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3화 (173/360)

173

1장. 소주 공주 (13)

교위는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정신을 차린 듯 벌벌 떨면서 제 칼을 보았다. 화살에 맞은 칼에는 갈라진 상흔이 하나 남았다. 그의 칼은 모종의 힘에 통제되는 듯 걷잡을 수 없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상흔이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균열은 빠르게 자라나는 것처럼 칼몸 위를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돌연 펑 소리와 함께 강철로 만든 군도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정 장군, 비 장군. 아직 우리는 동맹이요. 이제 그만하지 그러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연?”

정규가 크게 놀랐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떨어졌다.

안색이 변한 비안은 입구로 몸을 돌렸다. 횃불 두 대의 환한 불빛 아래, 백의와 식연이 차례로 안쪽 창고로 들어왔다. 백의는 된서리가 뒤덮인 듯 차디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침내 교위의 품에 안긴 어린 공주를 직시했다. 식연은 묵묵히 바닥의 시체 수십 구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산적이 내분을 일으켜도 이렇지는 않을 거요. 과하셨소.”

식연은 고개를 내두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양쪽 군사들은 두려워하며 재빨리 식연에게 길을 내주었다. 누구도 그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수행하는 군사가 없어도 식연은 동륙에서 제일가는 도보전의 명수였다. 그리고 식연의 뒤편 입구에는 백의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온 후 딱히 움직이지 않고 내내 고개를 숙인 채 3척 거리의 앞쪽 땅만 쳐다보았다. 한 손에는 은회색 각궁이, 다른 한 손에는 은회색 우전이 든 화살통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우전의 위엄은 현장의 모든 사람이 목도한 바 있었다.

식연이 공주를 안고 있는 교위 앞으로 걸어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교위는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종종걸음으로 후퇴했다.

비안의 동공이 급히 수축했다. 식연이 벌써 칼을 뽑아 든 것이다!

현장에 있던 대다수는 식연이 검을 뽑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냥 어깨를 살짝 움칫한 것 같았는데 고검 정도는 이미 한 줄기 차가운 물처럼 매끄럽게 교위에게로 향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검술이었다. 극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뽑았으며 속도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교위는 칼을 되돌려 검을 막았다. 낮은 울림이 일고 교위가 세워든 칼과 정도의 날이 마주쳤다. 순간 교위는 살짝 기뻤다. 동륙 도보전 1인자의 검을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 수중의 무기는 칼등이 두텁고 칼몸이 넓은 중도(重刀)라서 칼등이 매우 질기고 튼튼했다. 식연의 무기는 정교하고 우수하지만 그래도 패검에 불과했다. 무기의 얇은 날끼리 부딪치면 중도에 비해 불리한 패검이 갈라져 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교위는 다급히 기합을 내지르며 한 손으로 칼을 쥐고 전력을 다해 밀고 나갔다. 식연을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상상과 달랐다. 현장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연의 패검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교위 수중의 중도를 부러뜨렸다. 단조강으로 만들어진 그의 칼은 종잇장처럼 식연이 검을 긋자 빠르게 잘려나갔다.

식연은 검을 잠시 멈추었다가 교위의 얼굴을 향해 그었다.

당황한 교위는 공주와 부러진 칼을 던져버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단단히 가리며 웅크리고 앉았다.

교위는 고검 정도 앞에서 반격은커녕 피할 자신도 없었다. 식연의 검은 멈추지 않고 허공에서 연속으로 빠르게 번득였다. 어린 공주는 사뿐히 식연의 품에 떨어졌고 조각난 칼은 잇달아 땅에 떨어졌다. 식연이 공중에서 검을 몇 번이나 그었는지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칼 조각은 가장 큰 것이 손바닥만 했다.

식연의 검은 어느새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빈손으로 얼굴을 가린 진국 교위의 손을 떼어내고는 우렁찬 소리가 날 정도로 연달아 뺨을 후려쳤다. 교위는 바보처럼 식연에게 맞으며 좌우로 머리가 흔들렸다. 피할 수조차 없었다. 식연이 손을 멈추자 교위의 머리는 부어서 벌건 돼지 머리 같아졌다.

식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전포에 손을 슥슥 닦았다.

“내가 누구의 귀싸대기는 날릴 수가 없으니, 네놈을 칠밖에. 소주 공주는 우리 하당의 귀빈이거늘 어디 너 따위가 손을 대느냐?”

식연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귀진을 보았다.

“청양 세자처럼 신분이 고귀한 사람만이 공주를 마중할 적임자이지요. 백 대장군의 화살을 챙기십시오. 백 대장군의 화살은 비싸서 잃어버리면 다시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식연은 여귀진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귀진은 그것이 칭찬이자 격려임을 알았다. 그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은회색 화살을 줍고 영월도를 뽑아 든 뒤 식연의 뒤에 섰다.

“엽정서 대인의 딸이지?”

식연이 엽근을 쳐다보았다.

“아까 다 보았다. 엽 대인은 비록 영무예를 섬겼으나 딸은 이처럼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공주를 포기하지 않고 모셨으며 위급한 상황에 내 제자까지 구했지. 적군과 아군을 판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는군. 엽 낭자는 우리와 함께 가지.”

여귀진이 다가가 엽근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의 몸은 매우 차가웠으며 살짝 떨고 있었다. 엽근은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녀는 여귀진의 미색 전포를 끌어안은 채 드러난 가슴을 가렸다.

“공주 전하. 하당국 식연이옵니다. 구조가 늦어 송구합니다.”

식연은 품 안의 소녀를 토닥였지만 얼굴의 치마폭을 풀지는 않았다.

어린 공주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아직도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저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공주 전하를 맞을 생각은 않고 그저 때려죽이는 것밖에 모르지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식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그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공주에게 말했다.

“자, 전하를 모실 거가가 없으니 소신의 어깨에 앉으십시오. 소신이 수레를 대신해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식연은 공주를 들어 자신의 너른 견갑 위에 앉히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알아서 피했다. 식연은 싸늘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얼굴에는 내내 한 가닥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검 정도의 검집이 그의 퇴갑(腿鉀)을 툭툭 쳤다. 그 묵직한 소리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노궁 더미를 지나는 길에 식연은 걸음을 멈추고 양손에 기병노를 들고 있는 식원을 보았다. 식원은 도처에 널린 노궁 속에 꿇어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의 물건은 버려라.”

식연이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식원은 일어나 숙부에게 군례를 행했다. 그는 곧장 식연을 따라가지 않고 구석에서 덕추의 머리를 주웠다. 식원은 입고 있던 전포를 벗어 덕추의 머리를 싸맨 뒤 품에 안았다.

지켜보고 있던 식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장군이 될지도 모를 인재였습니다…….”

“장군이 될 가능성을 가진 이가 많지…….”

식원은 예까지 말하고는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백의가 무표정하게 물러났다. 내내 비안을 대면하고 있던 이들도 천천히 밖으로 철수했다.

“식연. 뭐 하자는 거요?”

비안이 불쑥 물었다.

“비 장군은 나와 백 장군까지 죽이고 싶겠지?”

식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와 백의를 죽이면 수습하기가 어렵지 않겠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장군은 매사 온갖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그러나 내가 이곳에 당도한 이상, 그대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그런데도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거요? 아직 힘이 남았다면 공주를 빼앗아오라 시킨 자에게 돌아가 전하시오.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내 그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국가의 대사가 겨우 어린 여자아이에게 달려 있을 리는 없소. 이조차도 모른다면 일찌감치 귀향해 밭이나 일구는 게 낫지.”

식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나갔다.

식연이 우물 입구에서 나가 제일 먼저 마주한 이는 흰색 전포를 걸친 진북 명장 고월의였다.

우물 주위를 수백 필의 흰색 군마가 에워싸고 있었다. 출운기군의 궁기병들은 장궁에 화살을 얹고 사방에서 우물 입구를 겨누고 있었다. 고월의가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어느 누구라도 집중 사격을 당해 고슴도치가 되고 말 터였다.

그러나 식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올라가 고월의와 인사를 나누었다. 고월의는 오히려 살짝 어색해 보였다. 그는 손을 내둘러 궁기병들에게 활을 거두라 명령했다. 이어서 백의, 여귀진, 엽근, 그리고 어린 공주를 업은 식원이 올라왔다. 식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출운기군의 발 주위로 수백 구의 검은 옷을 입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전부 죽임을 당한 하당군이었다. 바닥에 선혈이 흩뿌려진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다.

“고 장군도 소주 공주를 마중하러 온 것이겠지?”

식연이 고월의의 눈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공주 때문에 온 것이 맞습니다. 달리 공명정대한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닙니다. 출발 전, 국주께서 분부하기를 소주 공주는…….”

고월의는 말하다 말고 백의의 표정을 흘긋 살폈다.

“소주 공주는 신분이 특수하므로 누군가에게 이용되면 진북국에 불리한 바가 생길까 염려하셨습니다. 하여 먼저 공주를 맞이해 진북국 진영에서 보호하다가 기회를 보아 황성으로 호송하라 하셨지요.”

여기까지 말한 고월의는 고개를 저으며 자조하듯 웃었다.

“물론 이 또한 핑계이겠지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일 겁니다. 두 분 장군께 부끄럽군요.”

백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식 장군에게는 100인 부대가 있었으나 모두 죽었소. 비안은 50명을, 정규는 100명을 데려왔고 아직 지하에는 수십 명이 남아 있소.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는데 참새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1)는 말이 있지. 지금 고 장군의 부하가 족히 300명은 되니 수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우세한데 고 장군은 어찌할 셈이오?”

고월의가 살며시 탄식했다.

“백 대장군께서 이런 행동을 경멸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진북에 출사한 신하로서 군주의 명에 복종해야 하지요. 주상께서는 출발 전, 백 장군과 식 장군에 맞설 일이 생긴다면 절대 그러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래전 추엽 산성에서 두 분 장군과 함께 싸웠다면서 그립다고도 하셨고요.”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진후 뇌천엽은 진정한 북방의 백호로 진심으로 탄복할 만한 기개를 지녔지. 그해 선물해준 자기 그릇은 고마웠다고 전해 주시오. 그동안 얼굴 보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구려.”

“그러지요. 제가 더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보내 죽은 이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도록 잠시 이곳을 지켜주면 참으로 고맙겠소.”

식연이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월의가 패도의 칼자루를 잡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백의와 식연이 각각 말에 올랐다. 여귀진은 엽근을 데려갔고, 식원은 공주를 안았다. 출운기군은 그들이 떠나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몇 걸음을 가자 갑자기 우물 아래에서 희미하지만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계속 우물 안을 메아리쳤다. 여귀진은 우물 아래 아직 남아 있는, 서로에게 칼을 겨눈 수십 명의 군사들과 옷이 너덜너덜해진 여인들이 떠올랐다. 절대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안 여귀진은 견딜 수가 없었고 걸음이 느려졌다.

한데 식연이 그를 잡아당겼다.

“세자. 돌아보지 마십시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겁니다.”

* * *

1)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후환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중국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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