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8화 (17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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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4)

여귀진은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동여맨 찬합을 안고 자신과 희야가 머무는 막사 밖까지 걸어왔다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말소리를 들었다. 엽근의 목소리였다. 조용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밖에서는 말 많이 하지 마. 어떤 일을 당하든 조용히 있으면 돼. 입을 열면 도리어 저들이 비웃을 거야.”

“저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걱정할 것 없어. 비웃음 당하면 어때서? 처음 비웃음 당하는 것도 아닌걸. 여기 상양관의 사람들은 죄다 거칠어. 저들을 화나게 하면 맞을지도 몰라.”

“알아, 알아. 속으론 잘 알지만 말이 안 나오는 거잖아. 가만히 있어. 잠깐이면 돼.”

“남들은 신경 안 써줘. 스스로 챙겨야 해. 항상 알아서 머리 감고 하나로 묶는 거 잊지 마. 또 오랫동안 머리 안 감았지? …가만히 있어. 눈 감고. 그래야 물이 안 들어가지.”

여귀진은 깜짝 놀랐다. 이곳은 치중 부대의 중심으로 수비가 삼엄하고 다니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식연도 소주 공주를 이곳에 두라 명했고 동시에 일반 군사는 이 막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곳은 중급 군관이 머물도록 준비된 막사로 잠자는 작은 방이 두 개 있는데 방 하나에는 희야와 여귀진이 묵고 다른 한 곳에서는 엽근과 소주가 묵었다. 가운데에는 누추한 마루가 있었다. 여귀진은 엽근이 누구와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 말하는 것 같은데 소주 공주는 아니고 낯선 이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낯선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여귀진은 경계심이 일어 칼자루를 쥐고서 빗장을 걸지 않고 닫아두기만 한 문을 살짝 열었다. 그는 매우 조심하면서 일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 괜찮아질 거야.”

엽근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엽근은 문틈으로 누군가가 엿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힘껏 손안의 백발 한 움큼을 주물러 씻었다. 옆에서는 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대야 옆에 엎드린 채로 엽근에게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틀어 문틈을 마주했다. 여귀진이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보았는지 돌연 눈빛을 번득이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여귀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짓궂은 아이 같았다. 그자는 양쪽 코에서 흘러내린 맑은 콧물을 훌쩍거렸다.

화들짝 놀란 여귀진은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남의 비밀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노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여귀진을 향해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귀진은 그 노인을 알았다. 그는 연합군이 성을 함락한 후 잡혀온 차기도호 엽정서, 엽근의 아버지였다.

그는 엽근의 부탁이 떠올랐다. 저는 아직 식연에게 말도 못 꺼냈는데 엽정서가 벌써 이곳에 나타나 있었다. 여귀진은 살짝 의아해 하면서 계속 말없이 지켜보았다.

엽근은 깨끗하게 씻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싸매고 제 아비를 대신해 말려 주었다. 노인은 이미 머리카락이 얼마 없어서 물에 젖자 듬성듬성 허연 두피가 드러났다. 엽근은 뾰족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두피를 긁으며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빗이 없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엽정서가 갑자기 킬킬 웃기 시작했다. 엽근의 빗질이 간지러운 듯했다.

“가만히 있어.”

엽근이 엽정서의 머리를 바로하며 말했다.

“아직 다 안 말랐단 말이야.”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고 끼이익 소리가 나며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여귀진은 예상치 못한 사고에 피할 틈이 없었다. 여귀진과 엽근은 정면으로 마주쳤고 두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 여귀진은 멋쩍게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후 여귀진이 허리춤을 더듬어 빗을 꺼내더니 고개를 숙인 채 엽근에게 건넸다.

엽근은 묵묵히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세자. 상양관에는 남자뿐이라 빗을 구하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내 거 아니야……. 친구 주려고 산 거야.”

여귀진이 웅얼웅얼 말했다.

원색의 나무빗은 우연에게 주려고 산 것이었다. 나무빗의 한쪽 귀퉁이에는 날개를 펼치고 저회하는 새가 조각되어 있었다. 매우 뛰어난 솜씨였다. 여귀진이 남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그가 있는 집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무 빗 장사꾼이 동서고금의 온갖 좋은 말이란 말은 다 하며 이 나무 빗을 팔았다.

장사꾼은 쉴 새 없이 물었다. 머리칼이 새카맣고 물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낭자에게 선물하려는 거 아니냐면서.

여귀진은 우연의 머리카락이 물처럼 반지르르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금빛이었다.

장사꾼은 그 낭자가 거리에서 이렇게 정교한 나무빗을 머리에 꽂으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도 물었다.

여귀진은 답답해하면서 왈가닥처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우연의 성격상 머리에 쇠 우리를 씌워두어도 잃어버릴 판인데 빗은 오죽하겠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장사꾼은 또 나무빗의 솜씨를 보라면서 완주 10개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집이며 남회성에서는 유일무이하다고 했다.

여귀진은 아무리 좋은 나무빗이라도 욱 세자 곁에 있는 낭자들이 쓰는 무늬가 새겨진 단향목 빗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나겠지 하고 생각했다.

장사꾼은 마침내 이 고객을 견디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싼 빗은 아니지만 이 빗이 오늘 이후로 매일 낭자의 긴 머리칼 사이를 수백 번 오갈 텐데, 그럼 그 낭자에게 연정이 깃드는 게지요! 그녀가 멀리 떠나간다고 해도 공자께서 선물한 빗을 쥐고 있다면 그녀 곁에서 공자가 한순간도 떠나지 않은 것 같지 않겠습니까요? 한데 겨우 이만한 돈을 아까워하십니까?”

순간 멍해진 여귀진은 묵묵히 금수 한 냥을 꺼내 빗을 샀다.

헤어지기 전날, 여귀진은 품에 이 빗을 간직한 채 강가에 서 있었다. 그는 달빛 아래 우연과 희야가 담벼락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야가 무슨 말로 우연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은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쭉 펴고 새처럼 사뿐하게 담장 위를 휙 지나 멀리 사라져버렸다.

희야의 발에 밟혀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강물 속에 빠지며 잔잔한 물결이 퍼져나갔다. 여귀진은 고개를 숙이고 잔물결 속 부서진 달빛을 바라보며 전해주지 못한 품속의 빗을 만지작거렸다.

여귀진은 바보처럼 한쪽에 앉아 시름에 잠긴 얼굴로 엽근이 제 아비를 위해 머리를 빗겨주는 모습을 보았다. 얌전히 무릎에 두 손을 놓아둔 노인은 아이처럼 고분고분했다.

엽근은 엽정서의 머리를 다 빗고 콧물도 닦아주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초위국 군대가 밖에 서 있었다.

여귀진은 칼을 쥐고 일어났다. 초위국 군교가 다가와 여귀진에게 인사를 올렸다.

“초위국 백의 장군 휘하의 근위병 교위 사추역, 정보선이 여귀진 세자를 뵙습니다.”

앞에 선 사추역이 뜻밖에도 여귀진을 알아보았다.

“여기는 왜 왔지?”

여귀진이 물었다.

“식 장군께서 엽정서 대인의 딸이 공주를 보호한 공이 있다며 부친을 뵙게 해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백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엽 대인을 데리고 다녀오라 하셨지요. 이제 밤이 깊어 돌아가야 합니다. 엽정서 대인은 아직 죄인이라 가둬두어야 하거든요. 사면 여부는…….”

사추역이 엽근을 흘깃 보고는 말을 이었다.

“천계에 도착하면 폐하께서 결정하신다 합니다.”

“아, 그렇구나.”

여귀진은 식연이 몹시 산만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다 기억하는구나 싶어 놀랐다.

노인이 입속으로 엉엉 소리치며 엽근의 손을 잡아당겼다. 훌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럽게 제 아비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엽근은 돌연 그의 눈꼬리에서 눈곱을 발견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 다가가 엽정서의 눈꼬리를 후후 불면서 가볍게 닦아주었다.

지금 엽근과 엽정서는 딸과 아비 사이인지, 어머니와 자식 사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귀진은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 고개를 숙였다. 초위국 군교도 엽정서를 데려가려고 다가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의 모든 이가 그저 말없이 서 있었다. 엽근은 발끝을 세우고 엽정서 대신 눈가를 닦아주었다.

엽근은 수건을 도로 넣고 엽정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엽정서가 틀어쥔 그녀의 손이 발개졌다. 엽정서는 놀랍게도 힘이 상당했다.

“아버지. 군관분들과 돌아가.”

엽근이 조용조용 말했다.

초위국 군교들이 엽정서를 데려갔다. 엽정서는 필사적으로 딸을 돌아보며 꺼억꺼억 울먹였다. 그러나 두 팔이 교위들에게 붙잡혀 저항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

엽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엽정서와 군교들의 인영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엽근과 여귀진이 마주섰다. 둘 다 조금 어색해져 말이 없었다. 여귀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과 희야가 묵는 방으로 가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엽근이 말을 꺼냈다.

“세자.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여귀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식 장군과 백 장군께서 한 일이야.”

“그럼 두 분 장군께 감사드려야겠네요. 무탈하신 걸 보니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여귀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네게 엽 대인을 만나게 해준다고 하면서 실은 공주의 근황을 보러 온 거겠지.”

여귀진은 군교 둘 중에서 앞에 나섰던 사추역이 떠나기 전 계속 소주 공주가 머무는 방을 흘끗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희야와 함께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을 걸어 잠근 그는 새카맣게 빛나는 두 눈을 마주했다. 희야가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희야는 아직 깨어 있었다.

“과일 먹을래?”

여귀진의 뜬금없는 물음에 희야가 묵직하고 거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과일?”

“오늘 황성에서 흠차가 왔는데 황제가 하사한 궁중의 과일을 가져왔어.”

여귀진이 수중의 찬합을 들어 보였다.

“장군께서 나눠 주신 거야. 엄청 달지만 자환궁의 떡만큼 맛있지는 않아.

“이게 다야?”

희야는 여귀진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귀한 물건들과 조서도 있었지.”

여귀진은 희야의 침상 가에 앉았다. 그는 몸의 피로를 떨치려 심호흡을 했다.

“근데 군량과 약재가 없어. 식량은 곧 떨어질 거고 부상병을 치료할 약재도 없어. 오늘 백 장군께서 엄청 화를 내셨대. 보급이 빨리 되지 않으면 초위군은 먼저 상양관에서 철수하겠다고 했다더라.”

여귀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북륙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최대의 영광이야. 어느 장군이든 적을 쳐부수면 목민들은 집의 모든 소와 양을 죽여서라도 대접하고 주군도 큰 사절단을 보내서 기물과 가축, 노예를 하사해. 여기랑은 달라. 여긴 승리해도 사람들이 금세 잊어버리는 것 같아.”

“우린 어떻게 한대? 장군께선 무슨 말씀 없으셨어?”

“장군께선 아무 말도 안 하셨어. 나랑 식원이 막사에서 나올 때, 장군께선 안에서 금을 연주하고 계셨지.”

“금을 연주해?”

“남회의 속요인 <불여귀(不如歸)>를 연주하셨어. 장군께서도 철수하실 생각인가 봐.”

여귀진이 지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는 약간 이번 출정에 그리 열심이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장군께선 그 무엇에도 적극적이지 않지.”

희야의 말에 여귀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시간 있으면 나가서 물 한 대야만 받아다 주라. 얼굴을 좀 씻어야겠어. 더러워서 꼴이 말이 아니야.”

“근아가 얼굴 안 닦아줬어?”

희야가 돌연 미간을 구겼다.

“근아는 무슨. 되게 친한 것 같네. 난 병신처럼 남의 수발은 받고 싶지 않아.”

잠시 후 희야가 말을 보탰다.

“난 그 여자 싫어.”

“왜?”

여귀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그 여자가 너랑 좀 닮았다고 생각했는걸? 근아의 눈 봤어? 너처럼 완전히 새카매. 정말 희귀한 눈이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희야는 얼굴에 몹시도 싫은 티를 내며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어쨌든 난 그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 보면 짜증난다고. 어디가 나랑 비슷하다는 거야?”

여귀진은 희야의 황소고집을 알기에 더 어르지 않고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난 물 받으러 간다.”

여귀진이 방에서 나왔다. 엽근은 문지방에 앉아 있었다. 밖의 어둠을 마주하고 앉은 그녀의 늘씬한 뒷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조각상처럼 조용했다. 여귀진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마루 한 귀퉁이의 유일한 구리 대야를 집어 들고 엽근의 옆을 성큼 넘어서 나가려고 했다. 엽근은 살짝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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