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4장. 궁지 (5)
황성, 계궁.
맑고 서늘한 달빛 아래, 수면 위로 잔물결이 남실거렸다. 수각에는 뇌벽성이 책상다리를 하고 무릎을 짚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수각 밖을 지켰다. 허리에는 검은 칼집에 든 묵직한 장도를 차고 있었는데 바람이 칼집 끝을 스치고 지나며 구슬픈 울림이 나직하게 일었다.
공중에서 갑자기 비슷한 울림이 들려왔다. 다만 그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다급했다.
제자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양 날개 위로 별빛이 일렁이는 하얀 비둘기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보통 비둘기와 달리 체형이 더 크고 나는 속도도 더 빨랐다. 다부진 새끼 매와 거의 비슷했다. 하강할 때는 놀랍게도 물새처럼 수면을 밟으며 속도를 낮추더니 다시 가볍게 스치듯 일어나 살포시 제자의 손바닥에 날아들었다.
비둘기는 입에 작은 물고기를 물고 있었다. 수면을 밟는 순간 이 날짐승은 사냥감을 잡은 것이었다. 몹시 배가 고팠는지 껍질 채 물고기를 삼켰고 부리 옆에는 한 가닥 핏자국이 남았다. 이 비둘기는 식성이 매처럼 흉포했다.
제자는 비둘기 발에 매달린 은색 관에서 종이를 뽑아내 한번 훑어보고는 공손하게 뇌벽성에게 올렸다.
뇌벽성이 손짓하며 물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더냐?”
검은 옷의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낄 수 있구나. 네 형이 성공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짙은 구름으로 바꾸어 상양관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나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반항하는 법. 백의와 식연이 가장 맹렬하게 반항할 때가 되었다. 이제 우리의 바둑판을 준비하자꾸나.”
뇌벽성이 제자에게 분부했다.
“상양관 사판(沙板)1)이 필요하다. 막사, 수로, 옹성, 창고까지 모든 것이 빠짐없이 표시되어야 한다.”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뇌벽성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제자를 향해 손을 내둘렀다.
“가봐라. 아무도 들이지 말고. 내 이곳에서 백리장청이란 사내의 숨결을 느껴보아야겠다.”
“어떤 숨결이 느껴지십니까?”
제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망. 백리장청은 번성이 다하면 반드시 쇠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에 근심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순환을 두려워한 게지. 그것은 거대한 바퀴와도 같아서 누구든 그 앞에서는 먼지처럼 부서지며 영원히 이길 수도 없다. 천구든 진월이든 마지막 날까지 이 법칙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뇌벽성은 정말 공기 중에 세상을 떠난 백리 가문 가주의 훈향 냄새가 나는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날요?”
제자의 물음에 뇌벽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백리장청의 문집을 읽었다. 그는 출사한 적은 없으나 동륙의 권력을 장악한 자였다. 황제라 해도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 백리장청은 자기 권력이 정점을 찍었을 때 죽었다. 일찌감치 자기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았어.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 걱정했던 것처럼 그리 죽었다. 꽃이 가장 활짝 피었을 때가 지기 시작할 때이지. 모든 일이 최상에 이르렀을 때 위험은 시작된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구나. 이번 일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백의의 모든 길을 차단했으나 행여 암암리에 우리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 시각, 상양관 서쪽 30리. 암람산 산기슭의 한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 자그마한 마을은 본래 상양관을 지나가는 행상들의 보급을 대주며 존재했다. 한데 지금 전란이 터져 다수의 사람들이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남은 사람들도 거의 집밖을 나오지 않았고 밤이 되면 일찌감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껐다.
마을 전체에 등불 하나만이 밝혀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하얀 옷을 걸친 젊은 공자가 간단한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항 공자, 내일 정말 떠나십니까?”
서동은 재미도 있고 씀씀이도 큰 단골이 떠난다니 좀 아쉬웠다. 이 손님을 모신 몇 달간 매일 함께 높은 곳에 올라 지도를 그렸다. 가끔 어두울 때면 산에 올라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큰 전쟁을 구경하기도 했다. 고생스럽기는 해도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외부의 신기한 이야기들도 얻어 들었다. 날아오르면 하늘의 절반을 가린다는 대풍(大風)2)이 어떻게 붙잡혔는지, 또 선대 황제가 수십만 근의 순동으로 제작한 천체 관측 기구로 별 하늘을 관찰해 천지가 시작된 순간 일어났던 일들을 추산해본 이야기도 들었다. 하나같이 불가사의하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고 치밀하게 잘 짜인 이야기였다. 서동은 자주 그런 이야기들에 흥분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생각하곤 했다. 그런 항 공자가 갑자기 떠나겠단다. 그것도 올 때처럼 갑작스럽게.
항 공자가 웃으며 서동의 얼굴을 톡톡 쳤다.
“품삯도 다 지불했고 지도도 다 그렸지. 몇 달이나 너희 마을의 호랄탕도 먹었으니 우리 인연도 거의 다했거늘, 눌러앉을 이유가 있느냐?”
서동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고향이 작은 산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항 공자는 딱 봐도 이런 작은 마을에 평생 머물 사람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유명한 호랄탕도 물릴 만큼 먹었다.
말이 없는 서동을 보고 항 공자는 그가 슬퍼한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행낭(行囊)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서동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일평생 떠도는 사람이라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 우리가 친구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긴 시간 인연이 있으니 그 또한 드문 일이다. 이 책을 네게 주마. 외지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다. 가지고 있다가 크면 천천히 읽어보아라. 책의 뜻을 이해하고 배짱도 생기거든 마을을 떠나라. 책 내용의 1할만 습득해도 밖에서 네 기반은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서동은 벌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책을 받고 기쁜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드니 웃는 얼굴 위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공자, 며칠만 더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전쟁도 끝나고 제 외숙도 외지에서 돌아오실 거예요.”
서동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는 아이였다. 그에게 썩 잘해 주는 편은 아닌 외숙이 하나 있었는데,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는 허둥지둥 심양의 친척집으로 도망치고 이 아이에게 남아서 집을 지키라 했다.
“안 돼.”
항 공자는 짧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순 없다. 그럼 너무 늦는다. 네 말이 맞다. 며칠 안으로 전쟁은 끝날 것이다…….”
항 공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했다.
“곡현이 곧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를 거거든…….”
서동은 항 공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항 공자는 웃으며 서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해가 안 되지? 이렇게 설명하마. 내가 비밀 하나를 누설했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천 조각에 썼는데 그것이 정말 내가 짐작한 대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뒤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단다.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우리 중에 있을 수밖에 없지. 내가 비밀을 유출한 사실이 들통 나면 나를 죽일 사람이 바로 출발할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면 아마 비밀이 유출된 사실도 발각될 것이고, 그때 내가 이곳에 있다가 들키면 혐의가 너무 커진다.”
서동은 알 듯 모를 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 비밀을 지켜다오.”
항 공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당부했다.
서동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항 공자는 몸을 일으켰다.
“너는 똑똑한 아이다. 훗날 이 마을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나를 찾아와라. 너는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을 테니까!”
항 공자는 뒤돌아 문을 나섰다. 그는 어둠을 틈타 출발했다. 서동은 등잔을 높이 들고 문틀 옆에 몸을 기댄 채 하얀 옷의 인영이 멀어져가다가 완전히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서동은 시큰해진 코를 문지르며 눈시울을 붉힌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등불에 책 제목을 비추어보았다. <경국12가론(經國十二家論)>이었다.
식연의 손에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천 조각이 들려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그는 벌써 여러 차례 읽고 또 읽었다.
매우 간단한 서신이었다. 목탄으로 갈겨썼고 천 조각도 옷자락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임기응변의 극치였다.
“형님 전(前) 상서(上書): 갑작스럽게 연합군이 시란으로 상양관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운주에 전해지는 시고술이라는 술법으로 동륙에는 아는 자가 적습니다. 박학다식한 태복(太卜)만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시고는 혼을 삼키는 독충으로 시체에 사용하거나 산 사람에게 쓰기도 합니다. 부상을 입은 자가 시고에 먹히면 본성을 잃고 부활한 망자와 다를 바 없어지며 모두 행시가 되지요. 시고는 제거하기가 어렵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시고로 만여 명의 망자를 일으키는 것은 비술의 진법으로 시장진(尸藏陣)이라 합니다. 진이 있으면 진의 주인이 있는 법, 진의 주인은 아직 상양관 안에 있습니다. 진의 주인이 죽으면 비술도 깨지지요. 이 일을 형님께 알리는 것은 관작이 오를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님께서 결정하십시오. 아우 올림.”
식연은 길게 한숨을 뱉고 천 조각을 다시 말아 허리띠에 쑤셔 넣었다.
“숙부, 뭐가 쓰여 있었던 겁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식원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왔다.
“현재 우리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사람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식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을요?”
식원은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누구요?”
식연은 조급한 조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면 벌써 찾아내 죽이지 않았겠느냐?”
“모르세요? 그럼 어쩝니까?”
“내 짐작대로라면 이자는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지. 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를 어찌 죽이겠느냐?”
식연이 웃으며 조카에게 되물었다.
식원은 어안이 벙벙해져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몰래 우리를 도와주는 이자가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궁금하구나. 왜 이리 하는 것일까?”
식연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함정은 아닐까요?”
“지금은 추측할 때가 아니다. 생사의 위기에 놓였으니 함정이라 해도 시도해볼 수밖에!”
식연은 주먹을 쥐고 가볍지만 힘 있게 탁자를 내리쳤다.
“숙부, 일찍 쉬십시오. 백 대장군이 내일 전사한 장병들의 시체를 불사르라 명하셨습니다. 역병이 도는 것도 예방할 겸, 장례 겸 해서요. 백 대장군이 이번에 사상자가 막심하다고 하시면서 나라의 죽음이자 군의 죽음이니 제후국 대군에서는 백부장 이상, 당직을 서는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참석해 망자를 애도하라 하셨습니다.”
“이 와중에 그리 화려한 장례라니, 백의도 이 일로 상처를 입고 괴로운가 보구나.”
식연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진정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자기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그 부상병들이겠지? 백의 같은 오만한 자에게는 어찌되었든 용납할 수 없을 일일 테니까!”
정오의 눈부신 태양빛 아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이자 생장하는 힘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라 죽음의 기운도 멀리 피해 사라지고 원한에 찬 영혼도 수작을 부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륙 제후국에서는 관습처럼 정오에 장례식을 시작했다.
초위국 군사들이 시신을 한 구, 한 구 들고 가 켜켜이 쌓았다. 시신을 한 층 쌓고 그 위로 장작을 한 층 깔고 기름을 한 차례 뿌렸다. 시신 더미 주위에는 고개를 숙인 채 묵념하는 군사들로 가득했다. 모두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들은 서글픈 표정에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전쟁 경험이 있는 군사들이지만 이렇게 많은 시체가 쌓인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함께 싸운 전우이자 형제였다. 거대한 시신 산은 죽음의 상징처럼 사람들을 슬프고 분노케 했다. 젊은 군사들은 참지 못하고 살짝 몸을 떨었다.
마지막 한 구의 시신이 올라갔다. 백부장 차림을 한 설대을이었다. 죽을 때 그는 일반 노병이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소리 높여 경고를 알리는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위기는 단순히 수천 명의 부상병을 죽이고 해결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파 속에서 그의 시체를 찾은 백의는 명을 내려 그를 백부장으로 승진시키고 백부장의 투구와 갑옷을 입혀 화장을 치르게 했다.
“대장군,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근위병이 백의의 뒤로 다가와 말했다.
“불을 붙여라.”
백의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명을 받은 근위병들은 각자 횃불에 불을 붙이고 몇 걸음 달려가 시체 더미 근처에서 전력으로 횃불을 내던졌다. 횃불이 기름을 뿌린 시체에 떨어지고 그 즉시 사나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화염은 위에서 아래로 휘몰아쳤다. 시체 더미는 마침내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화산으로 변했다. 시체가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역해서 다들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의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의는 까맣게 잿더미가 되어가는 시체를 마주보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었다. 시체 더미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백의는 곧 화염과 검은 연기에 휘말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온과 역한 냄새에도 그는 아무 느낌이 없는 듯했다.
검은 연기가 거의 하늘을 덮을 즈음, 백의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 그대 위해 연꽃을 따러 물에 들어가리
나 그대 위해 깃발을 들고 전장에 나가리
나 그리워할 그대 위해 공명을 버리리
나 그대의 백발을 슬퍼하며 천천히 노래 부르리
본래는 초위국 시골의 연가(戀歌)이지만, 갈라지고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노래의 느낌이 달라졌다. 포효 같기도 하고 장가(葬歌)처럼 비통하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군사들 대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같은 고향의 농가에서 온 이 병사들은 전장에서 서로의 뒤를 지켜주었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저들의 시체가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군사들은 자신들도 살아서 이 성을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공포가 슬픔과 뒤섞여 한꺼번에 솟구쳐 나왔다. 결국 젊은 군사 하나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목이 쉬어라 울었다.
백의의 근위병들이 즉시 다가가 군기를 흩트리는 젊은 군사를 끌고 나갔다. 그러나 그의 울음소리는 주위를 맴도는 메아리처럼 모두의 마음속에 못 박혔다.
식연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백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는 오랜 벗을 흘긋 쳐다보았다. 백의의 얼굴에는 그 어떤 비통한 기색도 없었다. 그날 밤 치중 부대 진영 입구에서 달려 나오던 모습과는 달랐다. 백의는 솟구쳐 오르는 화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냉담한 표정이었지만 사람을 불안케 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무슨 생각하나?”
“아주 오래전 우리가 천계에 있을 때를 생각했네. 금오위에서 저 잘났다며 우쭐댔지만 눈여겨 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청년들이었지. 나중에 자네는 천구가 되고 나는 그 반지를 버리면서 우리 운명은 달라졌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자네와 함께 싸우게 되었군.”
백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연은 차갑게 웃었다.
“백 대장군이 이런 멍청한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저들은 천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네. 저들의 목표를 위해 온 것이야.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저들은 누구든 죽일 수 있네. 저들은 이제껏 사람 목숨을 염두에 둔 적이 없어.”
식연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눈앞의 이것을 보고도 아직 모르겠는가?”
백의가 불쑥 고개를 틀며 말을 꺼냈다.
“우리, 다시 한번 협력하세.”
그는 눈썹을 치켜뜨고 식연을 향해 나직하게 포효했다. 분노한 사자왕 같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식연은 오랜 벗의 눈을 흘긋 보더니 멸시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백의 눈에 서린 분노를 비웃는 듯했다.
“무엇을?”
“진월을 잡아야겠네. 그들의 어리석음과 신앙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백의는 그 말을 하고는 돌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사나움이 묻어났다.
“백 대장군, 자네는 복수가 급한 것인가?”
식연이 싸늘하게 물었다.
백의는 식연을 쳐다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식연이 손을 내밀었고 백의도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힘껏 손을 맞잡았다. 강한 힘에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살짝 일그러졌다.
* * *
1) 나무판에 모래로 만든 지형 모형.
2) 신화에 등장하는 흉악하고 거대한 새. 신화 속 인물인 예(羿)가 청구의 호수에서 화살을 쏴 죽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