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88화 (188/360)

188

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14)

북대영, 연합군 통수 백의의 주둔지.

식연의 흑마 묵설이 사자처럼 전진하며 접근해 오는 행시를 앞발로 밟아버리면 식연이 몸을 숙여 검으로 그 행시의 심장을 찔렀다. 식연의 뒤편에서는 정규가 양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정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행시들을 죽였다. 그의 칼솜씨는 식연의 검술처럼 예리하고 정밀하지 않아서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지 못했지만 나름 행시를 상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양손으로 풍차처럼 칼을 휘둘러 행시의 양팔을 잘랐다. 그러면 제자리에서 맴돌 수는 있어도 공격할 능력은 없었다. 세 사람을 호위하는 수십 명의 기병과 수십 구의 행시가 북대영 입구를 꽉 채웠다. 뒤편으로는 더 많은 행시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북대영 내 초위국 산진도 임시로 조직해 묵직한 방패를 세웠다. 행시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했지만 산진창병의 철갑옷과 거대한 방패 때문에 쉽사리 그들을 해치지는 못했다. 양측은 방패를 사이에 두고 씨름했다. 창병 셋의 힘으로 행시 하나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이미 죽은 전사들은 근력이 산 사람을 훨씬 능가했다.

식연은 목숨 걸고 북대영 안으로 돌진했다. 방어진을 친 산진창병은 달려 나와 지원하고 싶었지만 쌍방이 모두 행시에 가로막혔다. 식연이 직접 데려온 부대가 몇 차례 연달아 돌진해 보았지만 매번 수십 보 밀고 나갔다가 도로 밀려 나왔다. 식연은 검술도 정교하고 찌르는 공격도 정확했으며 홀로 돌진하는 기세도 누가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등등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그를 쫓아오지 못했다. 행시들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에서 쓰러지면 뒤에서 계속 달려 나와 금세 식연과 양측에서 그를 엄호하는 기병들을 떼어내었다. 하여 식연은 재차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식연은 홀로 행시 떼 안으로 돌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뒤 좌우에서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아무리 예리한 검술로도 동시에 습격해 오는 십수 개의 무기를 막아낼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더 많은 놈들이 오고 있소!”

정규가 크게 고함을 치며 얼굴의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행시의 피였다. 매우 이상하게도 이것들의 피는 마르지 않았다. 다만 보통 사람의 피보다 훨씬 더 끈적끈적했다.

고월의는 정규가 말하는 틈에 연달아 화살을 두 발 쏘아서 행시 하나의 두 눈을 망가뜨렸다. 정규의 뒤편에서 덮치려 했던 행시는 철갑을 몸에 두르고 질주하는 말처럼 돌진하다가 갑자기 눈을 잃자 제자리에서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돌았다. 정규는 그것을 알아채고 뒤돌아 단칼에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고월의도 계속해서 이것들의 약점을 찾았다. 그는 이 행시들이 여전히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혀 예측불가한 놈들은 아니었다. 다만 정상적인 의식을 잃어버리고 산 사람을 공격할 줄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비키시오!”

노쇠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고월의가 말고삐를 잡고 돌아보았다. 준마 한 마리가 바람을 거슬러 다가오고 있었다. 달빛 아래, 말 등에 탄 노인은 투구도 쓰지 않았다. 허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하얀 털의 분노한 사자 같았다. 휴국 통수 강무외가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그들 뒤에도 행시 한 무더기가 발을 질질 끌며 쫓아왔다. 이들 행시는 사람을 죽일 때만 질주했다. 신선한 피를 비정상적으로 갈망하는 듯했다.

“비키시오!”

강무외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북대영 입구를 막고 있던 군사들은 강무외의 기병대를 위해 재빨리 한쪽으로 비켰다. 강무외가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그제야 이 노인이 무기를 들지 않고 어깨에 거무스레한 말가죽 자루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무외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둘러 이삼십 근은 나가는 말가죽 자루를 머리 위에서 돌렸다. 그가 손을 놓자 말가죽 자루는 날아가 행시 떼 속에 떨어졌고 그 즉시 갈가리 찢겨나갔다. 가죽 자루 안의 검은색 액체가 놈들의 몸에 뿌려졌다. 놈들은 지각이 없으니 피할 줄도 몰랐다.

강무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피했다. 그의 뒤에 있던 기병도 가죽 자루를 휘둘러 던지고는 재빨리 피했다. 강무외의 기병대가 한 사람씩 차례로 가죽 자루를 던졌다. 훈련이 매우 잘된 이들은 동작이 깔끔하고 예리하며 시원시원했다. 강무외의 측근 정예병다웠다.

강무외는 군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부시를 말등자에 세게 그었다. 지펴진 불씨가 던져졌다. 작은 불씨 한 점이 행시들의 몸에 떨어지더니 즉시 퍼져나갔다. 가죽 자루 속에 든 액체는 등유였다. 등유는 매우 빠르게 타올랐다. 칼과 검을 두려워하지 않던 행시들에게 불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들은 고통이 느껴지는지 무기를 버리고 묵직하게 으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도망치려던 놈들이 서로 부딪치며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 장군께서 정말 때 맞춰 잘 오시었소!”

정규가 크게 기뻐했다.

“사람이든 다른 생명체든 천성적으로 화염을 경외하지. 모든 것을 정화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니까.”

식연이 찬탄하며 말했다.

“행시도 예외는 아니오. 강 노장군께서 놈의 급소를 알아내셨구려.”

“죽어서도 시끄러운 놈들은 불로 태워버려야지!”

강무외가 크게 외쳤다.

“어서 칩시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돌격했다. 기병대는 행시 떼를 뚫고 들어가 그들을 하나하나 베어 쓰러뜨렸다. 풀을 베듯 깔끔했다. 공기 중에는 이글거리는 열기와 악취가 가득했다. 행시들은 몸의 지방이 타면서 전투력을 잃었지만 달아날 곳이 없었다. 산진도 영채 입구로 전진을 강행했다. 진 후방의 군사들은 창을 던져 굼뜬 행시를 땅바닥에 못 박아버렸다.

전장은 어느새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산진창병의 방패 방어진에 틈이 열렸다. 식연 등이 말을 몰아 신속하게 통과하자 방패 방어진은 다시 봉쇄되었다. 강무외가 가져온 등유는 눈앞의 문제밖에 해결하지 못했다. 더 많은 행시들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무수한 귀신의 형상이 흙 묻은 무기를 들고 발을 질질 끌며 둔탁하게 걸어왔다.

정규가 말에서 뛰어 내려 강무외를 향해 돌아섰다.

“강 장군께서는 어느 쪽에서 오셨소? 함락된 성문이 있소? 다른 병영은 지금 어떻소?”

“성문에서 왔소. 지금 저 행시들은 성 밖에서 들이닥친 것들이오. 서쪽의 ‘화문(火門)’은 벌써 열렸고 들어온 수는 대략 일이천쯤 되오. 그곳은 우리 군이 지키던 방어선인데 그래도 성문은 닫았소.”

강무외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단정치 못한 갑옷과 잘려나간 전포를 보면 성문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상상이 갔다.

“일이천이 들어왔다고요?”

고월의는 깜짝 놀랐다.

“아군은 전멸했소. 우리들만 도망쳐 나온 거요.”

강무외는 무표정했다. 정규가 경악했다.

“그럼 성문은 행시들이 장악한 게 아니오? 성 밖에는 얼마나 있소?”

강무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괜찮소. 행시들은 그저 산 사람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듯하오. 놈들은 아예 지능이 없어서 문을 열 줄은 모르오. 오면서 보니 각 병영에 행시가 흩어져 있고 진국 군영만 적시에 흙벽을 쌓았더이다. 그 위에서 긴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있으니 나름 방어가 가능하지.”

산진창병 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홱 돌렸다. 불타는 행시 몇 구가 억지로 방패 가장자리를 붙잡고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방패 뒤의 군사가 긴 창으로 호되게 찌르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시 하나가 그의 이마를 붙잡더니 손가락으로 얼굴을 세게 찔렀다. 비명을 내지른 군사는 이내 숨이 끊어졌다. 진형에 틈이 생겼다. 몇 구의 불붙은 행시가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산진창병의 전포에 불이 붙으며 신속하게 대열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방패를 든 앞줄의 군사들은 재빨리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불을 끄려 한다면 견고한 방어진이 무너질 터였다.

뒤편의 군사들이 서둘러 물을 가져왔지만 이미 늦었다. 불은 이미 방어진 전체를 태워버렸다.

무리 지은 행시들이 산진으로 달려들어 처참하게 군사들을 죽였다. 산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불이 도리어 지금은 재앙이 되고 있었다.

“버틸 수 없겠습니다…….”

고월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강무외도 입을 열었다.

“놈들이 전부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소. 이곳에 지금 산 사람이 가장 많다는 소리지. 이것들과 맞서는 데는 수적으로 우세해 봐야 소용없소.”

“놈들은 산 사람의 냄새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고월의는 전사한 백부장이 떠올랐다.

“백의! 백의! 백의!”

내내 말이 없던 식연이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다 죽게 생겼소! 틀어박혀 있는 꼴을 더는 봐줄 수 없소! 백의! 나오시오!”

다들 그제야 이곳에 백의를 찾으러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백의는 후방에서 산진을 지휘하고 있지 않았다. 백의를 대신해 서 있는 사람은 그의 참모인 사자후였다. 푸른 옷을 입은 문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당황한 군사들을 진정시켰다.

사자후가 벌써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장군들을 뵙습니다.”

식연이 나직하게 호통쳤다.

“백의에게 나오라 하게. 지금이 어느 때인데.”

사자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길이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북대영 한가운데에는 목루(木樓)가 세워지고 있었다. 목루는 매우 빠르게 지어졌다. 네 귀퉁이를 지탱하는 거목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군사 수천 명이 협력해 두 팔과 간단한 공구만으로 목재를 연결해 고정시키면서 켜켜이 쌓아갔다. 상양관을 탈환하기 전 백의는 성 안의 상황을 관찰할 목적으로 진 앞에 이런 누각을 하나 세웠더랬다. 지금 이 순간 평지에 누각이 세워지는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누각이 지어지는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위국 군사들이 민첩하게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모습은 마치 개미가 모래를 쌓는 것 같았다.

끝으로 군사들은 누각 꼭대기에 넓은 판을 깔았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간이 계단을 따라 누각에 올랐다. 그의 걸음걸이는 완만하고 듬직했다.

“백의?”

식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합군 통수 백의가 손에 은회색 각궁을 들고 나무 누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의 하얀 옷이 바람에 나부꼈다. 밤하늘 아래 눈부시게 하얀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이 대지에 강림한 듯했다. 백의는 고개를 쳐들고 별이 총총한 하늘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발아래에서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누각이나 세우고 있답니까?”

정규는 격분했지만 백의의 위엄에 압도되어 고함을 지르지는 못했다.

“하얀 옷을 차려입고 뽐내는 꼴이라니, 다 죽게 생기니까 황성의 미녀가 그립기라도 한 것이오? 행시는 잘 차려입었는지 아닌지는 상관 안 하는구먼!”

백의는 등 뒤의 화살 통에서 은회색 우전 하나를 뽑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의의 시선이 닿자 정규는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날 뻔했다. 정규는 백의의 화살이 지닌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의는 정규를 보지 않고 행시 무리의 어딘가를 보더니 천천히 활을 당겼다.

밤하늘은 맑디맑았고 별빛은 검처럼 반짝였다. 백의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의 화살은 은색 광선처럼 사람들의 시선 속에 긴 꼬리를 남기며 행시 떼 안으로 쏘아졌다.

화살은 아무것도 맞추지 않고 곧게 바닥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화살의 힘은 극도로 강해서 지면에 드러난 절반의 화살대가 윙윙 울리며 진동했다. 화살을 알아차린 행시들은 화살대의 진동 소리에 이끌렸다. 화살에 제일 가까이 있던 행시가 무작정 손을 뻗어 화살대를 만지려 했다. 행시의 손이 화살대에 닿는 순간 화살대의 진동은 수천수백 배 커졌고 웅웅 울리던 소리는 돌연 천둥처럼 변했다. 화살대의 진동하던 힘은 놀랍게도 거대한 반동을 형성하며 무시무시한 행시를 튕겨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