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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15)
“파군!”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백의는 한 발, 한 발 사방팔방으로 화살을 쏘았다. 매 화살이 땅에 쏘아질 때마다 진동음은 배가 되었다. 먼저 떨어졌던 화살의 진동 소리도 똑같이 배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소리의 진동이 우전을 에워싸며 주위의 행시들을 튕겨냈다. 화살대의 은빛이 점점 더 눈부셔지더니 별처럼 하얀 광채가 흘러넘쳤다.
화살은 총 7대. 마지막 화살이 땅에 떨어지자 지면이 미미하게 진동하더니 먼지가 1척 높이로 일며 알 수 없는 막강한 힘이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행시들은 거대한 추에 가격을 당하듯 날아갔다.
모든 사람이 그 진동에 온몸이 저릿해졌다. 주위 공기도 진동음에 통제되었다. 사람들은 손발이 거미줄에 묶인 것처럼 살짝 움직이는데도 숨을 헐떡거렸다. 물속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저항력이 어마어마했다.
“이게 뭐요?”
정규가 고함쳤다.
“비술이오? 백 장군이 비술도 할 줄 아오? 우리도 꼼짝할 수가 없잖소!”
“비술은 아닐 거요. 저 활과 화살은 혼이 새겨진 무기요! 당대의 독보적인 신기(神器)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지. 백의가 이 한 수를 남겨두었군!”
강무외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월의는 식연을 보았다. 식연의 당겨진 입꼬리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까 백의가 화살을 한 발씩 쏠 때마다 식연은 나직하게 이름을 하나씩 읊조렸다. 순서대로 읊은 이름은 이러했다.
‘파군’, ‘무곡’, ‘염정’, ‘문곡’, ‘녹존’, ‘거문’, ‘탐랑’.
고월의는 그것이 북두칠성의 이름임을 알고 있었다. 무사로서 그들을 수호해 주는 별자리를 당연히 중시했다. 그러나 백의의 화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월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정중앙에 있는 북극성은 거의 밝은 달만큼 빛났고 모양은 하늘에 가로 걸린 날카로운 검 같았다.
“그대가 백의 자리에 서 있다면 화살 7대가 북두칠성의 형태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을 거요. 군림진(君臨陣)이라는 것인데 나도 운 좋게 전에 한 번 보았을 뿐이오.”
식연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고월의는 불현듯 이해가 되었다.
그때, 낮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식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것은 예리한 화살로 행시 떼 안에서 쏘아져 나왔다. 민첩하지 못한 행시들은 거대한 힘으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저들 중에는 활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 화살은 정확하게 은회색 화살의 끄트머리에 맞았다. 백의의 화살은 힘이 극도로 강해 땅속 깊이 박혀 있었다. 그 화살은 백의의 화살을 날려버리지는 못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뒤흔들었다.
공기 중의 강렬한 진동음이 돌연 약해졌다. 행시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 백의의 화살을 뽑으려 했다.
“내게 활을 쏜 자입니다!”
고월의는 무심결에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행시 떼 안을 살펴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겹겹의 끔찍한 얼굴만 보였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화살의 힘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월의는 성문에서 자신을 기습했던 그자라 확신했다.
백의의 화살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행시의 손이 점점 더 화살에 가까워졌다. 화살의 눈부신 빛살에는 모종의 침식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행시의 팔 근육이 말려들기 시작하더니 점차 녹아서 뼈가 드러났다. 행시의 손가락 끝도 빛에 부식되어 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하지만 행시는 점점 화살에 가까워졌고 화살을 잡기 직전이었다. 화살의 진동하는 힘에 온몸이 부서진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저 화살은 신비의 불에 단련하지 않았네!”
백의는 이미 녹초가 되었지만 눈썹을 치켜뜨고 큰 소리로 외쳤다.
“식연, 자네가 이 진의 주인일세!”
백의의 명령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식연은 그날 뇌벽성을 기습할 때처럼 달려 나갔다. 그는 인파 속을 빠른 속도로 뚫고 지나갔다. 흡사 한 줄기 굴곡진 바람 같았다. 인파를 뚫고 나가는 순간 식연은 하늘 높이 뛰어 올라 빠른 발차기로 그 행시의 이마를 가격했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그 일격이 치명타였겠지만 행시는 상반신이 뒤로 젖혀졌을 뻔 꼿꼿하게 서 있었다.
착지한 식연은 단번에 백의의 화살을 뽑아 손으로 만져보았다.
“복제품은 정품에 비해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걸!”
행시는 재차 달려들었고 식연은 손을 뻗어 화살을 놈의 미간에 찔러 넣었다.
화살에 잔존하던 빛이 순간 놈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놈은 움직일 능력을 잃고 벌러덩 나자빠졌다.
식연은 아까 우전이 박혀 있던 위치에 한 손으로 고검 정도를 꽂은 뒤 두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내리눌렀다. 검은 땅에 박히자 곧바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신이 천천히 빛을 발하더니 끝내는 막 화로에서 나온 백열 상태의 금속처럼 변했다. 진동음이 다시 격앙되었다. 뙤약볕에서 부르는 군가 같았다.
“식 장군의 검도 혼이 새겨진 무기였군!”
강무외가 감탄했다.
식연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서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북극성의 신은 궁지에 이르러도 동요하지 않으며 만 리 고공의 매처럼 침착하리라!”
멀리 목루 위에서 백의는 묵묵히 읊조리는 식연을 보았다. 그는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이 밀려갔다 되돌아오는 조수처럼 밀어닥쳤다. 순간 아연해진 백의는 마음속 어딘가가 살며시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오른손 엄지를 구부려 활을 쥔 나머지 손가락으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쇠반지를 어루만져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북극성의 신은 바람을 타고 불을 모니, 신이 왕림하면 그 빛은 해와 달을 능가하리라.”
백의는 돌연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포효했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방패 뒤에 숨어 있던 대군이 일제히 나왔다. 행시들은 강렬한 진동음에 완전히 속박되었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힘겹게나마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군사들은 지금이 유일한 기회임을 알았다. 이 진법의 웅대하고 왕성한 힘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발악하며 달려들어 힘겹게 무기를 휘두르고 베면서 흉측한 행시들과 부둥켜안고 한바탕 사투를 벌였다.
윤성제 3년 9월 초엿새의 일이었다. 상양관은 밤새 교전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상양관 남쪽의 문 6개는 단단히 잠겼고 성문 앞은 되살아난 전사자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은 성문을 두드리며 산 자들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청년 하나가 하얀 옷을 펄럭이며 아득히 먼 곳의 산꼭대기에 서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무대 앞에서 몰입하지 않는 관중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서동은 청년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질겁하여 눈을 휘둥그레 뜨고 청년의 팔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이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었다.
“항 공자…….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죠?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요?”
그는 얼이 빠진 듯 중얼중얼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정신은 몸에서 흘러나가지만 힘은 남아 있지. 좀처럼 실현해내기 어려운 어떤 방법들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정신까지 억지로 육체 안에 봉인하고 육체가 늙지 않도록 해 거듭 사용할 수 있는 시무사(尸武士)를 만들 수도 있지.”
항 공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비술이 끝내 동륙에도 들어왔는지 미처 몰랐구나.”
“저희는 어쩝니까? 어떡해요?”
서동은 자신을 고용한 항 공자를 신으로 여겼다.
“우리는 괜찮다. 뇌벽성이 죽이려는 사람은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나 너 같은 애가 아니야. 그자가 죽이려는 사람은 하나같이 동륙의 운명을 쥐고 있단다!”
항 공자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는 백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구나. 전서구는 가져왔느냐?”
서동은 벌벌 떨며 새장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꺼냈다.
항 공자는 빙그레 웃더니 소매에서 두 손가락 너비의 천을 잘라내 목탄으로 빠르게 서신을 썼다.
그는 천을 전서구 다리에 묶고 자그마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의를 죽이면, 동륙의 정세는 일시적으로 단조로워질 것이고 진월은 원하는 것의 절반을 손에 넣을 것이다. 한데, 뇌벽성이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 같구나.”
항 공자가 휙 손을 내두르며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그는 밤하늘 속에서 빠르게 멀어져가는 전서구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 저를 탓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제가 무대에 오를 때까지 이 난세가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조금 밝아졌다.
식연은 물 한 단지를 검에 뿌려 끈적끈적한 피를 씻어냈다. 핏물이 붉게 물든 땅에 스며들었다. 식연은 손으로 검을 털어 물기를 떨어내고는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강무외는 칼을 짚고 앉아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기운이 왕성한 정규는 눈이 벌게져서 쓰러진 행시들을 계속 뒤쳐보고는 조금이라도 꿈틀하는 것이 있으면 칼로 심장을 한 번 더 찔렀다. 백의가 천천히 목루에서 내려왔다. 안색은 그 누구보다도 안 좋았다. 7대의 화살을 다 쏘면서 평생 쓸 힘을 다 소모한 것 같았다.
도처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군사들의 시체와 행시들의 시체가 한데 뒤섞여 있었는데 갓 죽었는지 먼저 죽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행시 중에는 리군 사망자도 있고 연합군 사망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한곳에 섞여 있었다.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한데 모여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하룻밤 만에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난 듯한 몰골이었다.
백의는 북대영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터져나간 은색 조각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의 화살이었다. 화살에 봉인된 영혼은 강렬한 진동과 울림으로 행시들을 막고 스스로 파괴되었다. 봉인 도구로서 화살은 신비한 진의 마지막 순간 산산이 조각나며 눈부신 은색 광채 속에서 폭파했다. 이어 봉인되었던 영혼도 더는 구속되지 않고 드넓고 아득한 곳으로 흩어졌다.
백의는 모든 화살을 잃었다. 이제 그에게는 활 하나만 남았다.
“백의!”
식연이 뒤편에서 그를 소리쳐 불렀다.
백의는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식연은 백의에게로 전력을 다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던졌다. 은빛이 순간적으로 백의의 미간을 향해 다가왔다. 깜짝 놀란 백의는 손을 뻗어 허공에서 그것을 붙잡았다. 상처투성이인 화살이었다. 어젯밤 그가 쏘았던 7대의 화살 중 하나였다. 부서지지 않은 최후의 장신전(長薪箭).
“화살 7대를 모두 잃는 날이 자네가 죽을 날이라고 했었지.”
식연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 벗으로서 자네가 이렇게 빨리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백의는 한참을 멍해 있다가 식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뽑아낸 것인가?”
“뽑아내기가 만만치 않더군.”
식연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식연의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살 안쪽 깊이 패여 까맣게 탄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주변의 피도 화살의 열기에 삽시간에 말라붙어 있었다. 화살을 뽑을 때 남은 상처가 분명했다.
“혼에 물렸군.”
백의가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고맙네.”
“자네처럼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네.”
식연이 털털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백의가 화살을 화살 자루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성안의 것들은 해결했고, 성 밖에는 얼마나 더 있지?”
“몇 천? 1만?”
식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인력으로 공격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네. 놈들의 혈기가 쇠약해져서 저절로 죽게 되기를 기다려야 해.”
말 한 필이 북대영 안으로 질주해 들어왔다. 말 등에 탄 척후병은 몸을 굴려 말에서 내려온 뒤 백의 앞으로 달려왔다.
“대장군! 대장군! 성 밖에…… 성 밖에…….”
척후병은 다급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 밖이 어떻기에?”
백의가 척후병의 어깨를 눌렀다.
“저희가…… 저희가 포위되었습니다! 행시가 아니라…… 리군에게요! 리군입니다!”
척후병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소리쳤다.
“리군?”
백의는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연합군 통수들은 상양관 성벽 꼭대기로 달려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 아래 서 있는 행시들이었다.
어제까지 이곳은 도처에 시체가 널린 전장이었는데 오늘은 쓰러졌던 모든 시체가 다시 일어났다. 놈들은 회백색 눈으로 나란히 성벽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놈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몸을 통과해 아득히 먼 하늘가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하나의 적막한 숲이었다. 죽은 자들이 이 숲의 나무였다.
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행시들 뒤편 들판에 적홍색 군대가 일자로 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멈추어 있었지만 적홍색 꿈틀거림은 그들이 돌격할 때를 연상시켰다. 그때 그들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적색 조수처럼 변했다.
리국 적려가 돌아왔다. 떠난 지 아흐레 만에.
“창란도로 귀국하지 않았군.”
백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강무외도 말을 얹었다.
“최소 1만 명이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당대 최고 명장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마음속에 죽음의 잿빛이 넘실거렸다.
리군의 작은 대대 하나가 기다란 진 앞에 도랑을 파고 있었다. 도랑은 먼 곳으로 통했는데 그중에는 얕게 물이 흐르는 곳도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긴 도랑이 리군 군영 전체를 에워쌌다.
“뭘 하는 거지?”
정규는 의아했다.
“도랑이오. 물로 산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릴 수 있거든. 행시 같은 것들은 물을 뛰어넘으면서까지 산 자를 공격하지는 못한다오.”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들은 준비하고 온 거요.”
멀리 뇌열지화의 깃발 아래 검은 갑옷을 입은 장령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말에 탄 채 멀리 성벽 꼭대기를 향해 인사했다. 이쪽의 움직임을 본 모양이었다.
식연이 길게 탄식했다.
“리국의 삼철구…… 사현이군. 영무예가 우리를 상대할 사람으로 가장 까다로운 자를 남겨두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