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98화 (19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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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궁지 (3)

검은 인영이 천천히 달빛 아래를 걸었다. 묵직한 검정 외투가 뒤쪽 바닥을 쓸며 그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는 상양관 군용 도로를 걷고 있었다. 그가 지나온 지면은 알아채기 어렵게 변하고 있었다. 시작은 경미한 소리였다. 이어 작은 흙덩이가 들썩거리며 자그마한 벌레들이 땅을 파고 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커다란 무리의 개미, 전갈, 지네였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흙 속에 저리 많은 생명이 숨어 있었으리라고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벌레들은 무언가에 놀란 것처럼 흙에서 머리를 내밀고 지면으로 기어 나왔다. 벌레들은 근처를 난폭하게 빙빙 돌다가 차츰 대오를 이루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차분해지며 더는 허둥대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시 흙속으로 파고들었다. 지면 위로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생겨나 벌레들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개미든 전갈이든 지네든 질서정연하게 차례차례 줄지어 가장 큰 구멍으로 파고 들어갔다. 앞을 다투지도, 뒤처지지도 않았다.

사내의 걸음으로 인해 상양관 땅 아래에는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변화가 발생했다.

지금 일체의 잡음을 제거하고 검은 인영 뒤에 서면 삭삭 미세한 소리가 흙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서 있는 지면 아래로 평평한 토사류 한 층이 서서히 밀려오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거대한 군대 같기도 했다!

흙이, 살아났다.

모퉁이를 돌자 순찰 중인 풍호군 한 무리가 군마를 데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말의 머리에는 등롱이 걸려 있었다. 검은색 인영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풍호군은 놀라 군도를 뽑아들었다. 우두머리인 십장이 큰 소리로 외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압력이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 극심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을 짓눌러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십장은 극도의 불편함을 참아내며 말안장에서 군도를 뽑았다. 주위 군사들도 일제히 칼을 뽑았다. 칼끝이 다가오는 검은색 인영을 겨누었다. 어마어마한 공포에 그들은 자신의 군마가 경고하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했다. 오랜 훈련을 거친 군마들도 극도의 거대한 압력에 영향을 받는 듯했지만, 애써 몸부림을 쳤다. 부라린 눈에서 엄청난 두려움이 드러났다. 말들은 온몸의 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칼을 휘둘러 벨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외투의 쓰개 안에서 그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온전한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자의 눈은 너무나도 밝았다. 주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인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환했다. 그자의 눈과 그 아래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술은 또 얼마나 창백한지 몰랐다. 입을 벌리자 입술처럼 창백한 잇몸과 무시무시한 치아가 드러났다. 치아는 야수의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군도가 잇달아 땅에 떨어졌다. 그의 눈을 본 군사들은 주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잃어갔다. 발버둥 치던 말들이 저항을 포기했다는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말들은 다리가 구부러지며 천천히 꿇어앉았다. 군사들도 말안장에서 내려와 검은 인영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자가 떠나고 이어서 벌레들의 파도가 밀려왔다. 땅속에서 나와 앞으로 기어가던 벌레들은 땅을 짚은 군사들의 손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금세 군사들은 벌레에 뒤덮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대고 절을 하며 벌레들이 자신들을 집어삼키도록 가만히 있었다.

설대을은 고개를 들어 밝은 달을 보았다. 짙은 구름이 북쪽에서 다가와 빠르게 하늘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구름층 너머로 달빛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젠장, 또 비가 내리겠군!’

설대을은 속으로 빌어먹을 날씨를 저주했다.

치중 부대에서 검시관을 할 자격이 안 되는 그는 검시관을 쫓아다니며 시체를 거두고 묻는 등 그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더러운 일들을 했다. 성안의 시체가 깨끗하게 처리되지 못해 공기 중에는 항상 참기 힘든 시체 썩는 냄새가 떠다녔다. 설대을은 보통 사람보다 이런 냄새를 잘 참았다. 하지만 일단 비가 내리면 시체는 더 빨리 썩는 데 반해 묻을 일손은 부족하니 역병이 돌까 봐 걱정이었다.

설대을은 그간 거둔 시체들을 밤사이에 묻을까 했지만 깊이 잠든 동료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요즘은 배분되는 군량도 갈수록 적어졌다. 적게 먹으니 잠을 더 많이 잤다. 시체를 수습하는 군사들은 당직을 설 필요도 없어서 일부 군사들은 전염병에 걸린 닭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아침에 비스듬히 누워 자는 동료들을 볼 때면 이미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다가가 흔들어보면 또 깨어났지만 여전히 나른해하고 정신을 못 차렸다.

설대을은 어렴풋이 염려되는 바가 있었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설대을은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군영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벌로 군영을 순찰하는 것이어서 과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북대영은 경계가 삼엄해 첩자가 들어오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는 칼자루로 휴대하는 구리 방패를 두드렸다. 공허한 울림이 어둠 속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이는 순찰 돌 때의 규칙이었다. 이곳은 북대영의 한가운데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군마들은 옆의 마구간에 가두어져 있고 부상병들은 막사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대체로 밤중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안장을 베고 자고, 칼과 창은 몸에 지니시오.”

설대을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하는 말은 성안에서 야경을 도는 사람들이 ‘등불 조심’이라고 외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군영 안에서 중요한 것은 등불이 아니라 경계였다. 백의의 군령은 엄격했다. 기병은 밤에 잘 때 반드시 말안장을 베고 자야 했다. 말안장을 풀어 군마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함도 있지만 소가죽 말안장을 이용하면 아주 멀리에서 대군이 다가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휴대하는 무기는 다섯 보 이내에 두어야 했는데 안 그러면 군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당연히 그의 외침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습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설대을은 옷깃을 바짝 여몄다.

자기 막사로 돌아가려던 그때 앞쪽으로 문이 열린 막사가 보였다. 문짝이 바람에 움직이며 끼이익 소리를 냈다. 이따금씩 문짝이 벽에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망할 놈의 부상병들, 죽은 듯이 자는구나! 자다가 확 뒈져 버려라!”

설대을은 모질게 악담을 퍼부었다.

밤에 막사 문을 닫지 않는 것은 군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저곳은 부상병 막사인지라 군법을 어겨도 처벌이 무의미했다. 설대을은 막사 문을 걸어 잠그려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예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럼 저 부상병들은 내일 아침에 밥을 먹으러 나오지 못할 것이고 이 정도 소소한 벌은 위에다 설명하기에도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더듬던 설대을은 돌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이 문짝은 아까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아무리 깊이 잠든 사람이라도 시끄러워 깼을 것이다. 이런 소리를 참으면서는 계속 잘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되도록 아무도 일어나 문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막사 안에는 족히 100명에 가까운 부상병이 있었다.

설대을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손에 든 횃불로 자그마한 방 안을 비추어 보았다. 가운데 작은 통로가 나 있고 양쪽으로는 부상병들의 침상이었다. 지금 이 부상병들은 매우 조용하게 침상에 누워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요함이었다!

설대을은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미친 듯이 외쳤다.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하지만 설대을은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힘이 그를 압박하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방 안에서 불어온 바람에 횃불이 격렬하게 일렁이며 화르륵 소리가 났다.

설대을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알았다. 평생 죽은 자를 상대하며 살아온 그였다. 전쟁터에서 냄새만 맡아도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방에는 산 사람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막사 안에서 느껴진 압력이 마침내 그의 횃불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자는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쓴 채 천천히 설대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새카만 외투였지만 안감은 피처럼 새빨갰다. 그자는 설대을의 옆을 지나가며 고개를 돌려 살짝 웃는 듯했다. 설대을은 미소를 짓는 입 사이로 두 줄의 무시무시하게 하얀 치아를 보았다.

그자는 그렇게 설대을의 옆을 지나 소리 없이 떠나갔다.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설대을은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번득 정신을 차렸다. 몸서리를 치자 전신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진 모든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도 돌연 사라졌다. 설대을은 펄쩍 뛰며 허리춤의 종이봉투를 꺼내 그자의 발아래로 힘껏 던졌다.

설대을에게서 다섯 보 떨어져 있던 그자의 발아래에서 종이봉투가 으스러졌다. 짙은 유황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종이봉투에는 유황이 들어 있었다. 설대을은 이어 횃불을 던졌다. 유황에 불꽃이 붙자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은 말없이 자기 발아래에서 타올라 위로 번져가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뒈질 것들! 이 뒈질 것들!”

설대을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자기 군도를 뽑았다.

“내가 불태워서 죽여 버리겠어! 불태우면 다시는 못 살아나겠지!”

설대을은 차마 앞으로 달려가지는 못하고 두려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강적을 앞에 둔 지금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슥슥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천수만 개의 무언가가 빠르게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설대을은 땅을 뚫고 나온 벌레들을 보았다. 작은 벌레들은 피에 굶주린 듯 벌떼처럼 설대을을 향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시커먼 것이 지면을 한가득 채웠다. 달아날 새도 없이 벌레들이 그의 신발 속으로 파고들어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겨 보자 다리에 두꺼운 털이 난 것처럼 온통 새까맸다.

이건 무서울 일도 아니었다. 곧이어 부상병들이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설대을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움직임이 뻣뻣하고 둔했다.

“망할 것들! 뒈질 것들!”

설대을이 비명을 질렀다.

그자가 히히히 웃기 시작했다. 그자의 몸에 붙었던 불은 어느새 꺼졌다. 그는 유황불에도 다치지 않았다.

설대을은 온힘을 다해 군복을 잡아 뜯었다. 가슴에도 벌레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벌레들은 그를 물어뜯지 않고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듯했다. 점점 더 많은 벌레들이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목까지 올라오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벌레들은 반쯤 올라오다가 신비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라질 벌레! 이 빌어먹을 벌레들!”

설대을의 목소리는 이미 산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또 꺼내 힘껏 쥐어 으스러뜨렸다. 유황 가루가 전신에 떨어졌다. 설대을은 큰 소리로 외치며 검은 외투를 걸친 사람에게로 돌진했다. 칼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다. 그 틈에 설대을은 기회를 잡았다. 그는 굶주린 개처럼 아직 타고 있는 횃불로 달려들었다. 그는 횃불을 높이 들어 자기 등에 꽂아 몸에 묻은 유황에 불을 붙였다.

불이 타오르자 벌레들은 미친 듯이 그의 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설대을의 몸은 벌레의 둥지 같았다. 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벌레가 불길 속에 떨어져 나왔다. 설대을은 화염을 안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우물가에 도착한 그는 물은 긷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우물 옆의 구리종을 울렸다.

종소리가 밤하늘을 꿰뚫었다!

“적이 기습했다! 적이 기습했다!”

화염 속에서 설대을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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