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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호랑이의 전쟁 (4)
말을 달려온 전령관이 사성의 뒤에 섰다.
“사 장군, 수하들에게 명령하십시오!”
사성은 오만한 금오위 군관을 흘긋 보고는 냉담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군사들은 땅에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천기노에 화살을 얹었다. 노 8천 자루가 평평하게 들어 올려졌다. 2만 4천 대의 화살이 언제든 쏘아져나갈 수 있었다.
사성은 마지막으로 전령관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대로 발사해도 정말 괜찮은가?”
전령관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경계를 넘는 자는 모두 역적입니다! 내가 된다면 되는 겁니다! 우림상장군께서 내게 명하셨습니다!”
사성은 전령관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 없네. 나는 자네에게 물었고, 자네는 그래도 된다고 답했으니 모든 책임은 자네가 져야 할 것이야! 그뿐이네.”
전령관은 흠칫 놀랐다.
사성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원학의 말발굽이 경계비를 넘었다. 이들 풍호군은 이미 적려처럼 황실의 영지에 발을 들였다. 사성은 검을 휙 뽑아 전방을 가리켰다.
“발사!”
2만 4천 대의 쇠 화살이 거대한 울림과 함께 메뚜기처럼 곧게 쏘아져 나갔다. 쫓고 쫓기던 양군의 대오는 모두 넋이 나갔다. 원학은 우림천군이 자신들에게 공격을 감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더욱 저런 물건에서 쇳물처럼 무시무시한 것이 발사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학의 앞에 있던 적려가 순식간에 집어삼켜졌다. 그는 몸을 젖혀 말에서 굴러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원학보다 아주 조금 늦었을 뿐이었다. 원학의 군마가 가슴에 화살을 맞았다. 쇠 화살은 말 꼬리도 구분되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말의 가슴과 목, 눈 전신을 꿰뚫었다. 원학은 바닥에 엎드린 채 가장 아끼는 군마가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울부짖다가 비틀비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말의 가슴에 난 상처에서 분출된 핏덩어리가 수 척 멀리까지 뿜어져 나갔다. 말은 이미 심장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말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미 멀어버린 두 눈을 부릅떴다. 제 주인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는 버티지 못하고 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원학은 다리에만 한 발을 맞았다. 그러나 그 화살의 힘은 풍호 기병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연강 갑옷을 완벽하게 관통했다. 원학은 다리 힘줄도 꿰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제 말에게로 기어갔다. 주위는 온통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형제들이었다.
“장전!”
사성이 명령했다.
군사들은 두 번째로 화살을 천기노에 얹었다.
사성은 도발하듯 활짝 웃고 있는 전령관을 쳐다보았다.
“왜, 전령관은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가? 아주 웅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나 보지?”
전령관은 사성의 말속에 숨은 가시를 깨닫고 안색을 굳히며 그를 흘겨보았다.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다만 어느 날 우리가 그리 된다 해도 똑같이 아름다울 겁니다!”
사성은 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조준!”
전장의 풍호군들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 넋을 잃었다. 철기병들은 이내 분노했다. 높은 곳에서 보니 전장의 판세가 돌연 바뀌었다. 흩어져 적려 패잔병을 쫓던 막강한 군대가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 날카로운 화살 같았고 그 화살의 끝은 전부 우림군을 향했다.
말을 달려 높은 곳에 올라간 화명은 말없이 활을 쥐고 있는 부친을 보았다. 화엽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명령을 전달하는 활을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얼굴은 면갑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화명이 조용히 화엽을 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감히 그를 건드릴 수도 없었다.
“나는 괜찮다.”
화엽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활시위를 당겨 하늘을 향해 연달아 향전을 발사했다. 퇴각을 알리는 화살 소리가 재차 하늘을 지나가고 질주하던 풍호군이 하나, 하나 멈추어 섰다. 고지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두 눈은 시뻘겠다.
그러나 그들은 군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전장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온 들판을 뒤덮은 철기병들은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선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철기병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맞은편 왕역의 경계에 마지막 전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원학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도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장군! 보이십니까? 보이십니까! 형제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원학은 소리 높여 포효했다.
“장군은 아직 살아 계십니다. 장군만은 아직 살아 계십니다!”
“원학…….”
화엽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발사!”
사성이 명을 내렸다.
폭우처럼 퍼붓는 쇠 화살이 원학의 등 뒤로 쏟아지며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화엽은 저 멀리에 있는 원학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미 죽었음에도 곧게 서 있었다. 군도를 땅에 받치고 제 가슴을 괴어 죽기 전 자신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는 종말의 날 기념비처럼 외로이 전사자들 속에 서 있었다. 화명이 숨을 쉬기가 버거울 만큼 공기가 무거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화엽이 고개를 쳐들고 포효를 내질렀다.
당양곡 어귀가 화엽의 포효에 들썩였다. 먼 곳의 우림천군도 무시무시한 진동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포효는 잠시 지속되었고, 멈추었을 때 화엽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화엽은 말을 몰아 떠나갔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이 호랑이가 가장 비분한 때이겠지?”
사성은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화엽이 철수했습니다! 그가 철수했어요! 우리가 이겼습니다.”
전령관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방금까지도 화엽이 군을 지휘해 진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뻐하긴 이르네.”
사성이 그를 보며 차갑게 조소했다.
“호신(虎神)의 척후는 매우 유명하지. 그는 사람을 보내 우리 둘의 이름을 알아내고 그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죽여야 할 살생부에 우리 이름을 넣을 것이네. 추호 화엽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사성은 전령관의 굳어진 미소를 보았다. 파리를 삼킨 것처럼 썩은 전령관의 얼굴을 본 그는 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9월 열하루. 황성, 계궁.
장공주는 와탑에 가로 누워서 전보를 들고 큭큭 가볍게 웃었다.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유백색 얇은 비단을 걸쳤는데 피부가 반쯤 비쳤다. 가슴 부분은 반라였고 비단 치마 아래로는 맨 종아리를 드러냈다. 백리녕경은 와탑 가에 앉아 장공주를 안마하고 있었다. 뇌벽성은 바로 맞은편에 앉아 나무 인형처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눈앞의 호사스러운 광경에는 눈과 귀를 닫았다.
장공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노인에게 점점 익숙해져 갔다. 심지어 녕경을 끌어안고 뒹굴 때도 애써 뇌벽성을 피하지 않았다. 음탕한 본성과는 별개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공주가 이자를 피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눈에 뇌벽성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뇌벽성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구름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모종의 강한 신념만 존재했다. 뇌벽성이 장공주를 볼 때면 장공주는 자기가 투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노인은 희노애락이 없었다. 권력과 욕망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도 단 하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병사들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네요. 그들에게 돈을 들인 보람이 있군요!”
장공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벽성 선생, 어제 당양곡 어귀의 접전에서 아군이 크게 이겼답니다. 화엽은 분노했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더군요. 늙은 호랑이는 아마 답답해 죽을 겁니다!”
“화엽은 공격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화살이 풍호의 철갑을 꿰뚫을 수 있으니 꺼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우리 군대가 공교롭게도 그와 적려가 접전을 벌인 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적잖이 피해를 입은 상태이고 아군은 신예 부대이니 화엽은 자기 휘하 병사들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제 화엽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니 우리는 그 힘을 상양관에 집중하면 됩니다.”
“벽성 선생,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장공주가 몸을 일으켜 책상다리를 하고 반듯하게 앉았다. 그녀는 녕경에게 안마를 그만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동륙에서 백의를 구할 수 있는 자는 세 명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화엽이고, 나머지 둘은 장공주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초위국 국주 백순과 하당국 국주 백리경홍!”
“맞습니다.”
뇌벽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위와 하당 양국은 백의를 지원하기에 아주 수월한 세력과 지위를 갖추고 있지요.”
장공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벽성 선생은 백의의 숨통을 끊으려는 겁니까? 그건 쉽지요. 아주 쉽습니다. 그 점은 제가 보장하지요. 백의는 절대 양국에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할 겁니다.”
“장공주께 방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뇌벽성이 눈을 뜨고 말을 이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망자를 일으켰을 때 백의가 그것들의 첫 공세를 막아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백의가 죽지 않는 한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술(神術)이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있으나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백의는 그 허점을 알아챌 수도 있는 사람 중 하나이고요.”
뇌벽성이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색 옷을 입은 사절의 말이 석양 아래 빠른 속도로 청의강 부교를 건넜다. 멀리 산간 분지에 숨어 있던 도성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의강은 건수강의 한 갈래로 길게 이어진 강줄기는 월주와 완주의 경계를 지나 바다로 모여들었다.
초위국은 수량이 풍부하고 흐름이 완만한 강에 기대 나라를 세웠다. 청의강은 초위국에 물을 대는 주요 수원이자 동쪽의 리국에 대항하는 천연 요새이기도 했다. 청의강은 배를 타지 않으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넓었고 하류의 빽빽한 수로망1)도 마찬가지로 기병의 장애물이었다. 영무예의 주특기인 경기병 뇌격 전술도 이곳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했다. 게다가 초위국의 수도는 청의강 안쪽, 산간 분지에 세워졌다. 이 도시는 수로망 위쪽으로 자리한 탓에 도시 전체가 각기 다른 너비의 하류에 따라 나눠져 있었다. 백성들은 남성과 북성을 오갈 때도 자주 배를 타야 했다.
사절이 황실의 인신이 찍힌 행첩을 내보이던 그때, 재궁에서는 신하들을 소집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재궁은 초위국 공작의 궁전으로 하당국의 자환궁만큼 유명했다. 청의강을 등지고 장엄하게 우뚝 솟은 건물들은 웅장한 기개를 뽐냈다. 지금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청의강은 출렁이는 파도 위로 석양이 십만 조각의 금가루처럼 수면에 흩뿌려져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환히 빛났다.
창가에서 한 여인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고관으로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몸에 걸친 청색 비단 장포 자락을 1장만큼 길게 늘어뜨렸다. 뒤에서 시녀 하나가 그녀 대신 옷자락을 붙잡고 펼쳤다. 다른 궁녀 둘은 계단 아래 말없이 서 있는 신하들이 쉽게 국주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진홍색 장대로 그녀 뒤에 놓인 청색 병풍을 받쳤다.
* * *
1) 그물처럼 뒤얽힌 강과 호수와 지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