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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궁지 (4)
북대영 정문 앞. 식연이 말을 질주해 달려왔다. 묵설은 열기를 내뿜으며 백의 옆에서 급히 멈추어 섰다. 그 뒤로 여귀진과 식원의 군마가 바짝 뒤쫓아 왔다.
말 등에서 뛰어 내린 식연은 백의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게지? 적이 어디에 있어?”
식원은 긴장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점점 더 많은 수의 군사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도리어 입구를 에워싸고서 방어 진형을 펼쳤다. 하지만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어 진형이 군영 안쪽을 향하는 것을 보면 적은 북대영 안에 있었다! 식원은 놀라 얼이 빠졌다. 그날 밤 행시의 공격 후 상양관 내 방어를 재정비했다. 극도로 신중을 기했기에 어떤 빈틈도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경보를 알리는 종이 갑자기 울렸다. 적이 벌써 초위국 치중 부대가 위치한 북대영에 쳐들어 온 것이었다.
백의는 식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반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탄 사람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자의 몸에서 나는 강한 유황 냄새에 식연은 사레가 들려 저도 모르게 크게 기침을 했다.
“설대을?”
식연은 죄를 지은 노병을 알아보았다.
“적을 보았습니다.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고…… 혼자였습니다!”
설대을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백의를 쳐다보았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 그자가 시고를 가져왔습니다. 온 바닥이 전부, 전부 시고였습니다! 부상자들도 감염되었으니 죽은 것들로 변할 것입니다! 방 안이…… 전부 감염되었습니다. 모두의 몸에…… 시고가 들어갔으니…… 한 명도……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설대을은 피거품을 물며 마지막 숨을 삼켰다.
백의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려 피 흘리는 두 눈을 감겨주었다.
산진의 거대한 방패가 계속해서 전달되었다. 앞줄의 군사들은 무거운 방패를 받아 겹겹이 방패 벽을 쌓았다. 이렇게 하면 적의 무기가 이중 방패를 뚫어야만 산진 군사들을 해칠 수 있었고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무기는 거의 없다. 산진은 정면 공격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진형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형장사 궁수들도 산진 뒤에서 장궁을 준비했다. 강무외는 칼을 들고 궁수들의 뒤에서 진을 감독했다.
백의가 설대을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적이 시고를 치중 부대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고?”
식연이 물었다.
백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저 안은 모두 부상병입니다!”
여귀진은 멍해졌다.
식원은 밖에서 가로막혀 안쪽 상황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말을 탄 채 주위의 빈틈을 찾았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수가 떠오른 그는 훌쩍 뛰어 말 등에 올라섰다. 그러자 북대영 안이 전부 시야에 들어왔다. 식원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부상병 복장의 행시들이 발을 질질 끌며 군영 안을 걸어 다녔다. 그날 밤 보았던 행시들과 조금 달랐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지는 않고 의식만 대부분 잃은 것 같았다. 정처 없이 군영 안을 걸어 다니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일부 부상병들은 막사 안에 숨어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행시 수가 더 많았다. 부상병들은 그것들을 뚫고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행시들은 이따금 막사로 다가갔고, 안에 숨어 있던 부상병들은 무기로 그것들을 찔렀지만 행시는 고통을 몰랐다. 그저 집요하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뿐이었다. 찔려 쓰러지면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창가로 다가가면 창문 쇠 난간을 붙잡고 나직하게 뭐라 울부짖었다. 안쪽의 부상병들은 질겁하며 무기를 행시들의 입에 찔러 넣고 멀리 밀어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여귀진도 식원처럼 말 등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행시는 아니고 행시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직 죽은 건 아니고 시고에 감염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시고가 사람의 정신을 잠식해 부상자들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여귀진의 옆으로 식연이 묵설을 세우고 나란히 말 등에 섰다.
“잠식된 사람은 의식이 점점 모호해집니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사실 저들은 지금 두려워하며 구조를 요청하는 겁니다. 하지만 누구도 구해줄 수가 없지요. 저들이 죽으면 진짜 행시가 됩니다.”
“어떡하죠? 저희는 어떡합니까?”
여귀진이 물었다. 여귀진의 목소리는 매우 컸다. 그는 자기가 정말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천 명의 부상병이 죽어가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큰 소리로 식연에게 묻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여귀진은 묻는 것 외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어떡하긴요. 아무도 못 구합니다.”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보고만 있습니까?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죠? 의원도…… 소용이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 의원이 태양불에 정통한 비술의 대가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지금은 이런 말도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식연은 살며시 정도의 검자루를 어루만졌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저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뿐입니다.”
“그 말씀은……. 하지만 방금 저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하셨잖아요!”
여귀진은 식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귀진이 쉰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식연이 여귀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어쩝니까? 세자,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이미 대부분의 의식을 잃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구조를 청하는 겁니다. 창문 쇠 난간을 잡고 소리 지르는 것을 보십시오. 저들은 말을 할 능력도 잃었습니다. 저들의 의식은 계속 모호해져 갈 것이고 금세 기본적인 인성마저도 잃게 될 겁니다. 그때 저들은 행시로 변하고 본능적으로 산자들을 마구 죽일 겁니다. 행시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죽이실 겁니까?
전장에서 이런 일은 많습니다. 부상병들은 죽여도 됩니다. 예로부터 명장들은 그래왔지요. 그에 비하면 저희 후대들의 행위는 폭행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식연은 허리춤에서 천천히 고검 정도를 뽑았다. 그는 몸 옆으로 장검을 휙 털었다.
여귀진은 식연의 차분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연의 말이 잔인한 자조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마음속에 이런 잔혹함이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몸의 중량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여귀진은 말안장에 앉아 두 손으로 말 등을 짚고 숨을 골랐다. 식연의 말속에 어린 차디차고 무시무시한 힘이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고개를 들고 검을 쥔 채 조각처럼 서 있는 식연을 보았다. 경직된 그의 자세에서 거대한 위엄이 느껴졌다. 왠지 자신이 이 스승을 진짜로는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의, 명령을 내리시오.”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강무외도 이쪽을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의식을 잃은 부상병들은 벌써 광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점 진짜 행시를 닮아갔다.
그들은 한데 모여 막사 문에 세게 부딪쳤다. 그들은 쇠 난간을 붙잡고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입을 크게 벌린 모습이 막사 안 부상병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그들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막사 안의 부상병은 어떤 무거운 물건으로 문을 막았다. 하지만 문짝은 부딪치는 충격에 갈라지고 부서져갔다.
“지금 저들이 산자인지 망자인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소. 죽음의 힘이 불러온 원한이 이미 저들의 의식을 거의 말끔하게 집어삼켰소.”
식연이 나직하게 외쳤다.
“서둘러야 하오!”
백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백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나도 남기지 마시오!”
“감염되지 않은 병사들까지?”
식연이 물었다.
“못 들었소? 안의 병사들 모두가 시고를 얻었소. 행시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요. 한 명도 남기지 마시오.”
“알겠소.”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가 팔을 아래로 휙 내렸다.
강무외도 팔을 아래로 내렸다. 자형장사 궁수들이 공중으로 화살을 쏘았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들이 폭우처럼 빽빽하게 떨어졌다.
산진이 서서히 밀고나가기 시작했다. 긴 창이 거대한 방패 사이에 껴 있었다.
서 있던 식연은 뛰어내리며 말 등에 앉았다.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경기병들이 그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식연이 큰 소리로 호령했다.
“식원, 여귀진!”
“저…… 저…….”
여귀진은 마음을 진정하려 했다. 식연의 말이 옳다.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은 없다. 저 부상병들은 구할 수 없다. 시간을 끄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하다. 여귀진은 큰 소리로 식연에게 “네!” 대답하고 달려 나가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떨렸다. 한열병(寒熱病)에 걸린 사람이 몸을 벌벌 떠는 것처럼 여귀진의 손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주위의 경기병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여귀진은 가슴이 아파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귀진은 자신이 칼을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부상병들을 행시라 여길 수 없었다.
“내가 갈게!”
제 검을 뽑아든 식원이 여귀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후방을 맡아줘!”
여귀진은 한쪽 구석에서 식원을 찾았다. 그는 시체를 밟고 곳곳을 뒤지다가 마침내 이곳에서 식원을 찾은 것이다. 식원은 모두에게서 떨어져 어느 나무 상자 위에 검을 짚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검에 묻은 비릿한 피가 천천히 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많은 사람을 죽였어.”
식원이 고개를 들어 여귀진을 보았다.
식원은 조용히 여귀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여귀진은 식원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현듯 그는 자신의 벗이 이리도 낯설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이 전투 중에 식원의 어떤 면이 변한 것 같았다. 여귀진은 문득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가 겁을 먹고 있을 때 식원은 검을 들고 경기병과 함께 돌진했다.
여귀진은 힘껏 식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안해…….”
식원은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았다. 닦아낸 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어쨌든 전장에는 나가야 하는걸. 안 그래?”
“희 장관, 여귀진 세자께 무슨 일 있나요?”
엽근이 물었다.
여귀진은 막사에 돌아오자마자 잠자리에 누웠다. 누가 뭘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걸을 수 있게 된 희야는 문간에 버티고 있었다. 방을 나가면서 희야는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친 여귀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여귀진은 그렇게 조용히 지붕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장관이라고 부르지 마. 듣기에 정말 이상해.”
“그럼 희 공자라고 부를게요. 큰 가문의 후손이고 또 맏이시잖아요.”
“상관없어. 장관보다 귀에 덜 거슬리면 돼. 그리고 큰 가문은 무슨, 쥐뿔도 없는걸.”
희야는 방 안을 흘끗 보고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누군가는 공을 세우려고 전쟁에 나가고, 누군가는 살려고 전쟁에 나가. 하지만 누군가는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쟁에 나가지. 그런 사람이 영웅이어야 해.”
이미 다른 군사가 부상병 군영의 소식을 전해준 덕에 희야는 여귀진이 왜 말이 없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럼 희 공자는 왜 군인이 되셨어요? 여귀진 세자는 왜 군인이 됐죠?”
“세자? 여 씨로 태어나 영웅이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세자는 항상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하면 자기가 못나서라고 생각하지. 세자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어.”
희야는 벽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도 잘 모르겠어. 창을 쥐고 있지 않으면 너무 무서운 것 같아. 우연이 나더러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싫다고 했어.”
엽근은 곰곰이 생각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이유는 갈망 때문이거나 두려움 때문이지 않나요? 희 공자가 세자와 그렇게 친한 벗인 이유도 사실은 두 분 다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 아니에요?”
희야는 아연해졌다.
엽근은 황급히 말을 보탰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비예요. 운중 엽씨의 방계지만 군무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몰라요. 저 잘난 줄 알고 떠들어대다니, 우스운 꼴을 보였네요.”
희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난 뭘 잃을까 두려워하는 걸까? 난 아소륵도 아니고, 가진 게 없는걸.”
“그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자신에게 물어보셔야지요.”
엽근이 조용조용 말했다.
“전에 누가 나한테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랬어. 결국에는 항상 혼자 남기 때문이라고.”
“아주 맞는 말이에요.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자기가 아는 걸 공자에게 가르쳐주었나 보네요?”
엽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중에 그녀도 죽었어. 스스로 자기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맨날 그랬지.”
희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나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어.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잊어버렸어.”
희야는 엽근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희야는 여전히 이 여인의 눈이 싫었다. 모든 것을 감출 수 있을 것처럼 새카만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