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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호랑이의 전쟁 (2)
준마가 울부짖으며 긴 갈기를 휘날렸다. 정규의 검은 백추련의 가슴까지 반 척을 남기고 멈추었다. 그 순간 정규는 고개를 들어 백마의 눈빛 가득 어린 두려움과 슬픔을 보았다. 그러나 말은 그를 보지 않고 다른 방향을 보았다. 정규는 백마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은 막사 입구에 선 백의를 보고 있었다.
백의는 멀리서 자신의 애마와 마주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정규는 백의를 보고, 또 백마를 보았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왼손으로 검을 쥔 오른손을 세게 쳐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백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식연이 뒷짐을 지고 막사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백추련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툭툭 치며 진정시켰다.
식연은 뒤돌아 백의를 보았다.
“우리 하당 기병의 군마부터 죽이게. 내 묵설이 죽기 전까지 부디 이 난관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내기를 바라네.”
장군들 모두 떠나가고 백의만이 묵묵히 막사 입구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백의가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왔다. 그는 백추련의 고삐를 잡고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너와 묵설 중에 한 마리를 죽여야 하면 식연은 누구를 선택하려나?”
백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네가 병이 났을 때 살리지 말 것을 그랬구나.”
9월 9일. 왕역. 우림천군 부풍 대영.
젊은 장군이 무장을 갖추고 군마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우림천군 2천 명이 포진하고 명을 기다렸다. 징집령은 어젯밤 전해졌다. 이렇게 긴급히 출정하는 일은 오래도록 없었기에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군사들은 놀라 어쩔 줄 몰랐고 100인 부대의 통령들도 자신이 없었다. 오직 장군만 침착했다. 그는 붉은색 긴 술이 달린 창을 지고서 허리춤의 술 단지를 만지작거렸다. 술 단지는 비어 있었다. 출정해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되었지만 그는 습관처럼 가지고 다녔다. 몸에 지니고 다닌 지 오래되어 없으면 어딘가 좀 허전했다.
“사성 장군이오?”
금오위 수령이 말을 타고 대영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4마리 말이 모는 수레 10대가 매우 급하게 따라왔다. 수레는 동유를 칠한 방수포로 덮어져 있어서 그 아래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신,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성이 말안장 위에서 허리를 숙였다.
“장공주께서 전원 무기를 바꾸라고 하명하셨소.”
“무기를 바꾸라고요?”
사성은 조금 놀랐다. 우림천군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제식 장비가 동륙에서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부 상급품이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출정 직전에 무기를 바꿔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묻지 마시오. 군사들에게 천기노(千機弩)를 받아가라 하시오. 총 2천 자루요.”
금오위 통령이 수레에 탄 마부에게 눈짓을 했다.
“천기노요?”
사성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황실 군대는 무기와 갑옷도 관례에 따랐다. 공급 가능한 무기는 공조부(工造府)에서 정한 규격과 격식에 따르며 절대로 이를 어겨서는 안 되었다. 또한 새로운 무기는 수년간 시험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배포하면 안 되었으니 전군에 장착하는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레의 방수포가 젖혀지고 가지런히 쌓인 노가 보였다. 온통 새카맣고 동유로 기름칠 된 것이 질도 매우 좋았다.
금오위 통령은 자기 허리 뒤에서 노를 하나 꺼내 사성에게 건넸다. 노를 손에 들자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급 목재로 만들었으며 공예 솜씨도 극도로 정교하고 세밀했다. 탄탄한 소 힘줄 현은 힘이 꽤 강해서 당기려면 손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러나 활을 든 손을 벌리는 각도와 활시위를 당기는 각도가 보통 노와 약간 달랐다. 가장 특별한 점은 화살을 얹어야 할 홈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노는 활시위를 나무함 안에 끼워야 했다.
금오위 통령이 허리춤에서 까만 쇠화살 3대를 뽑았다. 일반 화살의 절반에 못 미치는 길이였다. 그는 사성 앞에서 그것을 나무함에 끼우더니 사성에게 다시 건넸다. 그는 손짓을 해보였다.
“장군, 쏘아보시오.”
사성이 팔을 들어 대영 동측의 흙벽을 겨누고 활시위를 당겼다.
노의 몸체가 살짝 떨렸을 뿐 균형감은 매우 좋았다. 화살 3대가 차례로 전부 쏘아져 나갔다. 화살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흙벽에 박혔다. 미세한 재만 약간 튀며 꼬리 부분까지 박혀 들어갔다. 노를 받으려 줄지어 선 군사들은 새 무기에 매료되어 환호했고 벌써 노를 받아든 군사는 써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훌륭하군요!”
사성이 감탄의 한마디를 뱉었다.
“편리하고 힘도 있는 좋은 무기네요.”
“실용적이오. 힘으로 치면 자형장사보다는 한참 못 하지만 말이오. 그래도.”
금오위 통령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든 이 노를 손에 넣으면 별다른 훈련 없이도 바로 전쟁에 나갈 수 있소.”
“다른 명령은 없습니까?”
“사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나머지 9개 대대와 함께 출발하시오. 금오위 1만 명, 우림천군 1만 명, 목적지는 당양곡 어귀요.”
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양곡 어귀말입니까? 리군의 잔당이 아직 그곳에서 순국의 화엽 장군과 대치하고 있지요.”
“나머지는 도착해서 장군의 명에 따르면 되오.”
금오위 통령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이번에 해야 할 일은 매우 간단하오. 사 장군은 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렸고 그간 우림천군에서 진급도 매우 빨랐으니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거요.”
그는 사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또 한 번 승진할 기회요! 나는 다른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소.”
금오위 통령은 한 무리의 부하를 이끌고 질풍처럼 말을 달려 떠나갔다. 그동안 황성 금오위들은 돌연 활력이 넘쳤다. 각 계급의 군관들은 부풍대영과 여러 위소를 드나들며 황실의 군령을 전했다. 본래는 황실의 위엄을 보이는 의장 군대였으나 지금 위세를 부리며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황성 전군의 군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사성은 멀어져가는 금오위의 뒷모습을 보면서 묵묵히 소매에서 두 손가락 너비의 하얀 천 조각을 꺼냈다.
요사이 그는 이 서신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몰랐다. 글자 하나, 하나가 믿을 만한 내용인지 알고 싶었다. 지금 그는 속으로 이 서신을 다시 한번 읽었다.
“형님 전(前) 상서(上書): 갑작스럽게 연합군이 시란으로 상양관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운주에 전해지는 시고술이라는 술법으로 동륙에는 아는 자가 적습니다. 박학다식한 태복(太卜)만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시고는 혼을 삼키는 독충으로 시체에 사용하거나 산 사람에게 쓰기도 합니다. 부상을 입은 자가 시고에 먹히면 본성을 잃고 부활한 망자와 다를 바 없어지며 모두 행시가 되지요. 시고는 제거하기가 어렵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시고로 만여 명의 망자를 일으키는 것은 비술의 진법으로 시장진(尸藏陣)이라 합니다. 진이 있으면 진의 주인이 있는 법, 진의 주인은 아직 상양관 안에 있습니다. 진의 주인이 죽으면 비술도 깨지지요. 이 일을 형님께 알리는 것은 관작이 오를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님께서 결정하십시오. 아우 올림.”
사성은 이 서신을 받은 날짜를 따져보았다. 달 밝은 밤 황성 성벽 위에서 하얀 옷을 입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던 청년이 떠올랐다. 이 서신이 어디에서 보내졌든 놀랄 일이었다. 심지어 황성에서도 아직 상양관에 변고가 생긴 것을 모를 때 이 전서구가 사성의 탁자에 도착했다. 사성은 상양관의 참사가 벌어지던 순간 하얀 옷을 입은 벗이 먼 곳에서 뒷짐을 쥐고 서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사람을 믿어도 될지 막막했다. 하지만 이미 사성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음모가 천천히 전진하고 있음을, 그리고 상양관 안의 사람들은 곧 죽게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사성은 한번 모험해 보기로 했다.
“전서구.”
사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부하가 꼬리털이 청회색인 전서구 한 마리를 가져왔다. 사성은 이미 써둔 서신을 꺼내 전서구 발아래의 대나무 통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을 휙 내둘러 전서구를 푸른 하늘로 날려 보냈다.
9월 열흘, 당양곡 어귀, 새벽. 하늘가에서 막 한 줄기 광채가 어둠을 갈랐다.
리국 좌상 류문지는 진영 내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당직을 서는 군사들을 제외하고 류문지의 2만 적려 보병 대부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진영 안에서는 막 불을 지펴 밥을 짓기 시작했다. 류문지는 근위병 한 명을 데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의 군영은 고요했다. 노병은 쇠도끼를 휘둘러 장작을 패고 나무토막을 솥 아래 쑤셔 넣었다. 어느새 날씨가 꽤 추워져서 솥에 불을 지피니 매우 따뜻했다. 류문지는 솥 옆에 서서 손에 불을 쬐며 고기죽 냄새를 맡았다.
류문지는 문신(文臣)으로 군진(軍陣)은 알아도 전투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을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사병보다 일찍 일어나 군영을 순찰했다. 리국 장수들은 남만 부락에서 온 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류문지의 방식을 싫어했지만, 그의 위엄과 근면함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만 적려 내에 류문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없었다.
“참으로 조용하구나.”
류문지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대인.”
근위병이 다가왔다.
“이곳을 얼마나 더 지켜야 합니까?”
“얼마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류문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제 정확한 소식을 받았는데 사현의 부대가 상양관에서 백의와 다시 대치하고 있다더구나. 우리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화엽의 부대가 백의를 지원하러 가기라도 한다면 사현에게는 절대 승산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철수합니까? 앞뒤로 다 적인데요.”
근위병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길이 조금 멀기는 하다만 집으로 돌아가자면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류문지가 허허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또 한 명의 근위병이 패도를 쥐고 달려와 류문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인, 순국 화엽이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리 일찍?”
류문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그럼 들라 해라.”
곧 류문지의 근위병 여럿이 풍호 기병 차림의 용맹한 사내 하나를 빼곡히 둘러싼 채 데려왔다. 그 풍호 기병은 푸른 천으로 감싼 물건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있었다. 류문지 앞에 서서 살짝 허리 숙여 인사한 그는 보따리를 바쳤다.
“이게 무엇이지?”
류문지가 그 보따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화엽과 자주 선물을 주고받았으니 드문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편 사절이 동틀 무렵부터 서둘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저희 장군께서 류 재상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류문지가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안에는 고 서적 세권이 들어 있었다. 류문지는 책을 뒤적여보았다. 그가 화엽에게 빌려주었던 <소계통은(韶溪通隱)>, <해창지이록(海蒼誌異錄)>, <승산지문필기(冼山知聞筆記)> 세 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