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7화 (17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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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3)

“이뿐이오?”

백의가 불쑥 물었다.

백극근은 백의의 냉담한 말투에 속으로 살짝 의아했다. 떠나기 전 내감들이 모두 백의가 냉담하고 무례한 사람이라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풍성한 하사품에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백극근은 차마 티를 내지는 못하고 한껏 웃는 얼굴로 말했다.

“조서는 이것이 다입니다. 폐하께서 초서로 쓰신 것이지요. 정식 포상 조서는 아마 대신들이 쓴 뒤에 전해질 것입니다. 백 대장군은 황성을 떠받드는 기둥이니 대충 할 수는 없지요.”

“포상을 묻는 것이 아니오. 황성에 들어가 식량과 약재를 보급받게 해달라고 청한 일을 묻는 거요. 그에 관한 지시는 없으셨소?”

백극근은 이마를 탁 쳤다.

“제가 그만 부주의하여 그 일을 깜빡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조서에 쓰기 곤란한 말을 따로 전하라 하셨지요.”

그는 백의의 귓가로 몇 걸음 다가가 비위를 맞추듯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하 대군의 수령인 백 대장군을 곧 만날 수 있기를 몹시 고대하신답니다. 백 대장군께서는 초위국에 출사하기 전 황성의 금오위였으니 황실과 인연이 정말 깊고도 깊지요. 그러나 대대로 제후국의 군대는 왕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이는 관례로 굳어졌습니다. 한데 막 살육을 한 백 대장군의 용맹한 병사가 지금 황성에 들어 황성의 길한 기운을 해칠까 염려하셨습니다. 신하들도 매우 걱정하고요. 하여 백 대장군은 옛 예법에 따라 공손히 세 번 청하고 폐하께서는 흠천감에 성상(星相)을 계산해 길일을 선택하도록 일러두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리 하면 나이든 신하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면서요.”

“예법에 갖춰 공손히 세 번 청하고 길일을 선택해?”

백의가 차갑게 백극근을 쳐다보았다.

“표면적인 일들이니 며칠 안 걸릴 겁니다. 폐하께서는 할 수 있다면 날개라도 달고 날아서 역신 영무예를 물리친 걸출한 장군을 만나러 오고 싶어 하셨답니다!”

백의의 눈빛에 놀라 가슴이 오싹해진 백극근은 저도 모르게 점점 낯간지러운 말을 해댔다. 황제가 편전에서 그에게 위엄과 차분함을 잃지 말고 황실의 명망을 지키라 한 당부도 완전히 잊고 말았다.

백의가 말없이 흠차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흐르고, 마침내 백의는 시선을 옮겨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참, 한 가지 잊은 게 있습니다.”

백극근은 머리를 쥐어짜 무언가를 생각해내더니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살갑게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약재가 부족하다는 백 대장군의 말을 들으시고 특별히 장공주께 부탁해 약재를 찾아 사절단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백의는 살짝 멍했다가 안색을 누그러뜨리며 무심결에 사절단 뒤를 바라보았다.

“오? 어떤 약재들이오?”

“장공주께서 백 장군을 위해 혈용 20쌍, 산삼 20쌍, 진주분 10량, 수정용연 10량, 백화향 10량…….”

백극근이 끊임없이 말했다. 이 약재 목록은 장공주의 당부에 따라 철저하게 외운 것이었다.

그는 읊고 또 읊으면서 백의의 낯빛이 하늘의 폭풍 구름처럼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백의의 눈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올 듯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백극근은 목록을 읊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결국 읊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백의를 쳐다보았다.

“백 대장군?”

백극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뭘 읊고 있는지는 아시오?”

백의가 조용히 물었다.

“알지요! 소신 이번 임무의 중대함을 알기에 매사 반복하여 살피고 조서와 약 목록도 달달 외웠습지요. 행여 백 대장군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 싶어 황성을 떠난 후 수레 안에서도 거듭 외웠습니다.”

“모르는군!”

백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백의가 휙 몸을 돌려 떠나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던 백극근은 식연과 고월의가 멀지 않은 곳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여 지체 높은 장군들을 언짢게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백극근은 어쩔 수 없어 식연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와 식연은 황성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더랬다.

식연은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와 백극근과 인사를 나누었다.

“식 장군. 백 대장군께서 기분이 안 좋은 겁니까?”

백극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좋소. 아주 안 좋지. 저이는 평생 기분이 좋을 때가 별로 없다오.”

식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쟁반에서 자유 벽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식 장군. 그건…… 백 장군께 내려진 하사품입니다. 장군 것은 곧, 곧 올 것입니다.”

백극근은 식연을 제지하려 했으나 말하기가 머쓱했다.

“우리는 식량도 없고 약도 없소. 상양관 앞 수백 리는 고립된 땅이라 우리 근왕병들은 재물을 약탈할 수도 없지. 이런 곳에 옥벽은 가져와서 뭐 하오? 전병이었다면 백의가 조금은 기뻐했을지도 모르겠군.”

식연이 웃으며 옥벽을 쟁반에 내려놓고 백의를 따라갔다.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끼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잿빛 구름이 스산하게 온 하늘을 휩쓸었다. 무리를 이탈한 기러기가 하늘가에서 완곡한 호선을 그리며 날았다. 언제든 뭇산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기러기는 힘껏 날개를 퍼덕여 농밀한 구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하늘 아래 백의, 식연, 고월의가 말없이 걸어갔다. 백의가 불쑥 걸음을 멈추고 외로운 기러기를 쳐다보았다. 세찬 바람에 그의 하얀 전포가 휘말려 올라갔다.

“황성에 가까워지니 정말 추운 것 같군.”

식연의 말에는 은근히 뼈가 있었다. 오랜 침묵 뒤, 백의가 말을 꺼냈다.

“사흘 내로 군사들의 약 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단 상양관에서 철수합시다.”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흠천감에서 별자리를 계산해 장군의 황성 출입이 길한지 흉한지 점치는 것을 안 기다릴 테요? 태묘를 참배하는 것은 백 대장군에겐 영광이 아니오!”

“시간이 없소. 매 일각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어.”

천계성. 사면에 엷은 장막이 쳐진 수각 안.

장공주가 좌상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입을 가리고 웃었다. 뿌듯한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지금쯤 백의는 바라던 약재와 보급을 받았겠군요. 정말이지 그 표정을 직접 보고 싶네요.”

“시간을 끄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백의는 크게 노하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그에게 더 해를 입히지는 못할 겁니다. 백의는 이 시대의 군왕(軍王)이니 그를 정말 격노케 하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지요.”

책상다리를 하고 맞은편의 좌상에 앉은 뇌벽성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두 개의 좌상 가운데에서 숯이 타고 있었다. 따뜻하고 조용했다. 화로 안에는 향료를 첨가해 숯이 타들어갈수록 따스한 향이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아녀자인 저는 도량이 작아서인지 오만방자한 이들이 무력할 때의 상판을 보고 싶더군요. 백의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을지 보죠!”

장공주가 차갑게 웃었다.

“백의는 너무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에게 손을 쓰려면 치명적인 일격이어야 하지요. 그 정도의 자신이 없다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뇌벽성이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치명타를 가하지요?”

“장공주께서 병력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에 달렸지요. 장공주 수중의 4만 군대가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금오위든 우림천군이든 2개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당양곡 어귀로, 다른 하나는 상양관 아래로 밀고 나가는 겁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곧 백의는 완전히 포위될 것입니다. 활로를 남겨둔다면 상양관을 백의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라 할 수 없겠지요.”

“우림천군은 비교적 괜찮지만, 금오위는……. 벽성 선생은 제멋대로에 분별없는 녀석들을 못 보셨지요. 황성 안에서 그들은 세상 무서운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전장에 풀어놓으면 그들이 받은 훈련과 담력이 지금의 열 배가 된다 하여도 백의에게 잡아먹힐 육고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공주가 길게 탄식하며 근심스럽게 말했다.

“벽성 선생께서는 정말 자신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강자와 약자의 형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독을 지닌 모기 한 마리가 무소 한 마리를 물어 죽일 수도 있지요. 금오위 또한 결성했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정예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장공주께선 빨리 황제께 사람을 보내 황실의 무기고를 열어 달라 청하십시오. 제 정보가 맞는다면 지금 무기고에는 2만 5천 개의 정제된 중노(重弩)가 있습니다. 공주께서는 이 중노로 군대를 무장하십시오. 이것은 굉장히 우수한 노로 설계가 완벽하고 결점이 없으며 사용도 쉽습니다. 위력과 사정거리도 훌륭하지요. 무경험자라 하더라도 한나절이면 사용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조준하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진을 치고 화살을 쏘기만 하면 됩니다. 진형은 제가 이미 그려서 장공주 옆에 두었습니다.”

장공주가 좌상 옆의 도면 몇 장을 펼쳐 간략하고도 방대한 진형을 훑어보았다.

병법을 모르는 그녀였지만 매우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런 노가 정말 있습니까? 황실의 무기고는 희 황제가 승하한 뒤로 연 적이 없지요.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장공주는 반신반의했다. 2만 5천 개의 중노를 제작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황실에서 벌써 이런 무기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뇌벽성이 어디에서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도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있습니다. 사실 9년 전에 이미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뇌벽성의 말에 장공주는 아연해졌다. 얼떨떨한 느낌이 들었다. 흡사 이 모든 것이, 오늘날의 이 분란이 벌써 9년 전에 점쳐진 것 같았다. 모든 상황이 바둑판 위의 다툼 같았다. 바둑돌은 아직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방대한 계획이 벌써 세워져 있는, 그래서 모든 바둑돌이 그 계획에 따라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싸움.

“이 노가 정말 벽성 선생 말대로 쓸모가 있을까요?”

장공주는 이미 뇌벽성을 믿을 수밖에 없음에도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물었다.

“풍호철기의 갑옷을 꿰뚫기에는.”

뇌벽성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충분합니다.”

백극근이 조서를 읽던 그 시각 진국 진영.

진영 안의 가장 큰 막사는 비안이 공무를 보는 장소였다. 벽에 기대고 반듯하게 앉은 비안은 가볍게 눈을 감고 있었고 양쪽으로 진국군의 통령들이 줄을 지어 방안을 꽉 채우고 앉아서 한 사람씩 말하고 있었다.

“곧 식량이 떨어질 겁니다. 고작해야 사나흘치뿐입니다.”

백부장 하나가 보고했다.

“리군이 군수품을 싹 태워 버렸습니다. 남은 약간의 양식도 군사들이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니라 불더미 속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얼마 못 먹습니다.”

참모 하나가 또 말을 꺼냈다.

“약재도 심각하게 모자랍니다. 지금 의관은 통증을 멎게 해줄 물약도 못 만들고 있습니다.”

비안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우군에게 양식을 빌려 보았는가?”

“그랬지요. 진북국에서 승낙했는데 보내온 것은 귀리였습니다! 귀리는 말 먹이입니다. 우리 군을 놀리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백부장이 일어나 씩씩대며 말했다.

“이런 일로 군심을 흩트리지 말게. 양식과 약재는 필요할 때면 자연히 생길 것이야. 같은 편끼리 소란피울 것까지는 없네.”

비안이 느긋하게 말했다.

“곧 보급이 올지도 몰라.”

근위병 하나가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장군. 황성의 흠차가 벌써 병영 앞에 도착했다 합니다!”

“황성의 흠차가?”

비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빨리 왔군. 어디 나가 보지.”

군영 입구, 무사 하나가 바람 속에서 장포를 펄럭이는 청년 하나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그들은 어떤 깃발도 들지 않았고 다른 하인도 없었다. 사절단이라기에는 다소 궁색해 보였다. 그러나 청년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가진 듯한 온화함과 자신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청년의 존귀함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비안은 통령들 한 무리를 이끌고 청년 앞으로 가 섰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청년을 훑어볼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비안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행했다. 동작이 우아하고 고상한 것이 명문가 자제다웠다.

비안은 답인사를 하지 않았다.

“황실 대신의 예복을 입고 있는데 천계에서 온 거요? 한데 한 사람만 대동하다니, 그대가 폐하의 흠차라는 증표가 있소? 황성의 대신들은 내 다 잘 아는데 그대 같은 사람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말이오.”

비안은 돌연 눈을 길게 늘였다. 서슬 퍼런 눈빛이 쏘아져 나왔다.

“저는 황성 사절단의 부사입니다. 이름은 백리막언이고요.”

청년은 두 손을 옷소매 안에 그러모은 채 웃으며 예를 표했다.

“수행하는 이가 적어 초라한 감이 있습니다. 사절단의 정사 백극근 대인이 지금 백의 장군과 만나고 계시어 대부분은 정사 대인을 따라 백 대장군 쪽에 갔지요. 그러나 제가 병을 핑계로 서둘러 이곳에 온 것은 어떤 분께서 진국의 비안 장군에게 전언을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언?”

“약간의 약재와 양식도 가져왔습니다.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사실상 많이 가져오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도움은 될 것입니다.”

비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의 부탁이오? 난 그대를 모르는데.”

“안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제가 장군께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소식이 아닐지라도 저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위험하지 않은 맹인일 뿐이지요.”

“맹인?”

비안이 깜짝 놀라며 백리막언의 미소를 띤 듯한 눈을 쳐다보았다.

백리막언은 살포시 웃고 있었으며 펄럭이는 하얀 옷은 연꽃처럼 단아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살짝 흐릿했고 눈빛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에 모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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