이 갑주를 걸치고 거대한 나무 집에서 걸어 나왔고 그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당시 익천첨의 은빛 백발은 햇빛에 비치면 화려한 금색을 띠었다. 그래서 그 갑주를 만든 여인은 이 갑주가 흑녹색이면 금빛 광채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여인은 이미 죽었고 그의 백발도 어두워졌다.
생각을 거둔 익천첨은 갑주를 차례대로 하나씩 걸치고 튼튼한 소가죽 띠로 고정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이 갑옷은 완벽하게 몸에 들어맞았다. 익천첨은 등이 굽거나 군살이 붙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용맹했다.
여전히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익천첨은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비갑을 찼다. 비갑도 곧 전투가 도래했음을 예감했는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팔 하나가 살며시 익천첨의 오른팔을 감싸 쥔 것 같았다. 그는 비갑을 찬 손으로 자신의 창을 들고 움켜쥐었다.
익천첨은 참 좋다고, 그 한마디가 하고 싶었다. 심지어 아주 오래전 희양이라는 사내처럼 무기를 쥐는 순간 자신만만하게 욕 한마디 내뱉는 상상을 했다.
그랬다! 정말 좋았다! 빌어먹을 더럽게 좋았다! 일찌감치 뒈졌어야 할 것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익천첨은 바위 뒤편으로 걸어가 단번에 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소녀를 안아 들었다.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입술을 살짝 구부렸다. 아리따운 꽃잎 같았다. 소녀는 언짢은 얼굴로 씩씩대며 익천첨을 보았다.
“안색이 말이 아니구나. 몹시 불쾌한 얼굴인데?”
익천첨이 웃었다.
“할아버지는 나 신경도 안 쓰잖아요!”
우연이 얼굴을 홱 돌리며 익천첨을 외면했다.
“할아비가 어찌 널 신경 안 쓴다는 게냐?”
익천첨은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 출타하시려고 하잖아요.”
우연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익천첨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가지 마요. 물소랑 아소륵도 갔는데 할아버지도 가버리면 나 혼자 남잖아요.”
우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익천첨을 쳐다보았다.
“물소가 누구냐?”
익천첨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희야지 누구예요.”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맨날 말썽부리고 그러면 안 된다…….”
익천첨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우연이 또 고집스럽게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네 선물을 샀는데, 볼 테냐?”
익천첨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무슨 선물요?”
어리지 않은 소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때부터 우연은 항상 선물이라면 왕성한 호기심과 기대를 보였다. 희야가 이야기꾼 선생에 혹하는 것과 비슷했다. 우연 본인도 알지만,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수갑을 찬 익천첨의 손바닥에 호박색 새끼 사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살아 있지만 깊이 잠든 듯 몸을 작은 공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옥을 조각하는 장인이 긴 갈기를 극도로 세밀하게 새겼지만 갈기가 사자의 네 발을 덮어 버려서 귀여운 아이처럼 보였다.
“우아아, 강아지 같아요!”
우연은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그 사자를 손에 쥐었다.
익천첨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이 이런 자그마한 장난감을 좋아하니 비교적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이 장난감은 값이 싸지 않았다. 벌이가 없는 천구 종주가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행히 식연이 인심도 좋게 “익 선생께서 돈을 쓴다하면 얼마가 되었든, 내게 물을 필요 없다”고 자기 장부(掌簿)1)에게 말해 두었더랬다.
“우연, 착하지. 할아비가 며칠 집을 비워야 한다. 어쩌면 금방 돌아올 수도 있어.”
익천첨은 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는 나 상관도 안 하면서.”
우연은 말은 그리 했지만, 이미 화는 풀려 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새끼 사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언제 돌아오세요?”
익천첨은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열흘, 어쩌면 보름 걸릴 게다. 나도 이런 시기에 너를 떠나고 싶지는 않으나 최근에 밖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단다. 내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지. 하지만…… 너 혼자서도 얌전히 잘 숨어있을 수 있겠지?”
“숨는 게 뭐 어렵다고요?”
우연은 달을 향해 새끼 사자를 들어 올렸다. 달빛이 영롱한 재질을 뚫고 들어왔다.
“제가 숨으면 물소랑 아소륵이 남회성을 다 뒤져도 못 찾아요!”
“그럼 됐다. 하지만, 약속 꼭 지켜야 한다.”
익천첨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일들은 내 모두 너 대신 준비해 두었다. 혼자 있다고 무서워하지 마라. 단, 당부할 게 한 가지 있다. 반드시 기억해라. 어느 누가 네 신사문 이름을 물어도 말해주면 안 된다. 너를 데리고 청주를 떠나던 날, 나는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 것이 네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네 부모와 청주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라. 이제 너는 평범한 동륙 소녀다. 하당국 남회성에 살며 이름은 우연이다.”
익천첨은 심각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우연, 약속해라.”
우연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익천첨은 웃으며 소녀를 땅에 내려놓고 다가가 물었다.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지?”
“우연!”
“예쁜 꼬마 아가씨, 신사문 이름이 있나?”
익천첨이 또 물었다.
“없어요! 난 우연이에요!”
“귀여운 아가씨, 우족 이름이 살서마이 아닙니까?”
익천첨이 세 번째로 물었다.
“들어본 적 없어요! 나는 우연이라니까요!”
우연은 큭큭 웃으며 달려가 익천첨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이제 키가 작지 않은데도 우연은 여전히 익천첨의 목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었다.
익천첨도 웃음을 터뜨렸다. 둘의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이들의 웃음소리 외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뿐이었다.
“사랑한다. 내 딸처럼 너를 사랑해.”
익천첨은 소녀를 꼭 끌어안고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소녀의 보드라운 볼에 얼굴을 맞대었다. 소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할아버지, 딸이 있어요?”
우연이 불쑥 물었다.
익천첨은 흠칫 놀랐다. 그는 우연을 놓아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딸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죽은 지 오래되었지.”
우연은 놀라 멍해졌다.
“어떻게 죽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죽었지.”
“그럼 할아버지는 정말 많이 늙은 거잖아요!”
우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아버지 딸 같으면, 내 손해 아니에요?”
순간 아연해진 익천첨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다시 소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넌 그 아이를 많이 닮았단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미도 많이 닮았지.”
익천첨은 갑자기 우연을 놓아주고 물었다.
“내 너를 너무 오냐오냐 하는 것 같지 않으냐? 이러다가는 통제 불가능한 공주가 되겠어.”
“내 할아버지잖아요. 왜 오냐오냐 하면 안 돼요?”
우연이 되물었다.
“나는 영 아이들 교육은 젬병이란 말이지. 갈 길이 너무 멀구나.”
익천첨은 유감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 성제 3년, 10월 엿새. 밤.
북대영 막사 밖에는 백의의 근위병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칼집에서 나온 칼은 달빛 아래 은색을 띠었다.
뵙기를 청했던 몇몇 군관은 밖에서 제지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항변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나란히 서서 기다릴 수박에 없었다. 근위병들은 맞은편에 서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싸늘하게 주시했다. 공기 중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긴장감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식연과 백의가 탁자 양측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둘 사이로 등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작해 보게. 여기에는 나와 자네뿐이니.”
백의가 식연의 눈을 보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제3자가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일어나 문가로 걸어간 식연은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둘러보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통같이 폐쇄했군. 자네 수하들이 내 수하들보다 야무지네.”
“자네는 척후 전술에 정통하지. 부정한 방법을 너무 많이 쓰니 군을 엄정하게 다스리기가 어려울밖에.”
백의가 손짓했다.
“시작하게. 자네에게 적을 물리칠 책략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자네 힘만으로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해 보게.”
“일단 밖의 철통같은 수비도 물리게.”
식연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왜지?”
“지금부터 내가 자네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두 조직의 수천 년에 걸친 싸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네. 이 투쟁에서 이미 최소 수백만 명이 죽었네. 그리고 이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기나긴 시간 동안 어느 쪽도 장기간 우세를 점한 적이 없었고 어느 쪽도 포기하려 한 적이 없었지.”
“몹시 궁금해지는군.”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수천 년간 천구와 진월은 사실상 최선을 다해 이 비밀의 핵심을 감추고 있네. 두 조직은 유일하게 이 일에 관해서만 한마음으로 협력하지. 통상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진월의 고위급 교도(敎徒)이거나 천구의 지도자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제거되네. 심지어 천구는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했네. 우리에게 영예로운 과거는 아니나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
식연은 백의의 눈을 직시했다.
“특수한 이유 때문에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자네가 천구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란 것도 아네. 하지만 밖의 귀들이 조금이라도 듣게 되어 어떤 일들이 퍼져나간다면 끔찍한 소동이 야기될 걸세.”
백의가 잠시 침묵했다.
“좋네. 자네 말대로 하지.”
“모두 물러가라! 1천 보 밖으로 물러나!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마라.”
백의가 막사 밖에 대고 호령했다.
대답은 없었으나 일사불란하게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 깜짝할 사이 정예 근위병들도 이 막사에서 철수했다. 주위는 약간 공허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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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전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