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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호랑이의 전쟁 (5)
국주는 고개를 떨구고 강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여인으로서는 여전히 한창때였다. 그녀는 만개한 해당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해당화는 으스대지 않고 늘 지금처럼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집 센 소녀 같았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국주를 바라보았다. 시녀는 국주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국주는 극도로 분노했을 때 도리어 조용했다. 그저 입을 꼭 다물 뿐. 이를 악물고 있는 탓에 보드라운 뺨에는 날카로운 선이 생겼다.
계단 아래의 신하들도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몰래 눈짓만 주고받았다.
“댈 핑계들은 다 댔는가?”
국주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대신 하나가 대열에서 나왔다.
“국주, 소신들의 의견은 그러하옵니다. 부디 나라를 생각하시어 숙고해 주십시오. 리군은 이미 달아났고 영무예도 다시 구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초위국은 리국과 인접해 있으니 매우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국주께서 백 대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낸다면 병력에 구멍이 생길 것인데 그 틈에 리군이 쳐들어오면 어찌 대응하겠습니까? 백 대장군은 지금 매우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 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상양관 내부 상황도 그저 단편적인 정보일 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잖습니까. 국주께서 국토의 수비를 포기하고 정세가 불분명한 전장을 구하고자 하시는 것을 소신들은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국주께서 고집하신다면, 저희도 목숨을 걸고 간(諫)할 것이옵니다.”
대신은 눈썹을 치키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대들 모두 그리 생각하는가?”
국주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아주 잠깐 말이 없던 신하들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동시에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허리 숙여 절했다.
“저희 모두 로중개 대인의 말이 충군애국의 책략이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위해 나라를 위태로운 국면에 빠뜨려서는 아니 됩니다.”
신하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진부한 대답을 던지면서 자신들은 이미 이 일에 합의를 도출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재궁에 소집되기 전, 그들은 이미 무엇을 말할지 명확히 알고 있었고 전혀 망설이지도 않았다.
로중개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우리 초위국의 군사(軍事)는 줄곧 백 대장군 혼자 장악하고 있었지요. 지금 국주께서 출정시킨다 한들 누가 군을 이끌는지요? 백 대장군 혼자 훈련시킨 강병을 누가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군을 지휘할 사람이 있네.”
국주의 말에 로중개는 흠칫 놀랐다.
“안평군 말이십니까? 안평군이 무예에는 능하지만, 군을 이끄는 큰일에는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안평군은 국주의 부군으로 체구도 건장하고 지체도 높은 명문가 자제였다. 로중개는 몰래 뒤편의 대신들을 흘끗 보았다. 지금 로중개에게 대신들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군을 이끌고 출정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로중개는 현재 국주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안평군밖에 없었다.
“아니, 안평군이 아니네. 날세.”
국주가 뒤돌아 비단 병풍을 젖히고 아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 친히 군을 이끌고 출정할 것이네!”
국주는 몸을 돌려 후당으로 들어가 버리며 더 이상 신하들에게 어떤 반박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신하들은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리며 재궁을 나섰다. 재궁 대문을 나와 각자의 마차로 향할 때에서야 그들의 목소리는 커졌다. 몇몇 대신이 약간 걱정하며 로중개에게 다가갔다.
“로공, 국주께서 친히 출정하시면 정말 골치 아파질지도 모릅니다.”
그중 젊은 신하가 말했다.
“골치?”
로중개가 차갑게 웃었다.
“입으로는 누군들 호언장담을 못 하겠소. 군을 이끌고 전쟁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혈연으로 공작의 신분과 토지를 물려받은 일개 여인이 뭘 알겠소? 상양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체를 보자마자 놀라 대성통곡할 거요.”
젊은 신하는 그래도 걱정이 되어 뭐라 말을 더 하려 했다.
로중개가 그의 팔을 툭툭 쳤다.
“뭐가 걱정이오? 지금 도성에 백의는 없소. 한데 이 초위국에 우리가 두려워할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이오?”
로중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백의가 정말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르겠구려.”
신하들은 돌연 말이 없어졌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똑같은 요괴가 이들의 몸속에서 동시에 깨어난 것처럼 괴상한 광경이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낙엽과 함께 휘몰아치며 재궁의 우뚝 솟은 대문으로 불어왔다. 신하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완전 군장을 갖춘 측근 한 사람이 성큼 달려와 로중개를 맞이했다.
“대인, 황성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중요한 서신이 있다며 대인께 직접 훑어봐 달라 했습니다.”
순간 어리둥절했던 로중개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하당국, 자환궁. 해 질 무렵.
백리경홍이 손에 든 붓을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향, 탁발 장군을 들라 하게.”
내감 장향이 종종걸음을 나가고 잠시 후 계단 아래에서 반나절을 서 있던 탁발산월이 들어왔다.
탁발산월은 칼을 쥔 채 예를 올렸다.
“제가 온 이유를 국주께서는 이미 아시겠지요.”
“알다마다. 몰랐다면 장군을 만나주지도 않고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하지 않았겠지.”
백리경홍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불을 켜라.”
내감이 조심조심 초에 불을 켜고 잔 꽃무늬 유리 갓을 씌워 백리경홍 앞의 탁자에 놓았다. 산산이 흩어지는 불빛 속, 백리경홍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탁자를 탁탁 치고는 몸을 일으켜 문예 국주가 남긴 서예 병풍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탁발산월을 등진 채 오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봐온 오래된 병풍을 감상하는 듯했다.
“부디 출병을 허락해 주십시오. 빠를수록 승산이 높아집니다.”
탁발산월이 고했다.
백리경홍은 돌아서지 않고 살짝 고개만 가로저었다.
“탁발 경과 식 장군은 오랜 세월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는데 그대는 왜 출병을 재촉하는가? 두 사람은 이 나라의 기둥일세. 탁발 경이 나를 위하는 마음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을 가겠다니 나로서는 영광이네만 정적을 구하기 위해서, 게다가 거듭 재촉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듯한데 경은 이를 어찌 설명할 텐가?”
“군인의 승부와 나라의 승부는 같은 것입니다. 저는 하당에 출사하였으니 하당을 위해 동륙의 전세(戰勢)를 고려해야 하지요. 만약 식 장군이 이번에 리군에 몰살당하면 동륙 전체에 영무예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뇌기의 쇠발굽이 동륙 땅을 짓밟는 것을 지켜보며 가만히 앉아 영무예의 칼이 우리 목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요!”
탁발산월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저는 식 장군을 정적이라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백리경홍은 몸을 돌려 무쇠 인간 같은 만족 무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또 한 번 긴 탄식을 뱉었다.
“식 장군이 우리 하당에 얼마나 중요한지 내 어찌 모르겠는가. 상양관에 이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출정하고 싶었을 정도라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네. 탁발 경은 내가 명령만 내리면 된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말이네, 그대는 내 권력이 무한하다 생각하는가? 내가 명령을 한 번 내릴 때마다 저울질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을, 부득이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탁발산월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부득이한 경우라니요? 우리 하당은 동륙의 5대 강국 중 하나입니다. 풍요롭기로는 제일가지요. 황실 이외에 국주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있네. 그런 사람이 있어.”
백리경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서신을 두 통 받았네. 두 사절이 거의 비슷하게 남회에 도착한 모양이야. 한 통은 황실에서 온 것이고 다른 한 통은 백리 가문의 가주에게서 온 것이네. 황실에서는 왜 상양관에서 시란이 일어났으며, 군의 살기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한 것은 아닌지, 혹은 근왕군의 행동이 어질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문책했네. 본가에서는 출병을 잠시 유보하고 상황이 한 단계 명확해지기를 기다리라 했고.”
“본가에서 서신이라니요?”
탁발산월은 매우 놀랐다.
백리 씨는 대윤의 7대 가문에서 황족인 백씨에 버금가는 대가문으로 본가와 몇몇 주요 분가의 가주들은 다 주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백리 본가는 분봉 받은 토지 없이 황실에 충성을 다했으나 마지막 백리 가문의 직계 후손인 백리장청이 십수 년 전 역모를 꾀한 죄로 황실에 처형되었다. 하여 현재 백리 가문에는 소위 ‘가주’가 없었다.
“이 일은 식 장군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오늘 내가 예서 말한 것은 탁발 장군만 알고 있게.”
백리경홍이 천천히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탁발산월을 응시했다. 등불에 비친 눈동자가 눈부시게 환했다. 눈동자 깊숙이에서 기이한 빛이 쏘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탁발 경은 만족 출신이라 동륙 왕조의 역사는 잘 모르겠지. 나도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네. 다만 탁발 경, 동륙의 권력은 제후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네. 몇몇 큰 가문은 남모르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극히 엄격한 규율로 가문을 단속하니 일국의 공작이자 완주를 다스리는 나라고 해도 가문 장로의 뜻을 어길 수는 없네. 우리 하당이 그간 황실의 신임을 얻고 많은 지원을 받은 것도 본가의 활동과 무관하다 할 수 없어.”
백리경홍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백리 가문의 규율은 백리장청 한 사람의 죽음으로 때려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우리 가문은 700년간 동륙 세가(世家)의 우두머리로 세력이 강대하지. 황실이라 할지라도 뿌리 뽑지 못할 만큼!”
탁발산월은 놀랐다. 마음속 깊숙이 한기가 스미는 듯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볼 테니 탁발 경도 잘 생각해 보게.”
백리경홍이 나직하게 말했다.
“첫째, 상당국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가지고 하당과 분리될 수 있었던 데는 본가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네. 그 일은 나도 완전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그해 이미 출정까지 준비했으나 본가에서 친히 중재에 나서는 바람에 우리 하당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본가의 계획대로 황실도 상당국에 작위를 봉하는 조서를 내렸어. 이 일은 강제로 정리되었으나 우리 하당은 나라가 둘로 나뉘며 세력이 크게 약해졌지. 그러나 가문의 율령이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네. 나중에 본가에서도 당초 우리에게 약속했던 바를 실행해 막대한 이익을 주었으니 우리 하당의 발전은 곧 본가의 은혜 덕분이라 할 수 있지. 둘째로 탁발 경은 그대가 사절로 북륙에 다녀온 일을 기억하는가?”
탁발산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그 일 또한 본가의 지시였네. 우리 하당국은 본가의 명령을 집행한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야.”
백리경홍은 탁발산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 아니네. 동륙의 바둑판에서 우리 역시 바둑돌이야!”
백리경홍은 가볍게 유리 등갓을 돌렸다. 등갓이 정교한 바퀴 위에서 회전하며 백리경홍의 얼굴에 빛을 흩뿌렸다. 수많은 꽃이 흩날리듯 빛이 빠르게 움직였다. 백리경홍은 탁발산월을 직시했다. 이어지는 침묵에는 무궁무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후세의 사학자들은 상양관 일전 중 한 가지 의문점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윤 성제 3년 9월 닷새, 이변이 일어난 그날 밤부터 10월 이레까지 한 달간 위기에 빠진 제후국 연합군을 구하러 전장으로 달려간 유효한 지원군은 하나도 없었다.
자세히 고증해 보면, 각국의 지원군이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다양했다. 순국의 용맹한 풍호철기는 화엽의 지휘에 따라 당양곡에서 출발, 리국 좌상 류문지의 대군을 격파했지만 왕역을 통과해도 좋다는 황실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지리적으로 먼 진북국은 상양관까지 지원할 역량이 없었다. 휴국과 진국은 본래도 세력이 그리 강한 제후는 아니어서 단시간에 힘 있는 군대를 조직하기 어려웠다. 초위국은 2만 지원군이 신속하게 출발했으며 백순 국주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의 군대가 백의의 대군을 배웅했던 모합탄까지 밀고 나갔을 때, 그녀는 병거(兵車) 안에서 발 너머로 적홍색 가죽 갑옷을 입은 남만 군사 1만 명이 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적색의 거대한 뱀 같은 진영이 그녀 앞에 가로놓였다. 리국의 장박 군단이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리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장박은 공격하지 않고 진용을 정비한 채 기다리기만 했다. 초위국 국주도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암암리에 전한 바에 따르면 이 여인은 아군의 절반에 불과한 숫자의 적려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대치하는 매일 밤 눈물로 지새웠다고 한다. 초위국의 그 어떤 중신도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혈통이 고귀하고 용모가 아름답기만 한 여인은 수하에 용맹한 장수 하나 없었고, 그녀는 2만 정예병을 어떻게 지휘해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
가장 이상한 점은 10월 이레에 출발한 하당의 지원군이었다. 삼군통수 탁발산월이 직접 이끄는 지원군은 준비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장장 1개월 동안 동륙 4대 명장 중 하나인 탁발산월은 마초와 군량을 모으고 수레와 마바리를 준비하는 등의 일만 했다. 그리고 탁발산월의 군대가 절반 정도 갔을 때, 상양관 최후의 처참한 전쟁은 이미 끝이 났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대윤 제국의 장성들이 한꺼번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방대한 제국은 그들에게 어떤 쓸모 있는 지원도 해 주지 못했다.
윤 성제 3년 9월 열엿새. 상양관 하늘은 으스름했다. 백의는 성 꼭대기에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황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제후국 대군의 통수들 전부 그 자리에 있었다. 성벽 위로 6국 군사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거대한 방진이 천천히 밀고 나오며 500보 앞까지 다가와 멈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방진의 군사들은 예외 없이 전부 화염장미 깃발을 들고 있었다. 군사들의 투구와 갑옷은 반짝반짝 빛났고 장비는 정교하고 우수했다. 황실 군사들은 상양관 안의 근왕군에 알리지도 않고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마름쇠를 뿌렸다. 나무 울타리 뒤에서는 2만 군사가 노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노는 남쪽의 상양관 성문을 향했다.
“하당의 지원군도, 초위의 지원군도 오지 못하고 화엽의 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했는데 이들은 왔구려.”
강무외가 나직하게 말했다. 식연이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잊힌 모양이오.”
“아닙니다. 잊히지 않았어요. 그들은 우리를 무척 신경 쓰고 있습니다.”
고월의가 저 멀리 진을 친 황실 군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작정하고 온 것입니다. 저들의 노를 보십시오. 평범하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맞서 돌격한다면 우리는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겁니다.”
“정면으로 돌격한다?”
식연이 냉소했다.
“우리가 황실의 우림천군과 금오위를 상대로 돌격할 수 있겠소?”
“빌어먹을 황실이고 나발이고…….”
뭐라 말하려던 정규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힘껏 발만 구르고는 뒤돌아 떠나갔다.
“어쨌든 우리를 사지로 내몰지는 못할 겁니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따질 겨를이 없겠지요.”
고월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 안의 아주 먼 곳에서 군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고월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병이자 정규처럼 말을 사랑하는 고월의는 말이 죽어가는 소리임을 알았다. 그들은 이미 마지막 식량을 다 소모했다. 이제 군량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군마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마초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식연이 입을 열었다.
“황실의 사절단은 적시에 도망쳤구려. 황실이 우리 뒤에 진을 쳤는데 지시 내려온 바는 없었소?”
“퇴각하지 말고 어떻게든 상양관을 사수하라……. 행시 변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라 명확히 조사하기 전까지 우리 군은 상양관을 떠나서는 안 되며 천계에 불길함을 가져올 수 있으니 황성 입성은 더욱 불가하다.”
백의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내가 받은 명이오.”
“그것도 명령이오? 이런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 거요?”
강무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여러분 모두 이곳에 갇혀 있지만 전서구로 자국 국주의 서신은 받아볼 수 있지 않소. 내 감히 묻겠소. 지금 어느 국주가 우리에게 북문을 열고 황실 대군을 공격하라 하더이까? 아니면 성을 버리고 도망치라 허락한 국주가 있소?”
백의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장군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러니 우리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의 주상이든 황실이든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하길 바라고 있지. 우리에게는 버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소.”
백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령 지금 모두가 우리의 적으로 변한다고 해도 말이오!”
“정말 동륙의 명장들을 한자리에서 죽이려는 자가 있나?”
식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쉽지 않을 텐데.”
식연은 자신의 검자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눈빛이 횃불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하고 싶은 자는 먼저 우리가 어떻게 명장이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