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70화 (170/360)

170

1장. 소주 공주 (10)

지금 비안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칼은 못처럼 진군 진 앞의 땅을 파고들었다. 칼날에는 매서운 살기를 띤 빛이 흘렀다. 식원이 앞으로 나가 여귀진과 나란히 섰다. 그는 여귀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중검을 가로 들며 가슴 앞을 막았다. 여귀진은 식원에게 말했다.

“네가 공주를 보호해. 내가 앞에 설게.”

지금 여귀진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식원에게 뒤에 숨어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식원은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에 놓인 덕추의 머리를 보았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극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공주 따위 상관없어. 난 저자와 끝장을 봐야겠어!”

여귀진은 고개를 틀어 의아한 얼굴로 제 벗을 바라보았다.

상 부인이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일어섰다.

“모두 공주를 보호하러 오셨는데, 왜 앉아서 대화로 풀지 않으십니까? 궁에 속한 몸이지만 비안 장군께서 진국의 기둥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습니다. 하당 군관도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을 보면 분명 충실한 인사 같고요. 우리 모두는 황실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역당 영무예야말로 공통의 적이지요. 정녕 이리 사사로운 일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합니까?”

상 부인은 가슴을 펴고 장중하면서도 꼿꼿한 표정으로 뭇 사람들을 둘러보며 군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비안이 온 것을 본 그녀는 속으로 이미 계산이 섰다. 식원의 부대만 자기들을 구하러 온 것이라면 식원이 무례해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니 상 부인이 중간에서 중재할 여지가 생겼다. 이미 거칠고 사나운 군사들을 참아줄 수가 없었던 그녀는 이대로 싸우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동안의 굴욕이 작은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헤집었다. 명문가 출신의 여관으로 어릴 때부터 온실에서 자라온 그녀였다. 군인들의 더러운 손은 그녀의 물빛 꽃구름이 수놓아진 소매를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리군의 포로가 된 후로 칼날 앞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목숨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자 억눌렸던 분노가 전부 튀어나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식원도 비안도 그녀의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국 명장과 하당 소년은 먼 거리에서 싸늘하게 서로를 쏘아보았다. 눈빛에서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상 부인은 더욱 분노해 성큼 앞으로 나왔다.

“저리 비키시오! 이건 나와 비안 장군의 일이오!”

식원이 휙 고개를 돌렸다.

“저자가 내 전우를 죽였소. 상 부인이 무슨 상관이오?”

상 부인은 완전히 살기를 드러낸 소년의 눈을 보았다. 순간 부인의 오기와 존귀함은 누군가가 허리를 차버린 것처럼 순간 꺾였다. 상 부인은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비안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말이군. 양군 진영 앞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가까이 오지 마시오.”

“시작하십시오!”

식원이 낮게 외쳤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공주를 내놓으면 네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비안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패검을 보며 말했다.

식원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나는 말했습니다. 공주고 뭐고 지금은 상관없다고!”

“네 숙부처럼 여우 같지 않군.”

비안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는 갑자기 손을 휘두르며 사납게 외쳤다.

“전진!”

칼과 방패를 든 무사들이 동시에 포효하며 성큼성큼 돌진했다. 여귀진과 식원에게 접근했을 때 그들은 방패를 들어 막으면서 옆으로 구르며 칼을 휘둘렀다. 수십 자루의 긴 칼이 동시에 여귀진과 식원의 두 다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지면에는 거의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진국 정예병의 ‘예초도행진(刈草刀行陣)’ 전술로 경기병에게는 천적이었다. 엄밀한 훈련을 받은 이들은 극히 빠른 속도로 적군 기병의 틈으로 굴러 들어가 말발굽을 베어버렸다. 자칫하면 순식간에 쇠발굽에 밟혀 죽을 수도 있었기에 고도의 기교와 속도가 필요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들 무사는 하나같이 죽음도 불사했다. 매번 ‘예초도행진’이 전장에 등장하면 그들 중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무사들은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적의 경기병은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식원이 훌쩍 뛰어 올랐다. 두 발이 세게 방패를 디디자 방패를 든 무사들은 식원에게 눌렸다. 상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식원은 이미 두 손으로 검자루를 쥐고 전력으로 방패의 중앙을 찔렀다. 이들의 방패는 한 손으로 휘둘러야 하는지라 초위국 산진창병의 거대한 쇠 방패처럼 견고하지 못했다. 질긴 소가죽을 나무판에 덧대어 만든 것으로 내리치는 칼을 방어하기에는 충분해도 날카로운 무기가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기가 힘들었다. 방패 아래 무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식원은 재차 뛰어오르며 검을 휘둘러 검에 낀 방패를 다른 무사의 방패에 내던졌다. 그 무사는 몸이 크게 흔들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방패를 잃은 무사는 이미 위쪽 팔뚝을 찔린 상태였다.

여귀진은 장도 몇 자루의 서늘한 빛살이 자신의 발아래 모이는 것을 보고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휘감듯 영월을 휘둘러 원을 그렸고 영월도는 정확히 발밑의 장도들과 맞부딪쳤다. 영월의 날카로움은 정제된 장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적진의 칼날 세 자루가 부러졌다. 그 찰나에 여귀진은 한 발로 뒤에서 기습해 오는 칼을 밟으며 나머지 칼의 공세를 피했다. 진국 무사들은 공격이 실패하자 재차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귀진은 벌써 몸을 회전시키며 일어나 머리 위로 원을 그리듯 칼을 휘둘렀다. 무사들은 동시에 방패를 들어 스스로를 막았다. 여귀진이 구사하는 도술(刀術)의 위용을 마주한 무사들은 그 안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힘을 느꼈다. 장도의 회전 소리가 돌연 바뀌더니 칼빛이 직선으로 비스듬히 날아왔다. 무사 하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자신의 방패가 반 토막이 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비안은 깜짝 놀랐다. 정말 저 둘을 죽일 뜻은 없었다. 그저 분수를 모르는 소년들을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었다. 식원과 여귀진은 덕추와 달리 신분이 특수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저 소년들이 선보이는 무술을 보니 그의 부하는 다치지 않고 절대로 저 둘을 생포할 수 없었다. 사실상 부하 하나는 이미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여귀진의 일격은 분명 여지를 남겨둔 공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무사의 손도 함께 잘려나갔을 것이다.

제1진영이 실패하고 동시에 물러나며 여귀진과 식원을 겹겹이 에워쌌다. 수십 개의 방패가 그들을 완전히 봉쇄하며 빠져나가기 힘든 원을 형성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덤벼!”

식원이 주위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하지!”

비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당신이?”

식원이 눈썹을 치켰다.

“그래. 누가 나와 겨루겠느냐?”

비안이 천천히 식원을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이는 무사들 사이에 실력을 겨룰 때 하는 예절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식원과 여귀진을 쳐다보았다. 사냥감을 고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식원이 뭐라 말을 하려는데 여귀진이 어깨로 막았다. 여귀진이 성큼 앞으로 나갔다. 무사들은 그와 비안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여귀진이 칼로 땅을 짚으며 말했다.

“제가 겨뤄보고 싶군요.”

“재미있군.”

비안은 자못 흥미로운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가 검을 든 손을 떨구자 흰색 전포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미미하게 떨리던 검날이 밖으로 1촌만큼 드러났다. 여귀진은 검날을 보았다. 얇지만 부드럽고 질긴 검으로 다루기가 힘든 무기였다. 비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세자…….”

식원이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즉시 도순 무사가 그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날 죽일 수 있다면 너도 죽일 사람이야. 이런 상황에 뭘 다퉈?”

여귀진이 나직이 말했다.

여귀진은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곧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비안의 느릿한 걸음에는 저항하기 힘든 압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여귀진은 비안이 어떻게 첫 공격을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비안의 전포가 모든 것을 가렸다. 칼을 쥔 손의 모습까지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여귀진은 왼손 네 손가락으로 칼등을 천천히 누르며 몸을 낮췄다. 그와 동시에 5척 길이의 영월이 두 팔 사이에서 최대로 벌려졌다. 칼은 여귀진의 몸을 활로 삼는 매우 기다란 화살 같았다.

식원은 소름이 쫙 끼쳤다.

여귀진의 기수식(起手式)1)은 도술(刀術)이 아니라 희야가 사용하는 창술로 매우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적이 어떤 방어와 공격을 할지 고려하지 않고 순식간에 공격이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기술이었다. 여귀진이 도박과도 같은 전술을 선택한 이유는 현재 비안을 상대로는 파고들 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여귀진의 몸에 꽂혔다. 여귀진의 가슴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단 한 번의 호흡. 이 한 번에 바짝 당겨졌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영월의 칼날이 내려앉으며 여귀진의 몸은 칼과 함께 번쩍 비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한껏 고조된 듯 영월도에서는 쌩 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무사 몇 명은 저도 모르게 슬쩍 물러났다. 뭔가 방어해야 할 것 같았다. 비안도 여귀진이 호흡하는 순간 전진을 멈추었다. 접근하는 자신을 향한 여귀진의 반향이 강한 압력으로 그의 흐름을 어지럽혔다.

흐름이 흐트러졌으니, 남은 것은 맹렬한 일격뿐.

비안의 검이 뛰어오르는 뱀처럼 전포를 파고 나왔다. 부드럽고 질긴 검이 돌연 곧게 펼쳐졌다. 완전히 손목 힘에 의지하는 이 검술은 독보적으로 빨랐다. 뱀처럼 변한 검이 두 사람 사이의 모처를 요격(邀擊)했다. 비안이 검을 내지른 순간 검은 그저 허공을 찔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귀진이 너무 빠르게 들어오는 바람에 검날이 허공에 닿았을 무렵, 여귀진도 그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때, 영월도가 다시 한번 속도를 냈다. 여귀진은 미리 거리를 계산해 두었다. 처음 도움닫기로 돌격하면서 칼날이 거의 상대에게 도달하는 때가 바로 두 번째로 도움닫기를 하며 힘을 더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번의 직접적인 공격만큼 강하진 않아도 2차에 걸친 찌르기는 훨씬 기민하고 다채로웠다.

“잘했어!”

식원이 소리쳤다.

여귀진과 비안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비안은 검을 잡고 똑바로 섰다. 여귀진의 두 발이 땅을 밟으며 두 개의 발자국이 남았다. 그는 순간 몸을 돌리며 미끄러지듯 후퇴했고 1장 가까이 물러나서야 급히 멈추었다. 여귀진은 반 무릎을 꿇은 채 칼날을 들었다.

비안은 머리를 들어 자기 검을 보았다. 검날에 약간의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 * *

1) 무예를 겨룰 때 펼치는 첫 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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