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2화 (172/360)

172

1장. 소주 공주 (12)

정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칼을 쥐고 경계했다. 비안은 여자를 흘끗 보고는 싸늘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러 내리 찔렀다. 검 끝이 등을 찌르고 들어가 가슴을 뚫고 나왔다. 비안이 검을 뽑자 새빨간 피가 암홍색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여자는 내가 죽였으니 내 몫인 셈이오. 정 장군도 하나 골라보시오.”

비안이 음흉하게 제 검에 흐르는 뜨거운 피를 보며 말했다.

“비안. 뭐 하자는 거요?”

정규의 두 눈이 시뻘게졌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칠 정도로 싸웠다. 곁의 사람들이 하나씩 쓰러져가는 것을 본 이상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비안은 돌연 그 시녀의 시체를 들어 정규에게로 던졌다. 깜짝 놀라 움직임이 살짝 더뎌진 정규는 그저 전력으로 칼을 휘둘러 벨 뿐이었다. 시녀의 가녀린 몸은 단칼에 허리를 베였다. 짙은 피비린내가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그와 함께 비안의 패검이 정규의 미간을 찌르고 들어왔다. 정규는 군도를 이미 거두어들인 터라 몸을 뒤로 젖혀 치명적인 일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비안은 검을 내리치며 정규의 흉갑을 베었다. 비안의 패검은 얇고 물렀다. 동륙 최고의 풍호 경강 갑옷 덕분에 정규는 가슴이 베이는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바닥에서 옆으로 구르며 비안의 추격을 피했다. 고개를 숙여보니 가슴의 전포가 찢어져 연강갑(鍊鋼甲) 조각이 드러나 있었다.

“전장에서는 겁을 먹으면 안 되지. 정 장군, 풍호의 살기 좀 봅시다!”

비안의 미소는 냉담하고 흉악했다.

정규는 입을 벌렸다 오므리며 크게 숨을 골랐다. 그는 시뻘건 눈을 부릅뜨며 제 군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검을 쥔 채 천천히 다가오는 비안을 죽어라고 노려보았다. 정규는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휙 칼을 휘둘렀다!

이 칼은 비안을 향해 내리친 것이 아니었다. 정규는 그의 곁으로 도망치던 시녀의 명치 한가운데를 베어 넘어뜨렸다. 시녀의 시체가 정규의 발아래 쓰러지며 그의 군화를 짓눌렀다. 정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를 발로 차 버렸다. 그는 포효하며 칼을 들고 비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훌쩍 뛰어오른 정규는 전신의 무게를 전부 실어 묵직하게 칼을 내리쳤다.

비안은 검을 가로들어 막았지만 그 일격에 맞아 밀려났다. 패검의 칼자루 근처가 진동하며 구부러졌다. 강철을 여러 번 두드리며 숯을 제거해 만든 얇은 검은 극도로 부드럽고 질겨서 구부러져 원이 되더라도 탄성에 의해 다시 곧게 펴졌다. 그런데 정규의 거대한 힘에 완전히 못 쓰게 되고 말았다.

비안은 자신의 패검을 보고는 찬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을 정규에게로 내던졌다. 정규가 검을 막는 순간 비안은 허리를 구부려 바닥의 군도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정규가 다시 달려들었다. 무기 두 자루가 격자로 부딪치며 아름다운 불꽃이 튀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다. 곧 사멸될 금속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저건 내 몫이오!”

정규가 포효하며 칼을 휘둘렀다.

“비안.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죽이는 놀이를 하자는 거요?”

“설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수도! 전장이 다 그렇지 않소? 정 장군은 아직 미숙한 것 같구려. 그러니 평생 화엽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머슴에서 못 벗어났겠지!”

비안의 호통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창고 안의 전투는 학살로 변했다. 여귀진은 멍하니 그곳에 서서 여인들의 피가 허공으로 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인들은 그들을 짓밟는 칼더미를 뚫고 나갈 수 없었다. 풍호와 도순 무사들은 이미 살육에 눈이 벌게져 있었다. 그들은 야수처럼 난폭했다. 옆에서 달아나려는 여인들을 단칼에 찍어 넘어뜨리고 다시 상대에게로 돌진했다. 여귀진은 풍호 한 명이 가로로 휘두른 칼에 휘달리던 여인이 두 토막 나는 것을 보았다. 여자의 몸은 피가 샘처럼 솟구치는데도 계속 달려갔다. 그러나 아름다운 머리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유모…….”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신음이었다. 여귀진은 다시 밤하늘 아래의 철선강가로 돌아갔다. 젊은 여인은 담요로 여귀진을 싸맨 뒤 품에 안고 내달렸다. 그때 여귀진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담요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횃불을 켠 숙부의 군대가 보였다. 군마의 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달아나고 또 달아났다. 그들 뒤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마가 있었다.

그들은 결국 붙잡혔고 먹혔다. 살아남은 자는 여귀진뿐이었다.

엄청난 분노가 돌연 여귀진의 마음을 잠식했다. 여귀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원은 제 벗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모습을 보았다. 여귀진의 눈동자 속 무시무시한 살기는 실체로 변할 것처럼 짙디짙었고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영월의 칼자루를 쥔 채 크게 숨을 쉬었고 가슴이 들썩거렸다.

“세자!”

식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돌진하는 건 죽으러 가는 짓이야!”

“하지만 어떡해.”

여귀진은 물끄러미 식원을 바라보았다.

“어떡하냐고. 저자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식원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두 손으로 벗의 어깨를 힘껏 누를 뿐이었다.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귀진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여귀진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았다. 녹색 치마폭을 덮어쓴 어린 공주였다.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멍하니 앉아서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곁에는 이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십수 보 거리에는 실성한 듯 사람을 베어 죽이는 군사들이 있었다.

여귀진은 흠칫 놀랐다. 용솟음치던 분노가 돌연 상당 부분 사그라졌다. 그는 막연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피비린내 나던 그날 밤에도 하얀 옷을 입은 사내아이가 우두커니 서서 야수 같은 군사들이 가륜첩 유모를 덮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귀진은 그날 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세상이 찢겨나가는 듯한 극렬한 고통과 분노를 느꼈으리라. 수중에 군도가 있었더라면 그도 달려 나가 군사들을 전부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전부 죽여버려!’

여귀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외쳤다.

‘그래, 이렇게!’

지금 그는 칼을 쥐고 있지만 가륜첩이라 불리던 여인은 지킬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어.’

아직도 그 목소리가 여귀진의 마음속에서 말을 했다.

‘그래, 이미 죽었어!’

여귀진은 어마어마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순간 칼도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어린 공주는 조용히 훌쩍였다. 전장에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포효하며 사람을 베어 죽였다.

“내가 가서 데려올게!”

여귀진은 불쑥 식원에게 말했다.

“네가 날 엄호해줘!”

식원은 잠시 침묵했다. 창고 문과 무너진 구멍을 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빨리 와야 해!”

여귀진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식원은 조용히 움직이며 위치를 선택했다. 눈대중을 해보니 소주 공주의 위치에서 창고 입구까지는 20장 남짓으로 그와 여귀진이 한 번 속력을 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군가가 깨닫고 추격해올 테니 중도에 한 차례 요격이 있을 것이다. 식원은 바닥의 기병노를 보았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 한 줄기 분발심이 스쳤다. 정교한 노궁들에는 화살도 걸려 있었다. 거기까지만 달려가면 화살을 장전할 필요 없이 연달아 노를 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 여귀진이 공주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도 있다. 여기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 폐쇄된 장소가 모두를 충동적이다 못해 미쳐가도록 압박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식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알았어!”

여귀진은 땅을 디디며 속력을 내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식원은 쌓인 노를 향해 내달렸다.

여귀진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공주의 곁에 도착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소녀를 토닥였다.

“무서워 마.”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신 여귀진은 고개를 돌려 식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그때 쌩 하고 군도가 날아왔다. 싸우던 풍호군 하나가 여귀진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쫓아온 것이었다. 여귀진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땅에 꽂았다. 여귀진은 힘이 부족했지만, 영월은 누구라도 당해내기 힘든 무기였다. 그는 칼날을 덮쳐오는 풍호군에게로 정확히 겨누었다. 4척 길이의 칼날이 번쩍였다. 풍호군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든다면 가만히 있는 영월의 칼날로도 그자의 무기를 부러뜨릴 수 있었다.

풍호는 정말 영월의 칼날로 돌진했다. 그러나 부딪쳐온 것은 군도가 아닌 몸이었다. 그는 전혀 멈춰 서지 않았다. 칼날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었고 얼굴 깊이 칼날이 베어 들어갔다. 놀란 여귀진은 뒤이어 덮쳐오는 진국의 도순 무사를 보았다. 어깨 장식을 보니 지위가 제법 높은 진국 교위였다. 풍호의 뒤를 따라온 그는 단칼에 풍호의 등을 베며 목숨을 앗아갔다.

진국 교위는 여귀진이 칼을 뽑지 못한 틈을 타 그의 어깨를 바로 세게 걷어찼고 여귀진은 몇 걸음 굴러갔다. 그와 동시에 교위는 공주를 단번에 휘어잡아 제 품에 넣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칼을 휘둘러 여귀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여귀진은 이미 피할 데가 없었다. 그때 인영 하나가 측면에서 거세게 교위의 허리춤으로 뛰어들어 한 걸음 밀쳐냈다. 그 사람은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교위의 목을 찔렀다. 날카로운 손가락 끝을 무기 삼아 교위가 질식할 정도로 그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진국 교위의 군복은 강철 고리로 만든 목 보호대가 있어 절대 손가락으로는 꿰뚫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손가락에서 벌건 피가 줄줄 흘렀지만 고통을 못 느끼는 듯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귀진은 똑똑히 보았다. 이름이 엽근이란 했던 여인이었다. 시녀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는데도 그녀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교위는 낮게 고함을 내지르며 무릎을 들어 엽근의 아랫배를 세게 쳐냈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며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 칼을 겨눈 대상은 그 여인이었다. 달려가 막을 힘이 없었던 여귀진은 눈앞에서 칼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귀진은 칼날을 마주하고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는 여인의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몹시 차분했다. 까만 눈동자에 칼빛이 번쩍 비쳤다.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표정인지 죽음을 기다리는 표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심장이 선득해졌다.

쌩, 하는 화살 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교위의 눈에 한 줄기 은회색 광선이 들어왔다.

그 빛은 매우 빠르게 다가왔으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서 애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교위는 멍하니 제자리에 있었고 그 빛은 정확히 그의 군도에 부딪친 뒤 튕겨져 나갔다. 땅에 떨어진 것은 은회색 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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