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97화 (19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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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궁지 (2)

“둘 사이의 투쟁에 꼭 천하를 걸어야겠는가?”

“천하는 판돈이 아닐세, 도박판이지.”

“나는 자네들 때문에 세상이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계속 죽어가고 있네! 알 텐데!”

“우리 의원이 아니네!”

“자네들이 뭐라 생각하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는가!”

백의가 나직하게 호통쳤다.

달은 차고 별은 드문드문했다. 식원은 막사 밖 찬바람 속에 서서 두 명장이 어렴풋하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침에 적군 첩자가 군사들을 죽이고 못에 던져 넣은 사건이 발견된 후로 백의와 식연은 얼굴을 굳힌 채 종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나머지 제후국 통수들이 해산하자 두 사람은 드디어 말다툼이 폭발했다. 식원도 직접 듣지 않았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엄한 두 장군이 소년들처럼 오래도록 쉴 새 없이 다투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귀진에게 10장 앞으로 나가 군영 입구를 지키게 했다. 식연이 싸우다가 이성을 잃고 천구 일을 백의에게 까발리는 것을 여귀진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태세로 보아서는 묵은 과거까지 다 들춰낼 것 같았다.

“백 대장군 자네가 전략을 짜고 지휘했지. 이번 연합군 근왕 출병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 진실은 얼마나 되는가? 왜 자네 군대는 영무예가 황성을 떠나기 전에 출정 준비를 마쳤지? 우리 하당 국주는 어떻게 나보다 먼저 전쟁이 터질 것을 알고 사전에 대비를 했고? 책략을 짜는 사람이 몇인가? 배후에는 누가 있는 겐가?”

식연이 다그쳐 물었다.

“말할 필요 없는 것들이네! 식연, 정신 차리게! 이미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자네는 난세에 태어나 보검을 손에 들었네. 사람을 구하지 않고 죽이려고 세상에 뛰어들었는가?”

“내가 되묻고 싶군. 백 대장군, 자네도 난세에 태어나 보검을 손에 들었지. 한데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구하려는가? 그럴 거라면 가서 의원이나 하지 그랬나?”

“평생 의원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네!”

“우습군! 정말 가소로워!”

식연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자네는 군을 이끄는 사람이네. 툭하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를 부리는 일이지. 개돼지 죽이듯 사람을 죽이면서 위선적이게도 사람 살리는 의원이 되고 싶다는 건가?”

“식연, 자네는 정말 세상 사람들을 개돼지로 여기나?”

식연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사람을 개돼지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개돼지이네!”

“자네!”

분노가 극에 치민 백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의 꿈과 고난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식연의 잠긴 목소리에서 한없는 서글픔이 묻어났다.

식연의 발소리가 막사 문에 가까워졌다.

“이 나이 먹고 이런 대화라니, 정말 우습군!”

식연은 막사 문고리를 붙잡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기 짝이 없어!”

식연은 성큼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식연의 등 뒤에서 막사 문이 세게 닫혔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몇 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그제야 미간 사이의 격한 분노가 가라앉았다. 식원이 식연의 뒤에 섰다. 군영 문 앞에서 돌아온 여귀진도 불안한 듯 식원을 응시할 뿐 식연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두 사람이 식연을 따른 지도 몇 해가 지났지만, 그가 이렇게 격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화를 내도 조용히 사람을 압도했지 얼굴에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식연은 그제야 측근 둘이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채고는 자신이 약간 추태를 부린 것 같아서 뒤돌아 씩 웃어보였다.

식원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숙부, 아까 백 장군과 나누신 대화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들었느냐?”

“저와 여귀진 세자가 밖에 있었는데 몇 마디 들리긴 했지만 분명히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두 분이 싸우는구나 했지요.”

식원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숙부께서 이렇게 화내시는 건 처음 봅니다. 싸우실까 봐 걱정이 되더군요……. 만약 그러면 저희가 달려가 숙부와 함께 싸워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연해진 식연은 조카의 머리를 툭 치고는 웃으며 꾸짖었다.

“내가 희야인 줄 아느냐? 툭하면 검을 뽑아들고 싸우게? 철없는 금오위 소장군도 아니고 말이야.”

철없는 소장군. 이 여섯 글자가 무심결에 튀어나오자 식연도 흠칫 놀랐다. 이 호칭이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묵묵히 생각에 잠긴 그는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저희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어쨌든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입니다.”

여귀진이 말했다.

“장군과 대장군은 군의 귀감이십니다. 두 분이 말다툼을 한 것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거예요.”

여귀진은 잠시 머뭇하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원래는 점점 흐트러지고 있는 군심을 군율에 의지해 강제로 유지하고 있는데 통수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면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말하려 했었다.

식연은 오래도록 침묵하더니 여귀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들은 게 있다면 다 잊으십시오. 오늘 참으로 추태를 보였습니다. 백의가 쉽게 욱하기도 하고 입도 걸지요. 어렸을 때도 그를 만나면 언짢아지곤 했는데 이 나이를 먹고도 나아진 게 없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만 제가 한 말 중에서도 어떤 건 화나서 한 말이니 진짜로 여기시면 안 됩니다. 어떤 말은 진짜이긴 하나 아직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식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의와 오랜 세월 벗으로 지내면서 끝내 이런 일들로 다투게 되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그는 제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어리둥절한 여귀진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고개만 가로저었다.

“하실 말이 있습니까?”

식연이 물었다.

“제가…… 우연에게 들었는데…….”

여귀진은 우연의 이름을 말하려니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짓궂은 계집이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던가요?”

식연은 궁금증이 일었다.

“제가 항상 우연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우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평생이 걸려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고요.”

식연은 그 말을 곱씹는 듯 묵묵히 고개를 들어 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죽어버렸지요. 어떻게 해도 거울 속의 꽃과 달처럼 닿을 수가 없더이다…….”

촛불이 비친 벽이 어두운 붉은빛을 띠었다. 엽근은 대야 위에서 수건을 비틀어 짜고 손에 대 보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였다. 그녀는 침상 가에 옆으로 앉아서 수건으로 희야의 다리를 닦아주었다. 희야는 늑골에 부상을 입어 허리를 숙일 수가 없었기에 매일 엽근이 대신 닦아주었다. 여귀진은 벌써 깊이 잠들었는지 옆 이부자리에서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여귀진은 식원과 함께 종일 식연의 옆에서 급한 사무들을 처리했다. 녹초가 되어 막사에 돌아오면 곧바로 잠이 들었고 희야, 엽근, 어린 공주와는 몇 마디 나누기도 힘들었다. 원래 여귀진은 군에 동행해 경험을 쌓는 귀족 자제로서 전쟁을 참관할 뿐, 군 업무에는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식연은 여귀진의 신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반 군관처럼 부려먹었다.

그에 반해 희야의 생활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매일 조용히 누워 천장만 보았다. 소주 공주도 말주변이 없는지 매일 무릎을 끌어안고 자기 방 침상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듯 창문 너머로 막사 밖만 보았다. 그래서 엽근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그녀는 보통 희야 맞은편에 있는 여귀진의 침상에 앉아 옷을 꿰맸다. 엽근은 손놀림이 능숙했다. 희야는 복잡한 바느질법을 이해해 보려는 듯 바늘을 쥐고 옷감을 뚫고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엽근의 손가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희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엽근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침묵한 채로 오랜 시간 있어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차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군영 내에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희야는 땅을 밟을 일이 전혀 없어서 발도 무척 깨끗했다. 엽근은 간단히 닦아주고 수건에서 예리한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촛불 아래 칼몸에서 한 줄기 빛이 빠르게 스쳤다. 희야는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는 통증에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으나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엽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엽근은 칼을 손에 든 채 그대로 경직되었다. 촛불 아래 빛나는 작은 칼이 희야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대치했고 희야의 몸은 차츰 경계심을 풀었다. 엽근은 희야의 한쪽 발을 안아 제 다리 위에 놓고 작은 칼로 너무 길게 자란 발톱을 조심조심 깎아냈다. 희야는 고개를 숙여 칼을 든 엽근의 손을 보았다. 바느질을 할 때처럼 손놀림이 민첩했다. 엽근은 살을 자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촛불 아래 발톱이 하나씩 엽근의 치마 위에 떨어졌다.

엽근은 한쪽 발의 발톱을 다 자르고서 다른 한쪽 발을 안아 들고 제 허벅지 위에 놓았다.

“이런 일 하기 억울하지 않아?”

희야가 불쑥 말을 건넸다.

엽근은 깜짝 놀라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역적의 딸에 포로인데 억울할 게 뭐 있어요. 장관을 모시기 전에 공주를 모셨어요. 다 사람을 모셨는걸요.”

“난 공주도 아니고 장관이라고도 할 수 없어.”

희야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군인이야. 이 관직도 출정 전에 장군께서 높여주셨어. 공을 세우고 개선하지 못하면 돌아갔을 때 도로 내려간대.”

“저는 군영의 일들은 몰라요. 그냥 사람을 돌볼 뿐이에요. 장관도 환자니까 누군가가 돌봐야죠.”

엽근은 고개를 숙이고 발톱을 깎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촛불이 엽근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얼굴에 난 가느다란 솜털에 광채가 남실거렸다.

“공주를 돌본다고 더 귀하고, 환자를 돌본다고 더 괴로운 것도 아니에요. 그저 아버지의 죄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고 저희 부녀가 평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엽근은 희야의 발을 이불 안에 도로 넣고 치마 위에 떨어진 발톱을 털어냈다. 수건을 팔에 걸친 뒤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던 엽근이 문가에서 희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 나이에는 말이죠. 좀 무례한 말 같아 좀 그렇지만, 장관은 애처럼 보여요.”

희야는 순간 눈썹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는 듯했으나 표정이 얼어붙더니 불같이 분노하지는 않았다. 엽근은 희야를 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방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희야 혼자만 남았다. 그는 멍하니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희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엽근은 대야를 들고 막사 입구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대야를 밖에 놓은 뒤 돌아와 문을 닫았다. 그녀는 죄인이었다. 밤에는 막사 밖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밤에 소변이 마려울까 봐 해가 지면 물도 안 마셨다.

막사 안을 밝히는 불빛이라곤 엽근이 들고 있는 등잔 하나가 다였다. 엽근은 가볍게 입으로 바람을 불어 등을 끄고는 문에 등을 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루의 피로를 모두 뱉어내려는 듯한 길고 긴 한숨이었다.

주위는 매우 적막했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별빛과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엽근의 왼쪽 방에는 옥석처럼 맑고 조용한 공주가 자고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소년 군관 둘이 있었다. 이제 모두가 잠들었으니 엽근은 누군가를 시중들기 위해 조심스럽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 있는 지금, 그녀는 시녀도 포로도 아니었다.

엽근은 천천히 쭈그리고 앉아서 온 바닥을 가득 채운 달빛을 보며 넋을 놓았다. 그녀는 물을 손으로 움켜 뜨는 것처럼 천천히 두 팔을 바닥으로 뻗어 달빛 속에 넣었다. 엽근의 두 손이 달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손아귀와 손가락 안쪽의 굳은살이 드러났다. 여귀진과 희야는 엽근의 손바닥에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또한 이 여인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두 손을 펼쳐 보인 적이 없다는 것도 몰랐다.

검은 인영이 엽근의 몸 위로 드리워지며 달빛을 가렸다.

엽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였다!

엽근은 창밖의 인영을 보았다. 그곳에는 갑자기 새카만 그림자가 하나 늘어 있었다. 그자는 두꺼운 검은색 외투를 덮어쓰고 쓰개로 얼굴도 전부 가렸다. 유일하게 보이는 눈은 너무나도 밝았다. 어둠 속에 일렁이는 두 개의 촛불 같았다. 화염 속의 두 눈동자는 희미한 금홍색을 띠었다. 불에 녹은 금속 같은 색깔이었다.

엽근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백 근의 무거운 물건에 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단히 문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몸 안의 피가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손끝부터 시작해 얼음이 얼어붙는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문 너머로 서로를 응시했다. 한참 뒤 막사 밖의 사람이 손을 들더니 보따리 하나를 막사 안으로 던졌다.

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돌연 사라지는 것을 느낀 엽근은 보따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가 날까 봐 냉큼 달려가 받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 인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별빛과 달빛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방금 전의 모든 것이 환상 같았다.

엽근은 손에 든 보따리를 만져보았다. 실재했다. 그녀는 벌벌 떨며 보따리를 열었다. 안에는 갈고리처럼 날이 구부러진 비수가 들어 있었다. 칼몸은 청동색이었고 그 위에 난 오래된 무늬는 주사(朱砂) 색깔의 광석 염료로 채워져 있었다. 으스스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엽근은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비수에서 약간의 온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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