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87화 (18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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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13)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칼자국을 따라 적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잘 드는 칼에 얼굴 정중앙을 베인 것이었다. 상처는 매우 깊고 근육도 말려 있었다. 두개골도 베인 것 같았다. 애초에 분명 대량의 피를 흘렸을 것이다. 누구든 이런 부상을 당한다면 의원이 바로 옆에 있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희야는 전력을 다한 제 공격에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그 창에 뼈가 몇 대는 부러져 고통에 데굴데굴 구를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적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그자는 천천히 회백색 눈을 움직여 둔하게 희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눈을 본 희야는 이해했다.

산 사람이 아니었다. 전에 궁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행시가 재차 칼을 들어 올렸다.

희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문 닫아!”

엽근은 흠칫하며 있는 힘껏 문을 닫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에 등을 기대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희야는 문으로 달려가 엽근을 홱 잡아당겨 한쪽으로 밀쳤다. 엽근의 등이 문에서 떨어지자마자 날카로운 패도 한 자루가 얇은 나무문을 뚫고 들어왔다. 칼끝에는 핏자국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이어 문틀이 흔들렸다. 적이 달려들던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세게 문에 부딪친 것이 분명했다. 그것들은 본래 동작이 민첩하지 못했다.

희야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는 창끝에 힘을 모아 한 손으로 내질렀다. 호아창이 나무문을 꿰뚫었다.

창에 찔린 인체의 압력을 뚜렷하게 느낀 희야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재차 힘을 주었다. 희야는 거의 아물어가던 뼈가 다시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희야는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극렬지창, 쇄갑!

두 번째로 힘을 실은 창술이었다. 처음 일격에서는 힘을 주어 목표물을 찔렀고, 두 번째 힘이 실린 창으로는 갑옷을 관통해 상대의 숨통을 끊었다.

이 일격으로 희야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소모했다. 그는 문에 꽂힌 호아창을 내버려둔 채 바닥에 앉아 문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의식이 또렷했다가 흐릿해졌다가 했다. 엽근은 어린 공주를 끌어안고서 필사적인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행시는 희야에게 궤멸되었는지 더는 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 위치가 노출되어 버렸다. 더 많은 묵직한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희야는 고개를 돌려 벌어진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질주하며 사람을 죽이던 검은 형상들이 지척에 있는 사냥감도 내버리고 발을 질질 끌며 그들의 막사로 모이는 것 같았다.

“안쪽 방에 숨어! 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

희야가 온 힘을 다해 엽근에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이렇게 별 크지 않은 동작도 지금은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식은땀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어깨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희야는 거의 혼절할 것 같았다. 엽근은 넋이 나간 채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희야는 온 힘을 다해서 엽근을, 그녀의 먹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희야는 머리가 몹시 아팠다. 스스로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과 똑같은 까만 눈을 가진 맞은편의 여자를 싫어했다. 하지만 방금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그녀를 구했다. 그 행시가 칼을 드는 순간 희야는 돌연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이 여인이 죽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왜 두려웠을까? 별 상관도 없는 데다가 소름끼치는 눈까지 가진 여자가 아닌가.

희야는 왜 그렇게 그녀가 싫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피하고 싶었다. 오래된 우물 같은, 새카맣고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는 그 눈을.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을 보니 불현듯 눈 깊은 곳에서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한 변화가 느껴졌다. 오래된 우물 깊은 곳의 물이 여전히 달빛에 반사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자기를 닮은 사람이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보니 이 여자가 확실히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

희야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희야! 희야!”

누군가가 밖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희야는 돌연 기쁨에 차 밖을 내다보았다. 하당군 차림의 기병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앞장선 사람은 두 손으로 매우 긴 군도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여귀진이었다.

불현듯 나타난 적에 놀란 행시들은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여귀진에게로 달려들었다.

여귀진은 바로 포위되었지만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이미 이런 것들을 보았다. 여귀진은 영월을 휘둘러 행시의 어깨를 내리쳤다. 칼은 정확하게 놈의 심장을 찍었다. 그때 다른 행시 하나가 등 뒤에서 접근해 왔다. 여귀진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려룡구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려룡구가 다리를 쭉 뻗으며 뒷발을 날려 그 행시의 가슴을 찼다. 행시는 마치 투석기에서 던져진 돌 탄환처럼 멀리 날아갔다. 려룡구는 본래 청양 장군 여숭의 군마였는데 그가 막내아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려룡구는 동륙의 말과 달리 야생마를 길들인 것으로 수컷 말들이 초원에서 뒷발로 흉악한 이리를 차서 죽이는 전술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뒷발을 차면 무쇠도 부서뜨릴 수 있었다.

이들 하당 기병대는 식연의 근위병으로 일반 기병보다 훨씬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이들이 곧장 따라와 행시 떼를 막았다. 여귀진은 기회가 생기자 말을 몰아 막사로 달려갔다. 그는 발로 방문을 뻥 차서 열었다. 문가에 기댄 희야와 어린 공주를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엽근이 보였다. 그제야 여귀진은 한숨을 돌리며 안심했다.

“세자! 등 뒤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흠칫 놀란 여귀진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아래로 쭈그려 앉았다. 쌩 하며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두피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귀진은 두 귀가 윙윙 울렸다. 희야가 허리춤의 청사를 끌러 던졌다. 여귀진은 허공에서 청사를 받아 힘껏 털어 가죽집을 벗겨냈다. 그리고 곧바로 용수철처럼 뒤로 튕겨져 나가며 견갑으로 행시의 가슴을 쳤다. 행시는 움직임이 커서 근접 공격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행시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귀진은 이미 청사를 그것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만족의 용맹한 사냥꾼이 곰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곰에게 바짝 붙어서 상대할 때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 단칼에 생사가 달려 있었다.

행시가 쓰러지고 여귀진도 순간 힘이 풀렸다. 행시의 몸에서 풍기는 끔찍한 냄새에 여귀진은 구토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막사 안으로 들어가 희야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거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전에 지하 궁전에서 본 그것들이야! 놈들은…… 불에 타죽지 않았어? 도망쳐 나왔나?”

희야가 나직하게 물었다.

“모르겠어. 밖에 죄다 이런 것들이야.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어. 우리 쪽 사람보다 많을지도 몰라.”

여귀진이 힘껏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꽤 많이 죽였는데도 끝이 없어. 죽여도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일어나.”

“이것들이 설마 애도 낳나?”

“무슨 소리야?”

여귀진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저번에 수십 명에 불과했는데도 거의 우리를 죽일 뻔했잖아. 근데 이번엔 이렇게나 많으니까! 애를 낳은 게 아니면 어떻게 이리 많아졌겠어?”

희야는 계속 숨을 헐떡이며 눈을 부릅떴다.

“농담하냐?”

잠시 말이 없던 여귀진은 뜻밖에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넌 괜찮아?”

“젠장할! 괜찮겠어? 벌써 세 번째 부러졌어…….”

희야는 안색이 창백했다. 식은땀도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까의 쇄갑 일격은 거의 희야 자신도 죽일 뻔했다. 지금 희야의 부상 정도는 영무예의 패도를 막 받아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별일 없음 좀 참아. 어쩌면 다 죽을 수도 있어.”

여귀진이 영월을 세워 칼날의 삼엄한 곡선을 응시했다.

“재수 없는 말 하지 마! 너 우리 구하러 온 거 아냐?”

희야가 여귀진을 흘겨보았다.

“아니. 오는 내내 나도 살 자신이 없었어.”

여귀진이 일어나 막사 밖의 전세(戰勢)를 살펴보았다.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와 본 거야. 보니까 안심이 좀 되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희야가 여귀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입구를 지킬게. 못 지켜도 원망하진 마라. 어차피 구사일생이야. 여기서 싸우는 게 아무래도 밖에서 막무가내로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낫지.”

여귀진이 고개를 돌려 희야를 흘끗 쳐다보았다.

여귀진은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힘껏 달려 나갔다. 행시 한 구가 그를 등지고 있다가 막 돌아서는 찰나였다. 행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여귀진이 놈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행시가 생전의 두꺼운 제식 갑옷을 입고 있어서 영월도 단번에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여귀진은 재차 기합을 넣으며 다리에 힘을 주고 칼끝으로 행시를 빠르게 밀고나갔다. 행시를 1장 밖으로 밀어내고서야 영월은 갑옷을 뚫고 들어갔고 더는 걸리는 것 없이 행시의 심장을 파괴했다. 여귀진은 왼손의 청사로 깔끔하게 그것의 목을 그었다. 보기 드문 명도(名刀)인 청사는 가볍게 행시의 목을 베었다.

차츰 하당 기병들이 여귀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은 군마를 버리고 등을 맞댄 채 수비했다. 여귀진은 왼손에는 청사를, 오른손에는 영월을 들고 바퀴처럼 칼을 휘둘렀다. 문 앞에 박힌 못 같았다. 행시들은 그의 방어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젠장, 저 자식 성질이 폭발하니까 우리는 상관도 안 하는 거야?”

희야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또 넘어지고 말았다.

엽근은 벌벌 떨면서 다가와 그를 부축하려 했다. 희야가 매섭게 그녀를 쏘아보고는 기어가 문에서 호아창을 뽑았다.

“공주 데리고 안에 들어가 있어! 문 닫고! 안 들려?”

희야가 엽근을 향해 힘없이 외쳤다.

“여기서 우리 방해하지 말라고!”

엽근은 넋이 나갔는지 그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멍하니 희야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새카만 눈이 마주쳤다. 하나는 두려운 눈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노한 눈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희야는 애써 눈을 부릅떠보았지만 마음이 약해졌다. 희야는 생각했다.

‘정말 짜증나! 또 저 눈을 마주쳤어…….’

엽근을 보고 있던 희야는 이곳에 속하지 않은 어떤 음성을 들었고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냄새를 맡았다. 목소리는 북소리처럼 높고 아득했으며 냄새는 홰나무 꽃 냄새 같은 것이 공기 구석구석에 자욱하게 퍼졌다. 희야는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햇빛…… 햇빛이야.’

희야는 생각했다.

그랬다. 그 하얀 빛깔은 햇빛이었다. 오후의 햇빛이 지붕 한가운데 천창에서 쏟아져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누군가가 희야의 곁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밖에서 교전하는 함성이 계속 들려왔다. 희야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공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희야가 나직한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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