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90화 (19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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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16)

천계성 태청궁 정화대전.

내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왔다. 그는 자신을 막으려는 금오위를 들이받고는 황실 중신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 옥좌의 섬돌 아래로 달려갔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외쳤다.

“폐하, 상양관에서 전서구로 급보를 알려왔습니다!”

“백의는 또 무슨 일로? 입경하는 일 때문인가? 흠차가 막 도착했는데도 전서구를 보내? 나더러 그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인가?”

황제는 버럭 화를 냈다. 조정 대신들과의 조회가 중단되었다. 요 며칠 황제는 백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아닙니다! 시란(屍亂)입니다! 백의 장군이 며칠 전 상양관 안에 이상한 동태가 발생했다며 알려왔습니다. 시체가 부활해 무수한 군사들이 죽고 다쳤답니다! 리군도 떠났다가 되돌아왔다면서 상양관에 급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내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시란? 그게 무슨 소린가? 영무예…… 그 간신은 왜 되돌아왔지?”

놀란 황제가 좌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있는 황성이 매우 위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끔찍한 행시와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역적이 다시 제 집 문 밖에 돌아왔다. 황제는 굴욕스러운 시절이 다 지나갔고 마침내 대전에 편히 앉아 몇 년간 태평한 황제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더랬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시란이란 불가사의한 일로 쉽사리 믿어서는 안 됩니다.”

태부 사기미가 대열에서 나와 아뢰었다.

“차라리 태복(太卜)을 불러 알아보십시오.”

황제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 즉시 명을 내렸다.

“태복을 들라 해라!”

태복감은 대윤 황실에서 그리 크지 않은 기관으로 불가사의한 일들을 전문적으로 다루었고 황실에 충성하는 비술사(祕術師)를 관리하는 일도 겸했다. 황실에서는 이상한 술수를 부리는 사람을 쓰려고 하면서도 그들의 가늠할 수 없는 힘이 걱정되어 태복감 같은 기구를 만들어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과거 고륜아가 국사였던 시절에 태복감은 다른 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다. 내부적으로 무수한 비술의 대가들을 관리하니 손만 까딱해도 십만 대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륜아 이후 태복감은 나날이 쇠퇴했고 결국 30~40명밖에 남지 않아서 이제는 비술을 연구하는 학관(學館) 같아졌다.

태복은 나이가 제일 많은 노인으로 눈도 침침하고 귀가 어두웠다. 십수 년간 황제가 부르지 않았던지라 금오위가 도착했을 때 그는 술에 취해 관아의 우물 난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복을 뒤집어씌우고 수레에 밀어 넣어 급히 궁으로 보냈다. 그는 정화대전의 신하들 가운데에 서고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벌벌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짜증이 치밀었다.

“사실대로 말하게. 시란이라는 주장이 믿을 만한 것인가?”

태복은 다소 난색을 표했다.

“폐하, 시란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한 하나의 설입니다. 널리 퍼져나가면 만백성이 공포에 떨게 되지요. 태복감도 이런 일을 근절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믿을 것이 못됩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관리인 저희도 그 소문을 잠재우려 했을 것입니다.”

황제는 더 답답해졌다.

“백성을 물은 게 아니네. 자네가 잠재우고 보고하지 않았는지를 물은 것도 아니야. 이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묻는 것이네!”

“가능하다고 말하기엔 수십 년간 전적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기도 그렇지요.”

태복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헛소리!”

황제가 벌컥 성을 냈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말하지 않으면 끌고 가 치겠다!”

태복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가능합니다! 가능합니다!”

“어찌 가능하냐?”

“전적에 죽은 자를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시 일으켜 걷게 하는 방법은 몇 가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혼술(魂術)이지만 이는 단지 시체를 조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태복은 자신이 잘 아는 일을 이야기하자 자신감을 감추지 못하고 침을 튀며 말했다.

“시체를 조종하는 혼술은 하나의 분파입니다. 시체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사기꾼으로 이미 죽은 자를 회생시킬 수 있다며 허풍을 쳐 돈을 뜯어내지요. 부잣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애통한 마음에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가족을 잠시 부활시켜 준다는 사기꾼들의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사실 죽은 자를 회생시키는 기사회생술은 예로부터 알려진 바 없으며 시체를 조종하는 조시술(操屍術)이 다입니다. 술사는 가족을 멀리서 보게 하고 한패인 사기꾼에게 시체의 목소리를 흉내 내게 합니다. 그리고 비술로 시체를 일으켜 몇 걸음 걷게 하지요. 멀리서 보면 되살아나서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빈껍데기를 빌린 것에 불과합니다. 작별인사도 사기꾼이 말하는 것이고요.”

요점을 알 수 없는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황제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누가 대신 저자를 좀 걷어차시오!”

군신들은 경악했다. 그래도 태부 사기미가 제일 반응이 빨랐다. 그는 앞으로 나가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태복의 어깨를 찼다. 사기미는 태복이 데구르르 구르긴 해도 다치지는 않을 딱 그 정도로만 걷어차고는 호통쳤다.

“중요한 것만 말하게!”

태복은 더 나대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수천수만 구의 시란은 대윤 전적에 기록된 바가 없사옵니다. 보통 그런 술사가 조종하는 시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요. 사람을 죽이는 데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상양관의 일은 불가능한 것이겠군?”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는 이런 소식에 신물이 났다. 삿된 일이 황성 입구의 요새에서 벌어졌다니 말세가 도래한 기분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운주에는 시고술(屍蠱術)이라 하여 대규모로 시체를 조종할 수 있는 술법이 있다 들었습니다.”

“시고?”

황제는 그 명칭을 듣자마자 가슴이 오싹해졌다.

“시체와 벌레를 달여 만든 일종의 독기(毒氣)입니다. 시체에 뿌리면 산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시체와 벌레는 구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쌓이게 되는 법이니 고독(蠱毒)만 충분하다면 대량의 시체를 조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궁중에서는 그런 기이한 일을 들어본 적이 없네.”

황제는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진정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황제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폐하께서는 신성한 천자이시지요. 장미 황제 이후 황실에서는 어릴 때부터 바른 기풍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괴력난신의 불가사의한 일들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태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누군가가 고의로 그 시체를 부려 근왕군과 맞서게 했다는 것인가?”

태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체를 부리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몸이 완벽하게 죽지 않고 정신이 남아 있으므로 육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시란의 논리입니다. 다만 정신이 흩어지면 영혼도 의탁할 곳을 잃게 되지요. 시란의 본질은 누군가가 각종 방법으로 시체를 자극해 새롭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시체는 의식이 없어 통솔하기도 부리기도 매우 어렵지요. 정말 그 많은 시체를 조종하려면 수천 명의 혼술 대가들이 동시에 시술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한 왕조, 한 세대에서도 한두 명 나올까 말까이지요. 소신이 생각하기에 이 시체들은 통제를 받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망자는 죽기 전 산 사람에 대한 증오가 있게 마련이지요. 이 시체들도 지각은 없으나 조금 남은 의식으로 산사람을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기이한 이야기를 뭐 하러 구구절절 늘어놓는가? 태복감에서는 이런 헛소문이 돌지 않도록 제지했어야지? 한데 대전에서 침을 튀며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니. 노망이 난 게로군!”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황제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소신은 그저 폐하께서…… 설명하라 하셔서 설명한 것입니다…….”

태복은 망연해졌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대전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트렸다. 웃음소리는 황제의 옥좌 뒤편 장막에서 흘러나왔다. 사기미는 즉시 관복을 정돈하고 장막을 향해 몸을 굽히며 명을 기다렸다. 사기미처럼 상황 판단이 빠르지 않은 나머지 신하들도 눈치껏 장막을 향해 돌아섰다. 황제를 마주보고 있던 신하들의 대열이 갑자기 각도를 틀었다.

황제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도리어 기쁜 기색을 띠었다.

“장공주께서 지금 이리 웃으시는 이유는 분명 제게 한 수 가르쳐줄 것이 있어서겠지요?”

“폐하, 태복은 이미 나이가 많습니다. 화를 낼 필요가 무에 있습니까? 게다가 말이 많기는 했어도 그 일을 매우 정확하게 이야기했잖습니까.”

장공주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에 우선 황성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연합군이 겪은 시란이 독으로 인한 것이든 벌레로 인한 것이든 극도로 위험한 일입니다. 현재 영무예가 회군해 왔으니 시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자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더더욱 백의를 황성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백의의 군대에 고독 같은 것이 묻어있어 황성이 귀성(鬼城)으로 변하면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장공주가 엄숙해진 목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사기미는 살짝 오싹해졌다.

그런데 황제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백의에게 상을 다시 내리시지요. 국공의 지위에 봉해주겠다 하고 상양관을 사수하라 명하십시오. 그리고 황제께서 군대를 보내 상양관 뒤편에 진을 치고 방어케 하십시오.”

장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이 수비는 영무예가 상양관을 격파하고 공격해 들어올 것에 대한 대비이자 백의에 대한 방어이기도 합니다.”

“몹시도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사기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끼어들었다. 장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백의가 상양관을 사수할 가망이 없다 여기고서 남은 군을 이끌고 철수를 강행한다면 그 시고가 황성까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북상해 당양곡의 화엽을 방어할 군대도 필요합니다. 백의가 지금 상양관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으니 일찌감치 왕역을 넘고자 했던 화엽에게는 가장 좋은 핑계가 될 것입니다. 젊은 시절 화엽은 인간 백정이었습니다. 본성이 포악하지요. 지금은 수행을 한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폐하의 윤허 없이 절대 왕역을 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황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난색을 표했다.

“우리에게 화엽의 풍호와 백의의 산진을 방어할 큰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동륙에서 내로라하는 강한 군대잖습니까!”

장공주가 일어나더니 몸을 굽혀 절했다.

“소신은 아녀자이지만 선대 희 황제께서 재위했을 때부터 명을 받들어 황실의 군대를 재정비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림천군 2만 명을 비롯해 황성을 수비하는 금오위도 2만 명 있습니다. 이들 군대는 훈련이 잘되어 있고 폐하께 충성하니 적어도 황실을 보호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제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소신이 아녀자라 하여 버리시지 않을 거라면 부디 우림천군과 금오위를 통솔해 출정하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황제는 희색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우림천군과 금오위가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까? 하지만 존귀한 장공주께서 직접 출정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제가 감히 동륙 최강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황성을 지키는 정도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장공주는 엎드려 절을 올렸다.

“소신 거듭 청하옵니다. 폐하를 대신해 출정케 해주십시오!”

“좋습니다! 좋아요!”

황제가 몇 걸음 물러났다. 누적된 피로에 녹초가 된 듯 황좌에 늘어졌지만 표정만큼은 홀가분했다.

“내감을 시켜 병력을 움직이는 군부를 장공주 관저에 보내겠습니다. 우림천군과 금오위는 모두 공주의 군령을 따를 것입니다. 검과 갑옷 전차를 하사할 터이니 나를 대신해 그들을 토벌해 주십시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장막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누님, 누님이 없었다면 나는 황제 노릇에 지쳐 죽었을 겁니다. 처음에 누님은 나만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다 했는데 내 누님께 속았습니다. 이런 날들일 줄 알았다면 시 쓰고 그림 그리는 친왕으로 사는 것이 백 배 나앗겠습니다.”

“다 좋아질 거다……. 곧 좋아질 게야…….”

장공주는 작은 목소리로 황제를 다독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 시각, 월주의 구원성. 뇌기군 2천 명이 전기(戰旗)를 받쳐 들고 입성했다.

영무예의 입성(入城) 의식이었다. 붉은 깃발 2천 개가 산들바람 속에서 높이 끌어올린 돛처럼 하늘을 가렸다. 멀리서 보면 세상의 절반이 붉은색에 뒤덮인 것 같았다. 영무예는 빠른 말을 달려 귀국했다. 모든 장애물을 피해 달려오다가 구원성에 근접했을 때서야 서신을 한 통 썼다. 신하들에게 그의 입성을 위한 붉은 깃발 2천 개를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묵리현후에게 의탁했던 신하들은 모두 이 서신의 사본을 받았다.

영무예는 말을 멈추고 한나절을 기다렸다가 천천히 구원으로 향했다. 금세 영무예는 붉은 깃발을 들고 마중 나온 첫 번째 신하 무리를 만났다. 영무예를 보는 순간 신하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리 죽여 우는 이도 있었다. 영무예는 그들에게 별말 하지 않고 담담히 손을 흔들고는 뇌기에게 붉은 깃발을 챙기라 명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몇 리를 전진할 때마다 붉은 깃발을 들고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마중하는 신하들 무리를 만났다. 그러나 가는 내내 영무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뇌기군은 점점 더 많은 깃발을 손에 넣었으며 결국 전군이 붉은색 파도처럼 변했다.

구원성까지 3리가 남았을 때, 묵리현후가 남쪽으로 도주했다며 척후가 보고해 왔다. 그제야 영무예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어렸다.

남쪽 숲 속에 위치한 구원은 1년에 절반 가까이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영무예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주변의 안개 속에서 어렴풋하게 무릎을 꿇고 맞이하는 백성들이 보였다. 영무예는 장경방, 덕륭방, 청산대로를 지나 곧장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설청(雪晴) 호숫가의 넓은 길로 방향을 틀었다. 리국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 호수의 원래 이름은 청문소(靑文沼)였는데 몇 년 전 설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영무예의 걸음은 더뎌졌다. 마침내 그는 말을 세우고 호숫가의 자욱한 수증기를 바라보았다. 수증기 안쪽 깊숙이 검소한 누각 하나가 희미하게 처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무예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옥아, 이것을 가져다주어라.”

영무예는 품에서 옥 공주를 땅에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푸른색 비단 주머니를 꺼내 딸에게 건넸다.

“아버지께서는 안 가보십니까?”

“안 가련다. 이 안에 천계성 명인의 악보가 들어 있다. 연습하게 가져다주어라.”

영무예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영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사가 끌고 온 백마에 휙 올라타더니 한 대대의 뇌기군을 이끌고 호숫가를 따라서 멀리 있는 작은 누각까지 질주해갔다.

“옥아!”

영무예가 돌연 제 딸을 불러세웠다.

옥 공주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돌아보았다. 영무예의 외침만이 들렸다.

“연습 다 하면 내 들으러 가볼 수도 있다고 전해라.”

“네!”

영옥은 소리 높여 대답하고는 멀어져갔다.

영무예가 웃으며 말했다.

“딸내미가 속으로 나를 비웃겠군.”

영무예의 대군이 천천히 움직였다. 뇌기 척후병 하나가 뒤편에서 달려와 영무예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왕야, 방금 속보가 왔는데 사현 장군의 군대가 상양관 아래 포진했고 장박 장군의 군대도 이미 제 위치에 도착했다 합니다. 상양관 안은 난장판이고요.”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뇌벽성의 함정이 드디어 효력을 발휘하는군.”

“왕야, 소신은 직위가 미천하오나 조금 걱정이 되는 바가 있어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사현 장군의 1만 적려는 아직 부상 중인데 만약 황실에서 백의에게 지원병을 보내면 저희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백의가 황성으로 퇴각해 황실과 병력을 합치면 어쩝니까?”

영무예가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생각이 좀 있는 녀석이로군. 쪽지에 네 이름을 적어 다오. 내 너를 발탁할지 고려해보마. 네 질문에도 답해주지. 신술이 무엇이냐?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천하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황실의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 시고에 시달린 제후들을 황성에 들게 허락해주겠느냐?”

척후는 문득 이해가 되었다.

“더구나 백의가 황실의 비위를 맞출 리 없다.”

영무예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

호수 너머에서 돌연 허공을 가르고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영무예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퉁소 소리는 맑고 청아하면서도 쓸쓸했다. 흡사 아득한 대지 위로 눈송이가 흩날리고 눈 덮인 들판 끄트머리에 외로운 대나무 한 그루가 가로놓인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군.”

영무예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현 장군과 장박 장군의 군대에서 전보가 왔는데 들으시겠습니까?”

척후가 물었다.

“됐다. 부인이 퉁소를 불고 있지 않으냐. 이럴 때는 행시 같은 역겨운 얘기로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영무예가 손을 들고 외쳤다.

“전군 정지!”

2천 개의 뇌열지화 깃발이 수양버들이 드리워진 둑에 휘몰아쳤다. 하늘을 뒤집는 붉은 파도 같았다.

“왕야, 전할 명령이 있으십니까?”

전령관은 영문을 몰라 영무예에게 다가와 물었다.

“퉁소 연주를 들어라.”

영무예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붉은 파도 아래 모두가 고요해졌다. 무쇠로 만든 것 같은 용맹한 무사들이 위엄 있는 패주를 빼곡이 에워쌌다. 영무예는 조용히 말을 탄 채 퉁소 연주를 들었다. 차디찬 눈동자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패주의 패기도, 웅대한 포부도 모두 이곳에 잠시 멈추어 있었다. 난세 영웅들의 발소리도 퉁소 소리에 묶였다. 오후의 햇살이 호숫가의 층층이 쌓인 물기 속을 통과했다.

그 시각, 복잡하고 급격하게 변하던 동륙 7천리 강산의 형세도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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