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4화 (174/360)

174

1장. 소주 공주 (14)

윤 성제 3년. 9월 초하루.

천계성 태청궁 동편전.

황제가 계단 높이 앉아 있고 신하들은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조각된 창살 너머로 스며들며 두꺼운 양탄자 위로 눈부신 금빛 무늬를 흩뿌렸다. 올해 가을은 추위가 조금 일찍 찾아왔다. 동편전 안에는 벌써 화로를 놓아 실내를 따뜻하게 데웠다. 내시와 비들의 재촉에 일찍 일어난 황제는 온기에 졸음이 밀려왔고 손으로 흐리멍덩한 머리를 받친 채 좌상 손잡이에 기대 있었다. 얇고 가슴 부분이 가벼운 무명베로 된 옷을 입은 소녀들이 줄지어 오더니 일찍 일어나 조정에 든 황실 중신들이 한기를 쫓을 수 있도록 백삼을 끓여 만든 양탕(羊湯)을 올렸다. 지체 높은 대신들은 이미 나이가 매우 많아서 추위를 무릅쓰고 아침 일찍 조회에 드는 것이 몹시 힘든 일이었다.

황제는 살짝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줄지어 선 신하들 모두 쩝쩝거리면서 탕을 마시고 있었다. 동편전을 가득 채운 음식 삼키는 소리는 살짝 거슬릴 정도였다. 리군이 천계에서 철수한 뒤로 조회에 드는 신하들이 또 한 무더기 늘어난 듯했다. 황제라고 저들의 이름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일부는 벌써 몇 년째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신하들이었다. 얼마 전에 비해 젊은 신하들은 또 몇이 줄어든 것 같았다.

황제는 언짢아졌다. 조회 전 보양탕을 들여 신하에게 은혜를 베푸는 법도를 꼭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무예도 철수했으니 이제 그가 전력을 다해 나라를 잘 다스릴 때였다. 황제가 손잡이를 툭툭 치자 소녀들이 급히 다가가 신하들의 손에서 탕 그릇을 받아 물러갔다. 신하들은 입을 닦느라 또 얼마간의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잇달아 두 손을 모으고 엄숙하게 서서 황제의 뜻을 기다렸다.

“읽게.”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일찌감치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감이 목을 가다듬고 읽어 나갔다.

“신, 초위국 백의가 상소 올립니다.

리국공 영무예가 황실의 기강을 무시하고 군을 이끌고 황성에 난입해 종실을 어지럽힌 지 수년이었습니다. 제후들은 황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폐하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오랜 시간 전쟁을 준비해 왔습니다. 폐하의 혁혁한 명망과 제후들의 지극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소신 백의는 초위국, 하당국, 진북국, 순국, 진국, 휴국의 7만 제후 근왕병과 함께 상양관 아래에서 영무예와 결전을 치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역신을 섬멸하고 폐하의 위엄을 사방에 떨치었습니다.

지금 소신은 역신이 다시 침범할 것을 막기 위해 군을 이끌고 상양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군의 난폭함에 아군 또한 막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약재가 부족해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제후국 군대는 황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금지령을 풀어주시기를 폐하께 간곡히 청하옵니다. 충성하는 장수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황성에 들어가 부족한 양식과 약재 및 기타 치중품을 채우고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제후군 또한 태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올려 역대 황제의 영령에 고할 것입니다.

폐하, 평안하시옵소서.”

“이것이 백의가 올린 상소요.”

황제는 느긋하면서도 약간 주저하는 목소리였다.

“그제 도착했고 나와 몇몇 내신들이 하루 동안 상의를 하였으나 결론을 내기가 어려워 우선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어제 백의의 사자가 빠른 말을 타고 찾아와 나를 독촉하지 뭐요. 이 같은 행동은 적절치 않다 생각되오. 황실의 요지에 드는 일은 선조의 유제(遺制)에 따라 참배를 하더라도 때에 맞춰 공손히 세 번 청한 뒤 흠천감이 길흉을 셈해 날을 결정해야 하오. 백의는 연거푸 나를 독촉하지만 이런 일을 어찌 단기간에 결정할 수 있겠소? 다만 나라를 안정시키고 황실을 구한 중신이라 거절한다면 제후들의 충심이 식을 터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소.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아까 내감이 상소를 읽을 때 계단 아래 신하들의 미간은 점점 더 찌푸려졌더랬다. 그들이 말할 차례가 되자 두세 사람이 앞다투어 입을 열려 했다.

태부 사기미가 경력으로 군신들을 제압하며 한 걸음 나아가 아뢰었다.

“폐하의 결정이 지극히도 옳습니다! 황실의 요지에 온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아닙니다. 수만 대군이 천계성에 발을 들이면 영무예 때와 똑같은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백성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들은 영무예와 백의의 차이를 모릅니다. 그저 또 하나의 제후가 군을 이끌고 황성에 들어왔다 할 것이니 폐하의 명망에 무익할 것입니다!”

황제의 속내에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침음하며 말을 아꼈다.

“폐하!”

허리를 거의 곧게 펴지도 못하는 노신 하나가 맹호처럼 대열 앞으로 달려 나왔다.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고 분노한 기색이었다.

“백의의 상소는 언사가 냉담하며 공을 세운 신하로서 자만에 차 있습니다. 소신은 백의가 그야말로 오만방자하다 사료되옵니다! 그가 영무예를 쫓아냈다 하지만 초위국만의 공로는 아닙니다. 폐하의 위엄으로 제후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기에 6국이 군사를 모아 근왕에 나선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백의가 어찌 영무예에게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현재 상양관이 무너지고 다른 제후들은 상소를 올리지 않았는데 백의만 거듭 폐하를 윽박지르며 감히 군을 이끌고 황성에 들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신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폐하, 백의에게 공로를 자처하며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십시오!”

“그 말은 좀 지나치오.”

사기미가 말을 꺼냈다.

“백의의 성격은 동륙의 모두가 알다시피 늘 오만했소. 선대 황제께서 재위할 때도 그의 명성을 중시해 여러 차례 불러들여 등용하려 했으나 전부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 그가 공을 자처하며 자만한다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오! 지금 엄하게 경고한다면 도리어 제후들의 충정이 식을 것이오.”

“백의는 지금 황성까지 빠른 말로 이틀이면 닿을 거리에 있습니다. 황성에 들이지 않으면 코앞에서 변이 일어날까 염려되오나 공로를 빙자하여 오만하게 두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현을 허락하고 우림천군을 보내시어 오는 길을 보호하고 견제하게 하십시오!”

또 한 신하가 대열 밖으로 나와 고했다.

“장미 황제 이후 진정으로 제후들을 억누를 수 있었던 분은 풍염 황제 한 분뿐입니다. 제후들은 매년 전쟁을 하고 폐하의 중재도 통하지 않으니 누군들 동륙의 패주 자리를 다투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아직 황실에 예의를 지키는 이유는 아직 그들이 진정한 패주가 되지 못하여 황실의 위엄에 기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한 패주가 된다면 폐하와 황실에 목숨 바쳐 충성하는 신하들을 안중에나 두겠습니까? 백의와 영무예의 결전이 황실을 위해서였는지 초위국을 위해서였는지 단언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백의가 천계에 들어와 폐하를 협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비분강개한 신하를 꾸짖기는 곤란했다. 제후들 앞에서 애써 유지해온 위엄을 무너뜨리는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신하들도 무안해졌지만 불쾌함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 대신들은 고관 집안의 후손들로 본디 신분이 지극히 고귀했다. 지위가 높은 자는 스스로 제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풍염 황제 이후 제후 세력은 점점 강해졌다. 반면 수중에 병권도 없고 경제권도 없는 황실 신하들은 어느새 조정의 장식품이 되어버렸고 세력과 지위, 영예는 선조가 살아있을 때보다 한참 못 했다.

몇 사람이 백의의 편에서 말하려다가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둘러보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계단 아래에서는 몇몇 기침 소리만 들릴 뿐, 더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들의 격앙된 견해를 들어보았지만 별 쓸모 있는 의견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치미는 화를 꾹 참았다. 잠시 기다린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좌상 손잡이를 세게 내리치고는 침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폐하. 초조해 말고 차분히 기다리십시오.”

나직한 여인의 목소리가 한쪽 장막 안에서 들려왔다.

“어릴 때부터 인내심이 없으셨지요. 황제가 되었는데 어찌 아직도 이리 성질을 부리십니까?”

여인의 말은 양약(凉藥)처럼 순식간에 황제의 가슴속 분노를 없앴다. 순간 아연해졌던 황제의 얼굴에 희색이 드러났다.

“내내 말이 없던 장공주께서 이제야 입을 여시다니 분명 계획한 바가 있겠군요.”

장막 뒤에서 장공주가 나직하게 웃음을 던졌다.

“폐하. 저는 아녀자입니다. 그저 폐하를 위해 계획을 생각해내고 근심을 나눌 뿐, 최종 결정은 폐하께서 내리셔야 하지요. 소신이 생각하기에 백의의 요구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고로 근왕군의 수고는 위로해 주어야 마땅하지요. 안 그러면 민심을 잃게 될 터, 우리가 또 누구에게 의지해 영무예와 맞서겠습니까? 하물며 백의가 상소에서 말한 약재가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니 북상해 부상자를 치료하도록 윤허하지 않는다면 인지상정에도 어긋나지요.”

황제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장공주가 돌연 말머리를 바꾸었다.

“백의가 혼자 알현하러 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수만 대군이 성에 들어오면 백성을 혼란케 할 것이며 무기들은 황성의 화목한 분위기를 해칠 것입니다. 군을 파견해 감시하면 똑똑한 백의가 모르겠습니까?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폐하께서 염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거절하자니 제후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걱정이고, 또 응하자니 여러 골치 아픈 일들이 있을 터인데 황성은 아직 그에 대비가 안 되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제후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어야 하니 먼저 사자에게 약재를 챙겨 보고 병사들을 위문하면 어떻겠습니까? 군을 이끌고 황성에 드는 일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최소한 흠천감에게 하늘의 길흉을 점쳐보게 한 후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황제는 곰곰이 생각했다.

“백의가 약재를 보급받고도 태묘에 제를 올리겠다 한다면 어찌 답해야 하겠습니까?”

장공주는 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서는 백의의 병력을 걱정하시는 게지요? 흠천감이 하늘을 점쳐본다 하여도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닙니다. 보급을 받으면 백의는 더 이상 폐하께 왕역에 들겠다 독촉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폐하께서는 즉시 백의의 주상인 초위국 국주를 포함해 전 제후들에게 교지를 내리십시오. 제후들의 충심 덕분에 역신을 섬멸하고 황성을 탈환하였으니 천계에 초청해 축하하고 상도 내리겠다고요. 제후들은 폐하께서 소수만 수행해 머나먼 천계성으로 오라 한다면 오기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후들이 황성에 알현하러 오지 않는다면, 우리라고 무슨 까닭으로 그들 군대를 황성에 들이겠습니까?”

황제는 순간 어리둥절했다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장공주의 책략은 사내들보다 뛰어나군요!”

“과찬이십니다.”

장공주는 장막 너머에서 사뿐히 절을 올렸다.

“제후들의 회신에서 폐하에 대한 예의와 충심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차별해 대우하시면 됩니다. 현재 백의는 첫 승을 거두어 위엄이 하늘을 찌르니 아무도 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제후국 군대도 대놓고 거역하지는 못할 테니 지금 백의를 황성에 들인다면 그의 오만함만 조장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폐하. 6국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 뒤 백의 한 사람만 의기양양합니다. 나머지 5국은 정말 조금도 불만이 없을까요?”

장공주는 예까지 말하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다물었다.

“지필묵을 가져와라! 지필묵을 가져와! 내 당장 백의에게 회신을 보내야겠다!”

황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 높여 내감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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