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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궁지 (1)
9월 스무하루. 황성, 계궁.
“날씨가 참 음침합니다.”
녕경이 구들방의 창문을 차례로 열며 말했다.
“저처럼 눈이 먼 사람도 느껴지는군요.”
“창문 닫아!”
와탑에 옆으로 누워 있던 장공주가 나직하게 호통쳤다.
“찬바람이 들어오잖아. 날 죽일 셈이냐?”
와탑 주위로 4개의 화로가 놓여 있었지만 바람의 한기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얇은 비단 치마를 입은 장공주는 여전히 한여름 냉궁에서의 차림이었다.
뇌벽성이 장공주의 맞은편에 반듯하게 앉아 점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공주께서 초조하시군요.”
“네, 초조합니다. 지난번 벽성 선생과 만나고 또 열흘이 흘렀습니다. 벌써 보름이 족히 흘렀는데 백의는 상양관에 웅크린 채 나오지 않고 있어요. 리군도 성을 공격하지 않고요.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점점 종잡을 수가 없군요.”
장공주는 초조한 마음을 인정했다.
“백의는 나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북쪽은 황실의 영지로 노(弩)를 든 우림군이 있고, 남쪽에는 행시가 떼 지어 있으니까요. 지금 그에게는 싸울 수 있는 군사가 2만 명뿐이라 출정할 힘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현이 공격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선택입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행시를 공격한 뒤 다시 성을 공격하겠습니까? 행시는 이성이 없는 것들입니다. 사현이 가면 그것들은 사현을 공격할 겁니다.”
뇌벽성이 눈을 떴다.
“장공주께서는 차분하게 기다리십시오. 지금의 백의와 비교하면 저희는 구름 속에 있으니까요.”
“백의가 버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뇌벽성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못 버팁니다. 제 계산대로라면 백의는 식량이 없어 이미 수백 필의 군마를 죽였을 겁니다. 그것이 시고임을 알았으니 이전에 죽은 말은 먹지 못할 겁니다. 처음에 백의에게는 대략 1만3천 필의 군마가 있었으나 전쟁 후 이삼천 마리밖에 안 남았으니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니, 매일 수십 마리를 죽여도 언제 다 죽이겠습니까?”
장공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뇌벽성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가 말을 다 죽이고 아사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말을 죽이는 것이 군인들의 사기를 얼마나 저하시킬지는 장공주께서도 짐작하시겠지요. 금세 백의의 수하들은 절망에 찬 군대가 될 것입니다. 투지가 없는 군대는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모래처럼 무너지게 되지요.”
뇌벽성은 손가락 하나를 들고 그 너머로 장공주와 눈을 맞추었다.
어느새 창문을 하나하나 다시 닫은 녕경은 따뜻한 차를 한 잔 받쳐 들고 장공주 와탑 옆으로 와 공손하게 올렸다.
“차로 피로를 푸십시오. 날씨가 몹시 우중충하여 지치기 쉽습니다. 오후에 비가 내리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뇌벽성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구름은 남쪽에서 온 듯하군요. 전사한 망자의 분노와 원한이 흩어지는 정신과 함께 하늘에 올라 구름으로 응집되면 색이 납과 같다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신 장공주는 그 말을 듣고 난데없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녕경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볼 수가 없어 안타깝군요. 그래도 벽성 선생의 말을 들으니 구름의 색깔이 연상됩니다.”
“백의의 분노와 원한이 지금 저 구름과 같겠지요? 건드리기만 해도 억수처럼 퍼부을 겁니다.”
뇌벽성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조금 더 분노하고 원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뇌벽성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더 강렬하게, 무너질 때까지…….”
그 시각 상양관. 하늘은 사람의 머리를 내리누를 듯이 낮았다.
연합군 통수들이 말없이 부상병 막사 안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이곳은 북대영 치중 부대에서 가장 좋은 막사였다. 그럼에도 빛이 잘 들지 않고 공기가 잘 안 통했다. 죽 잇대어진 방구들에는 짚과 얇은 이불이 깔려 있고 부상병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누군가는 누렇게 뜨고 누군가는 검푸르고 누군가는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신음했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장군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며칠 사이 날씨가 흐리고 비가 많이 내려 많은 부상자의 상처가 썩어 들어갔다. 약이 없으니 썩은 살을 도려내고 또 도려내도 효과가 없었다. 막사 전체에는 구역질나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정규는 더 보지 못하고 말없이 성큼성큼 떠나갔다.
백의는 계속 천천히 걸으며 안색이 좋지 않은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낯빛이 몹시도 창백했다.
요즘 백의는 급격하게 말라갔다. 양 볼이 우묵하게 패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식연은 오랜 벗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흰색 전포가 그리 넓지 않은 어깨에 걸쳐져 있었는데, 허리부분이 눈에 띄게 헐렁했다. 식연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들이 마침내 막사 안에서 걸어 나왔다.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늙은 의관은 조용히 백의를 흘긋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백의가 약재를 구해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막사 밖의 공터에 수십 명의 군사가 군마를 몰아 한자리로 모였다. 군마들은 몹시 똑똑했다. 여러 날을 연달아 말을 죽이자 이들도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에 힘없이 울부짖으며 쉬이 굴복하려 들지 않았다.
“오늘은 어찌 저리 많이 죽이느냐?”
백의가 작게 물었다.
“마초가 부족합니다.”
치중 부대 통령이 백의의 뒤에서 대답했다.
“지금 안 죽이면 굶어 죽게 되지요. 소금이 조금이라도 남았을 때 차라리 죽여서 절여두면 며칠은 먹을 수 있습니다.”
백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니 말들을 바라보았다. 털가죽은 광택을 잃었고 살도 많이 빠져 복부에는 가닥가닥 갈비뼈가 드러났다. 말들은 사람을 태울 수 없을 정도로 여위었다. 출정할 수 있는 준마 전부가 그러했다. 입자가 가는 곡식으로 사육하면 토실토실 살이 올라 번개처럼 돌격한다. 그러나 일단 질 좋은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둔한 마바리만큼도 버티지 못했다.
근위병이 찻잔을 가져와 장군들 손에 하나, 하나 건넸다. 지금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차뿐이었다.
찻잎 가루를 치우고 한 모금 들이킨 식연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고월의가 식연의 안색을 힐끗 보고는 입안의 차를 뱉어내며 말했다.
“수질이 나빠져 이상한 맛이 나네요.”
강무외가 돌연 촉각을 곤두세웠다.
“백 장군이 수원에 독을 쓴 방법을 누가 따라한 것은 아니오?”
백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은 대비해 두었소. 내 이미 못을 파 물을 저장해 두라 명령했지. 성안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먼저 검사한 후에 못에 붓는다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셔본 식연은 안색이 돌변했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러분, 나를 따라오시오.”
장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식연을 따라갔다. 식연은 매우 빠른 걸음으로 물도랑을 거슬러 올라갔다.
상양관 안에는 각 군영으로 통하는 돌 수로가 있어서 우물에 가 물을 길을 필요가 없었다. 물을 저장해 두는 못가에 닿기도 전에 왁자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사들 한 무리가 못 주위를 에워싸고서 대나무 장대로 물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있었다. 방금 전 찻물의 기이한 맛이 지금 입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맑은 저수지 안에는 창백한 시체가 담겨 있었다. 대략 이삼십 구였는데 모두 연합군 군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고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잠긴 눈동자는 더욱 까매져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정규가 옆에 있던 군사의 멱살을 잡았다. 그자는 순국 군인으로 용수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강한 군대가 수비하는 가운데 철통같은 상양관 안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상대가 독을 썼다면 그들 절반은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저는 모릅니다……. 모르겠습니다…….”
놀란 군사가 손을 내저었다.
“어젯밤에 사람들을 데리고 수질을 검사했습니다. 잠깐 선잠을 잤을 뿐인데, 일어나 보니 이상이 발견되었고요. 이미 각 군영에 사람을 보내 어젯밤 저장한 물은 마시지 말라고 통보했습니다!”
“늦었다!”
정규가 분노해 군사의 뺨을 후려쳤다.
“나도 마셨는데, 다른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시체를 이곳까지 가져와 쥐도 새도 모르게 저수지에 넣었으니 독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겠군. 상양관 안에 적의 첩자가 있소.”
강무외도 안색이 몹시 안 좋아졌다.
한데 비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독은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수만 명에게 독을 쓰는 일은 극히 어렵소. 백 대장군이 이렇게 수로를 설치한 데는 이유가 있소. 물이 계속해서 흐르면 독소를 물에 풀어도 계속 흘러가고 축적되지 않거든.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백 대장군이 성을 공격할 때 상양관 안에 푼 것은 가벼운 독이오. 낭독, 대극, 오두 같은 것은 제때 토해내면 해독이 되지. 이런 가벼운 독도 약재로 제조하려면 수천 근에 달한다오. 첩자가 혼자 섞여들 수는 있겠지만, 상양관 안에서 수천 근의 약재를 찾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오.”
식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에 능한 식연은 못 바닥까지 헤엄쳐 들어가 죽은 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가슴을 관통한 쇠못으로 못 바닥의 돌 틈에 박혀 있어서 떠오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식연은 그중에서 한 시체의 손을 잡고 눈앞으로 가져와 살펴보았다. 엄지에는 쇳빛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윗면의 매 휘장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옆 시체의 손도 집어 들었다. 역시 엄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 번째 시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보지 않고 숨을 참은 채 묵묵히 바닥의 시체를 세어보았다. 총 23구였다. 그가 입수한 명단에는 연락 가능한 천구 계승 무사가 1천80명이 있었다. 이제 남은 수는 1천57명이었다. 누군가가 연합군 내에서 이들을 찾아내 죽이고 저수지 깊은 곳에 못 박았다. 그리고 사후에 천구 반지를 엄지에 끼워 이들의 신분을 명시했다. 천구는 반지를 자기 주변의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두지 절대로 표식을 대놓고 몸에 지니지 않았다. 식연은 생각했다.
‘시위로군. 우리의 맥을 끊겠다는 것이야!’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 잠겨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그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군들은 물가에서 식연의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한참 뒤 식연이 물속에서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슭까지 헤엄쳐 온 그는 흠뻑 젖은 도포를 털어냈다.
“어젯밤 갓 죽은 자들이오. 한 번에 저리 많은 사람을 죽이다니 상대측 첩자는 수완이 아주 좋소.”
식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단해, 아주 대단해!”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고월의의 물음에 식연이 답했다.
“시체를 수습하고 경계를 강화해야지. 저들의 첫 시위요. 우리의 사기를 무너뜨리려는 거요.”
식원이 제 숙부 곁을 따라가는데 불쑥 백의가 극히 낮은 목소리로 식연의 귓가에 나직하게 외쳤다.
“첫 시위지. 천구를 향한 진월의 시위! 놈들은 자네들을 향해 온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