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5화 (17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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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혼 없는 자들이 질주하는 밤 (1)

상양관, 하당국 치중 부대 주둔지.

여귀진이 행군 이부자리 하나를 안고 들어와 볏짚을 깔아둔 구들에 던졌다.

“장군께서 오늘부터 넌 여기서 지내면서 공주를 돌보라고 했어.”

그는 손가락으로 안쪽 막사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사람도 같이 돌봐. 뼈가 몇 곳 부러졌는데 의원이 뼈를 맞추고 묶어놨어. 못 움직이게 해.”

늘씬하고 예쁘장한 여인은 황공해하며 벽에 붙어 서서 두 손을 어색하게 허벅지 양쪽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다 뜯겨나간 옷은 갈아입었지만 머리는 아직 말끔하게 빗지 못했다. 새카만 두 눈에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지하 창고에서 구조되기 전 같지 않았다. 도리어 그때가 더 침착했다. 여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몸싸움할 때도 그녀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넋이 나갔던 것인지 두려움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밖에 나다니지 마. 여기는 치중 부대 중심이야. 사방을 대군이 에워싸고 있고 수비 인원도 늘렸어. 일반 군사는 여기에 드나들지 못해. 장군께서 공주가 곤란한 일을 겪을까 봐 특별히 이렇게 안배하셨어.”

여귀진은 가만히 있는 여자를 보며 대신 이부자리를 펼쳤다.

“나도 순찰 임무를 맡았어. 하지만 저녁에는 돌아올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여귀진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물품이 많이 부족해. 리군이 철수하면서 군수품과 양식을 많이 태워버렸거든. 며칠 후에도 보급이 오지 않으면 소병(燒餠)도 부족할지 모르겠어.”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다가오더니 여귀진의 손에서 이불을 빼앗아가 직접 펼쳤다. 숙련된 솜씨였다. 여귀진처럼 시중받으며 자란 귀족 소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 까먹었네. 이름이 뭐랬지?”

여귀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성은 엽, 이름은 근이에요.”

여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근아라고 부르시면 돼요. 공자는 귀하신 분이니 저희 같은 비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시면 안 돼요. 다음부터는 절대 하지 마세요.”

“귀천이 어디 있어?”

아연해진 여귀진은 엽근을 다독였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내가 듣기론 네가 예전에 상양관을 지키던 차기도호 엽정서 대인의 딸이라던데? 너도 명문가 출신이잖아.”

“네.”

엽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엽근과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어진 여귀진은 뒤돌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희야는 꿈쩍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젖힌 채 지붕만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거리가 있었던 여귀진은 꽁꽁 묶여서 넘어진 새끼 야수 같은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돌봄 따위 필요 없어!”

희야가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난 이렇게 있는 것도 아주 좋다고!”

“장군 지시야. 내 생각이 아니거든?”

여귀진은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술에 대 보였다.

“소리치지 마. 지금 소주 공주도 맞은편 방에서 자고 있어. 공주 전하 놀라게 하지 마.”

“아니, 내가 왜 여자 둘이랑 같이 지내야 하냐니까?”

희야가 씩씩대며 물었다.

여귀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장군께서 원래 하신 말씀은…….”

“원래는 뭐?”

“너는 꼼짝도 못 하는 상태니까 공주와 공주 시녀를 여기에 두는 게 마음이 놓이신대…….”

눈이 휘둥그레진 희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귀진을 쳐다보았다.

“…… 넌 못 움직이니까 공주의 예쁜 외모를 보고 딴마음 품지 않을 거라고.”

여귀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방을 나가며 왼손으로 문을 닫았다. 남아 있어 봤자 별로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여귀진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엽근이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해요. 죄지은 신하의 딸을 믿어주실 줄 몰랐어요.”

여귀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처음 엽근의 눈을 보았을 때부터 그는 한 번도 이 여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엽근의 눈이 약간 희야를 닮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전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차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엽근이 말을 해서야 이 여자가 원래는 반죄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귀진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희야와 어린 공주를 그런 여인에게 돌보게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공주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지 않아?”

여귀진은 잠시 머뭇하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적당한 사람도 없어……. 상양관 안에는 지금 다른 여자가 거의 없거든.”

“그 여자들은 전부…….”

여귀진은 소주 공주가 잠든 방을 흘긋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죽었어. 정 장군과 비 장군의 부하들이 화가 나서 나머지 여자들을 다 죽였지. 나중에 사람을 보내 보았더니 아래에 시체 12구가 있었어. 상 부인의 시체만 못 찾았는데 이젠 그녀의 행방은 물을 곳도 없어졌지.”

“혹시 아버지를 한 번만 뵐 수 있을까요?”

엽근이 작은 목소리로 간청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엽정서 대인도 지금은 괜찮대. 어디에 두었는지는 몰라. 장군께 가서 여쭤볼게.”

그 시각, 치중 부대에서 멀지 않은 곳의 부상병 군영.

백의와 식연, 고월의 세 사람이 막사에서 걸어 나왔다. 고월의가 문을 닫았지만 막사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과 울부짖음은 차단할 수 없었다. 백의는 초췌해진 얼굴로 미간을 구긴 채 입술을 얇게 말아 물었다. 식연과 고월의도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흘긋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뒤편의 막사 안에는 200여 명의 부상병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군영 내에 수용된 연합군 부상병만 못 해도 1만 2천 명이었다. 의관도 부족해서 치료 속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부상병과 의관이 모두 한 병영 안에 있었다. 하지만 리군이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연합군 군수품은 대량 손실되었고 약재도 부족해진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 필요한 약재가 없이는 의관들도 썩은 살을 도려내고 불로 지져서 상처가 짓무르지 않게 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상병이 죽어 나가는 숫자가 연일 늘어났다. 세 사람은 함께 부상병 부대를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보급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오!”

백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식연과 고월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대량의 보급을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래 상양관 안에는 각종 창고가 있었지만 리군이 철수하면서 모조리 태워버렸고 가장 가까운 초위국의 도시라도 약재를 조달하려면 최소 열이틀은 걸렸다. 식연이 입을 열었다.

“최악은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단 거요. 리공의 군대는 정말 맹수 집단이오. 궤멸되면서도 상대를 못살게 만드는군. 남은 쌀과 밀가루로는 길어야 열흘도 못 버틸 거요.”

고월의가 말을 얹었다.

“저희 군의 치중품은 요행히도 화를 피했으나 본래 가져온 식량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에게 먹일 귀리가 많으니 필요하면 가져와 군량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겁니다.”

“지척이 바로 천계이니 들어갈 수 있다면 보급이 참으로 쉬울 것을. 황제께서는 여전히 백 장군의 상소에 대답이 없으시오?”

식원의 물음에 백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관 수장이 막사 안에서 그들을 따라 나왔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그는 백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장군, 상황은 다른 몇몇 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재가 빨리 보급되지 않는다면…….”

“약재는 올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막사 안에서 들려왔다. 울부짖는 소리가 멈추고 이어 혼란스러운 기척이 들렸다. 막사 안의 부상병들이 일어난 듯도 하고 또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온통 시끌벅적했다.

깜짝 놀란 백의가 뒤돌아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때 의관 수장이 반걸음 앞으로 나와 백의를 제지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여 절을 했다.

“대장군.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이 일은 대장군이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무슨 일인가? 자네는 아는가?”

백의가 의관을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전 못 쓰게 된 다리를 자르려는데 마취약이 없었습니다. 아마 부상병이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의관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더 견디지 못하고 몰래 손목을 긋는 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간 매일 몇 명이 그러하였습니다. 대장군께서는 자주 오지 않지만, 이곳 사람들은 하도 들어서 익숙해졌지요.”

의관은 책망하는 투로 말했지만, 백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백의는 문손잡이를 잡고도 열지 못했다. 그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손잡이를 놓고 깊게 한숨을 들이켰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약재는 올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백의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리 말하면서 백의는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침착해졌다. 지친 기색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을 낙엽의 흔적처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장군 셋이 나란히 병영 밖으로 나왔다. 주위는 한창 분주했다. 치중 부대에서는 거의 모든 후방 지원을 제공한다.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는 철 작업장, 노각과 울타리를 만드는 목재 작업장, 군마를 치료하는 수의(獸醫) 부대도 다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양식을 배급하고 전리품을 수납하는 곳도 여기였다. 전쟁 후, 약간 스산하고 침울해 보이는 상양관 안에서 작은 시장처럼 가장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이따금 병사가 들것을 들고 막사 안에서 나왔는데 들것은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하얀 천 아래에는 살려내지 못한 부상병이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의관이 하얀 천을 젖히고 시체 목의 맥박을 짚어보고는 죽은 것을 확인한 뒤 시체를 진 군사에게 빨리 가라며 휘휘 손을 내둘렀다.

이런 시체가 인파 속을 지나감에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기에서 시체는 가장 흔한 것 중 하나였다.

“영무예도 부상병이 우리보다 적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군대를 이끌고 창란도를 통해 귀국하지 않습니까.”

고월의는 그저 세 사람 사이의 침묵을 누그러뜨리려 아무 말이나 찾아 던졌다.

“남만 군사들은 민간 약초를 휴대하고 다녀서 의관이 필요 없소. 치료가 불가능한 이는 아군이 죽여서 한데 모아 태우지. 동향의 벗이 그의 목걸이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죽은 자의 가족에게 그가 전사했다고 말해준다오.”

백의의 설명에 고월의는 감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로군요!”

“조용히들 하고 저리로 가봅시다.”

식연이 불쑥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그는 살금살금 걸어서 시체를 든 앞쪽 군사들을 따라갔다. 고월의와 백의는 영문도 모른 채 쫓아갔다. 그 군사들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그리고 일제히 마초 더미 부근에서 군영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그들을 따라 구석의 갈포 움막이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시체를 짊어진 군사들이 들것을 내려놓았다. 우두머리인 오장(伍長)이 움막 입구의 망가진 구리 방패를 발로 툭 찼다. 안색이 누르스름한 초위국 노병 하나가 움막 그늘에서 기어 나왔다. 얼굴에 흰 천을 덮고 누리끼리한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오장이 뒤편의 시체들을 향해 입짓을 했다.

노병이 다가가 보려고 목을 쭉 뺐다.

“갓 죽은 자들이야. 전부 리국 포로지. 틀림없어.”

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궂은 것도 모자라 위험까지 따르는 일인데 내가 할 일이 없어 자네를 속일까?”

노병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군목 소매에서 은화 닷 냥을 꺼내 오장에게 찔러주려 했다. 오장은 그와 닿고 싶지 않아서 반보 물러나며 전포를 당겨 옷자락으로 손을 덮은 다음에서야 은화를 받았다.

“더러운 건 싫은가 보지?”

노병은 낄낄 사악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장은 수하들을 데리고 뒤돌아 떠나갔다. 백의는 그들의 뒷모습이 마초 더미 옆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그 움막으로 다가갔다.

“석회 냄새가 강하네요. 여기는 뭐 하는 곳일까요?”

고월의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물었다.

백의는 고개를 저었다. 움막 밖에 있는 커다란 수레는 석회로 가득했고 갈포 움막의 한쪽은 이 수레에 곧게 세워진 죽간 몇 개에 기대 지탱하고 있었다.

“안에는 뭐가 있으려나?”

식연이 물었다. 석회 안에는 분명 무언가가 묻혀 있었다.

백의가 안색을 굳히고 묵묵히 패검 검자루로 석회 안을 쑤셔 보았다. 석회 안에서 무언가가 드러났다. 패검을 잡은 손이 흠칫하더니 이내 멈추었다. 그것은 바싹 마른 수급(首級)이었다. 머리칼을 싹 밀어낸 머리꼭지에는 청색 문신이 있었다. 확실히 리국 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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