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80화 (18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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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6)

“그럼 이번 병력 이동은…….”

“황실의 대군이 우리에게로 올 것 같으냐?”

식연이 고개를 들어 제 조카를 쳐다보며 물었다. 식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을 세운 제후를 주살한다고요? 너무 황당한 생각 같은데요.”

“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리 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 사실 황실도 한 지역의 힘을 장악한 일개 제후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후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하지. 그래서 저들은 그 어떤 제후보다도 더 패권을 부르짖는다. 특히 그들이 세력을 잃어가는 때일수록 말이다.”

식연이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손쓸 기회가 있다면 저들은 분명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구나. 저들은 제후국을 무너뜨릴 병력이 없고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식연은 깊이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규가 서신에서 명단 집계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현재 찾아낸 천구 계승자는 대략 1천80명인데 다 알리지는 않고 개중에 믿을 만해 보이는 사람에게만 줄을 대놓았답니다. 그런 사람이 대략 250명이랍니다.”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적구나.”

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7종주의 계승자는 현재까지 알려진 사람이 넷뿐입니다. 나머지 반지는 단서가 없어요. 어쩌면 벌써 없애버렸을지도요.”

“아니. 다섯이다. 나는 다섯 번째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쪽 대는 이미 끊겼다.”

식연이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숙부.”

식원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다시 매의 휘장으로 그들을 소환하면 정말 돌아올까요?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요.”

“돌아올 이들은 언제고 돌아온다.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나게 되어 있고.”

식연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진월과 언젠가는 붙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다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 편에 설 것인지, 그리고 그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될지…….”

식연이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누가 알겠느냐? 전장에 나선 사람이 지원군이 언제 올지 어찌 알겠어? 언제 죽을지는 또 어찌 알고?”

“결국…… 전쟁을 하나요?”

식원이 나직하게 물었다. 식연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내 스승님은 진월을 이렇게 비유하셨지. 진월교도는 야수와도 같다. 그들의 머리에 죽간을 묶고 신선한 고기를 매달아 두면 눈앞의 고기를 보고 필사적으로 달려가 입을 벌리고 베어 물려 한단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가면 고기도 자연히 앞으로 가게 되니 영원히 그 고기에는 닿을 수 없지. 하지만 그들은 지쳐 죽는다고 해도 멈추지 않는다. 고기의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진월에게 신선한 고기는 곧 신 같은 힘과 이 세상처럼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다.”

식연은 제 조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큰 유혹이라 거의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영원히 얻을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영무예가 이렇게 쉽게 후퇴하다니 나는 매우 놀랐단다.”

“놀라셨다고요?”

식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리군이 결코 쉽게 후퇴했다고 할 수 없었다. 상양관 앞 전쟁터의 사상자는 충격적일만큼 처참했다.

“영무예의 퇴각은 진정으로 동륙의 판세를 바꾸지 못한다. 리국은 아직 패주의 위치에 있고 제후들도 여전히 친한 척하면서 딴 속셈을 품고 있지. 그렇다면 영무예가 황성을 떠났다는 것 말고 상양관 전투는 또 무엇을 바꾸었지? 이 전쟁의 배후에서 진월이 은밀하게 손을 썼다는 것을 줄곧 의심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진월의 대교주들이 신을 받드는 사자로 욕심이 매우 커서 옹색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저들이 진정으로 시국을 바꾸지 못하는 전쟁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식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식원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머릿속이 천 갈래 만 갈래 복잡해져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많이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그냥 두고 봐야지.”

식연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오늘밤은 진북군이 성 수비를 담당하지?”

“네.”

“성에 올라 고월의 장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

식연이 패검을 허리에 찼다.

그 시각 천계성. 백리 가문 고택의 수각(水閣).

물 위에서 불어온 밤바람이 몸에 닿자 뼛속까지 선득해졌다. 얇은 비단을 몸에 걸친 장공주는 양 어깨를 드러낸 채 담비 모피 가죽을 두르고 뇌벽성과 대국을 했다. 차를 끓이는 사환과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수각 밖에 서서 기다렸다.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수각 주위의 흰색 비단 장막이 춤추듯 한들거렸다.

장공주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약간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뇌벽성은 잔잔한 물처럼 평온했다. 그는 천천히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바둑 솜씨가 썩 좋지 않은 그는 겹겹이 포위된 바둑판 위에서 힘겹게 길을 찾았다.

“벽성 선생. 야심한 밤에 정말 바둑을 두자고 나를 찾은 겁니까?”

장공주는 몸에 두른 모피를 단단히 여몄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뇌벽성은 고개도 들지 않고 바둑판을 보았다.

“그 밖에 제 운도 시험해 보려고요.”

“운이라니요?”

“장공주께서 황성 대신들 사이에 바둑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바둑 실력은 리국공 전하보다도 못하니 당연히 장공주보다도 못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번에 제 운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이 판을 이긴다면 제 운의 흐름이 좋다는 뜻이니 상양관 일전에서도 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뇌벽성이 옷소매를 정돈했다.

“이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싶은 제 마음이 조금은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요.”

“벽성 선생 정도로 신술과 선견지명을 가진 분도 백의와 식연 같은 거친 무인들이 두렵습니까?”

“백의를 이길 자신은 있습니다만 식연은 절대적인 자신이 없습니다. 장공주께서는 천구라는 조직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천구요?”

장공주는 경멸하듯 피식 웃었다.

“황당무계한 무리들의 조직으로 사사로이 병력을 모아 조정을 뒤집으려 했지요. 황실의 명으로 제후들이 토벌한 지도 30년이 넘었을걸요? 이제는 남은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십수 년 전 진북국 명문가의 후손인 유장길이지요. 독보적인 사내였으나 천구 잔당의 꾐에 넘어가 가족을 배반하고 천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훗날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구에게 쫓기게 되었고 이후로 종적이 묘연해졌다더군요. 이후 천구도 자취를 감추었고 최근 10년간 몇 사례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식연이 이 조직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심지어 우두머리 격인 인물이라 말씀드린다면, 장공주께선 어떠실는지요?”

장공주가 흠칫 놀랐다.

“황실의 녹봉과 폐하께 봉호를 받고 하당의 군권을 장악한 위풍당당한 어전우 장군이 역당과 결탁했다고요?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폐하께 아뢰고 하당국에 명을 내려 그를 하옥해야겠지요!”

뇌벽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식연은 너무나도 똑똑한 사람입니다. 주변에 겹겹의 보호막을 쳐두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리 쉽게 정체를 드러낼 인물이 아니지요. 하여 이런 이야기는 장공주께나 할 수 있습니다. 장공주께서는 절대 경솔하게 폐하께 아뢰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식연의 가면을 벗길 때가 아닙니다.”

“벽성 선생은 왜 그리 식연을 두려워합니까?”

“아니,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천구입니다. 그자들은 불멸로 유명하니까요…….”

뇌벽성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불멸은 한낱 전설에 불과하지만 꽤 오랜 세월 들어맞기도 했지요.”

뇌벽성이 천천히 바둑판에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불멸은 가장 위대한 기적이자 무시무시한 저주이기도 합니다.”

장공주는 멍하니 수각 밖을 바라보는 뇌벽성을 보았다. 뇌벽성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일이 흔치 않은지라 마음속에 한 줄기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장공주는 함에서 바둑돌을 움켜쥐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둑돌이 하나, 하나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지나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바둑돌이 달그락달그락 부딪치는 소리만 미약하게 울렸다.

장공주가 망설이며 바둑돌 하나를 내려놓았다. 바둑판 옆의 작은 등잔 불빛에 바둑돌들 사이로 검은색 끈적끈적한 것이 보였다. 불결한 것을 싫어하는 장공주는 등 심지를 뽑는 은잠으로 그것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걷어지지 않고 도리어 은잠에 묻었다. 잠을 그대로 등불 아래 내려놓은 장공주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반짝이던 은빛 표면에 핏빛이 가득했다.

장공주는 뇌벽성을 쳐다보았다. 뇌벽성은 여전히 넋 놓고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쥔 바둑돌은 바둑판 위에서 내려올 듯 말 듯 했다. 뇌벽성의 좁은 소매 안에서 끈적끈적한 적흑색 피가 뚝, 뚝 바둑판에 떨어졌다.

장공주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디에선가 수면 위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수각 전체를 휩쓸었다.

얇은 비단 장막이 휘날리고 등불이 꺼졌다. 차를 끓이던 사환은 바람에 날아간 죽선(竹扇)1)을 쫓아갔고 차가 끓던 작은 화로에서는 붉은 숯이 번쩍번쩍 빛났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얼른 발을 내디디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곧 돌진하려는 맹수 같았다.

“벽성 선생.”

장공주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뇌벽성은 홀연히 옷소매를 잡아 손아귀에 감추었다.

“저도 반서(反噬)를 피할 수는 없군요.”

뇌벽성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둑판 위에서 소매를 털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오늘 밤은 일이 있어 송구하오나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뇌벽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자 검은 옷을 입은 제자도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차를 끓이던 사환이 다시 등잔에 불을 붙이자 장공주도 약간 정신이 들었다. 뇌벽성의 인영이 곧 보교 멀리 사라지려 했다. 장공주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살펴보았지만 핏자국은 전혀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환영 같았다. 뇌벽성이 소매를 휘두르는 순간 싹 사라져버린 듯했다.

장공주는 한쪽에 떨어진 은잠을 들어 불빛 아래로 가져갔다.

은잠에는 순은에 덴 것 같은, 매우 가느다란 핏빛 흔적이 한 가닥 남아 있었다.

뇌벽성의 소매 안에서 흘러나왔던 진짜 피였다. 그 장면은 환각이 아니었다. 바둑판에 떨어진 차갑고 끈적거리던 피는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의 상처에서 짜낸 것 같았다.

상양관, 하당군 치중 부대.

희야는 눈을 크게 뜨고 지붕을 쳐다보았다. 등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으로 밖의 병사들이 밥 짓는 불빛이 번쩍번쩍 비쳐 들어왔다. 일반 군사는 이 막사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여귀진은 식연의 곁에서 명령을 받드느라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엽근은 포로인지라 화재를 일으키기 쉬운 물건은 사용할 수 없었고 무기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컴컴한 어둠 속에서 여귀진이 밤늦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 *

1) 댓개비로 만든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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