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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주 공주 (9)
여귀진이 돌아보았다.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열 손가락을 펼치고 아까 유일하게 울지 않았던 여인 하나를 사납게 덮쳤다. 그 여인의 눈을 파내려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막지 않고 그녀가 그 여인을 마구 때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여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웅크린 채 발로 차면 차는 대로 맞고 있었다. 여자 두 명이 또 달려가 구석에 있던 여인을 호되게 걷어찼다. 그리고 또 두 명이 더 달려들었고 마지막으로 거의 모두가 그 여인을 에워쌌다. 그녀들은 이 여인을 극도로 증오하는 듯했다.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고 매섭게 그녀의 몸뚱이를 붙잡았다. 꼭 그녀를 조각내려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그 여인의 새카만 눈이 떠올랐다. 그녀의 두 눈이 친숙하고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 여인은 여귀진을 한순간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여귀진은 주체하지 못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가 다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여자들이 그 여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멈춰!”
여귀진과 식원의 거의 동시에 고함을 쳤다.
여귀진은 식원보다 한발 늦었다. 식원은 곧장 달려가 그 여인을 패는 여자들을 날쌔게 떼어 내고는 두 팔을 벌려 그들이 구석의 여인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막았다. 횃불이 비친 식원의 중검이 위협적으로 내뿜는 섬뜩한 빛에 여인들은 깜짝 놀랐다. 차츰 진정한 여인들은 겁을 집어먹고 벽 쪽으로 물러났다.
여자들은 두 소년 앞에서 거의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 헐어버린 옷 조각을 슬그머니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무슨 일이오?”
식원이 상 부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궁복의 옷깃을 매만진 상 부인은 서릿발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것은 우리 공주 전하의 시녀가 아니라 역적의 종범이오!”
“역적의 종범?”
식원은 고개를 돌려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머리칼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여자는 힘껏 제 가슴을 끌어안았지만 조각조각 찢긴 옷은 아름다운 몸매를 가리지 못했다.
“저 여자는!”
상 부인의 노기는 사람을 죽이는 비수 같았다. 그녀는 벽모퉁이에 웅크린 여인을 가리키며 외쳤다.
“역적과 한패요. 역적이 저 여자를 보내 공주의 생활을 시중드는 척하면서 우리를 감시하게 했소! 저자의 아비는 황실을 배반하고 영무예에게 충성한 차기도호 엽정서요!”
식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적의 딸이라면 상 부인은 왜 우리가 오기 전에 때려죽이지 않았소? 그랬다면 황실에 공을 세우는 것일 텐데?”
상 부인은 식원의 말에 아연해졌다. 얼굴색이 상기되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티를 내지는 못했다. 다만 눈빛은 식원의 얼굴을 도려낼 듯 날카로웠다.
여귀진은 이미 다 파악했다. 당시 여인들은 화공을 퍼붓는 혼란한 틈에 이곳으로 도망쳐 왔고 어느 쪽이 이겼을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결과를 기다렸다. 그때는 결과를 모르니 이 역적의 딸을 죽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데 이제 전세가 판가름 났으니 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여귀진은 상 부인의 음침하고 잔혹한 기색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식원과 나란히 서서 그 여인을 제 뒤에 두었다.
“두 분은 역적을 비호하면서 황실에 충성하는 신하라 할 수 있소?”
상 부인은 식원의 싸늘한 눈초리를 보았다. 그가 그녀의 위엄에 조금도 놀라지 않자 저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왕법은 왕법이고 군법은 군법이오!”
식원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현재 상양관은 탈환한 지 오래되지 않아 연합군 관할이오. 군영에는 군법만이 있소. 여기 모두를 데려가 숙부께 넘길 것이오. 상 부인도 아직 신분이 증명되지 않았으니 우리 두 사람의 포로요. 초위국에서 부리던 위세를 우리 하당을 상대로 부릴 생각은 마시오. 부인은 구조되자마자 내게 호령했는데, 군에서 여인은 발언권이 없다는 것도 모르시오?”
상 부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시선을 힘없이 떨굴 뿐이었다. 그녀는 초위국 궁에서 지위가 높은 명부(命婦)1)에 명문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갓 전장에 나온 두 젊은이의 벽에 막혀 수십 년간 쌓아온 오만과 위세를 부릴 수가 없었다. 시선을 맞춘 여귀진과 식원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다 상 부인에게 경멸을 느꼈다. 여귀진은 갑옷 겉에 걸친 미색 전포를 벗어 등 뒤에 있는 여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여인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들어 여귀진을 힐긋 쳐다보았다. 여귀진은 또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새카만 것이 희야처럼 흔치 않은 눈이었다.
“감사합니다, 장군.”
여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퀴어 찢긴 눈꼬리에서 눈물처럼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름이 뭐지?”
여귀진의 물음에 여인이 대답했다.
“엽근입니다.”
바깥 창고에서 돌연 묵직한 착지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여귀진과 식원은 동시에 무기를 쥐고 나란히 섰다. 식원은 내려오기 전 덕추에게 위쪽을 철저히 지키라고 명령해 두었으니 그의 명령 없이 절대로 누군가를 들여보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온 자들은 하당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연달아 착지음이 들렸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우물 위의 입구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 착지하는 소리가 서른 번을 넘자 식원의 안색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서른 명이면 소규모 군대였다.
그리고 이곳은 수십 척 지하이니 만일 저들이 적이라면 그와 여귀진은 절대로 저 많은 사람들의 포위를 뚫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착지음이 들리고 식원이 나직이 말했다.
“대략 오십 명이 넘는 것 같아.”
“전부 갑옷을 입었어. 착지할 때 많이 무거웠고 갑옷 조각 소리도 들렸어.”
안쪽 창고와 바깥쪽 창고 사이의 유일한 문으로 불빛이 스며들어 왔다. 수십 대의 횃불이 환하게 빛을 밝혔으나 아무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자들은 매우 빠르게 흩어져 진을 치는 듯했다. 훈련이 잘되어 있고 군기도 삼엄한 군대 같았다.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불빛 속 그는 시커먼 인영일 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군사들이 횃불을 높이 들고 따라 들어왔다. 우두머리는 안쪽 창고의 거대한 크기에 몹시 놀란 듯했다. 고개를 쳐들고 둘러본 그는 감탄했다.
“훌륭하군! 상양관의 설비는 과연 남달라!”
“비안이야…….”
식원은 그자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비안은 진국의 통수이자 진국 수도인 금담성의 성수(城守)였다. 비안이 칼을 든 정예 보병 50명을 이끌고 그들 앞에 섰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여귀진과 식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상대측 진이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군사들은 방패로 앞을 막고 패도를 방패 사이의 틈에 끼웠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적의를 띠는 삼엄한 방어 진형이었다.
“애 둘이 한발 빨랐을 줄은 몰랐군.”
비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칼과 방패 진도 그의 뒤를 쫓았다.
식원과 여귀진은 서로 눈짓을 했다. 식원은 번개처럼 공주의 곁으로 물러나 중검을 가슴 앞에 가로놓고 몸으로 공주를 가렸다. 여귀진은 천천히 영월도를 뽑아 왼손으로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몸을 낮추었다. 그는 비안을 주시하면서 칼끝을 앞쪽으로 향해 가볍게 지면에 내려놓았다. 돌진하기 위한 준비였다.
비안은 칼을 쥔 여귀진의 자세를 보고 살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의 대치 후 식원이 입을 열었다.
“하당의 식원과 청양부 여귀진, 비 장군을 뵙습니다. 비안 장군께서도 공주를 맞으러 오신 겁니까?”
비안이 차갑게 웃었다.
“과연 식연 휘하의 소년답게 담력이 있군. 내가 온 이유를 알았으니 저항할 생각은 접어. 어떤 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 내 그래도 식연의 체면은 세워주지.”
“저희 하당을 대신해 소주 공주를 보호하러 오셨다는 겁니까?”
식원이 물었다. 그는 비안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다. 또한 제후국이 모두 이 공주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식원은 현재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되었다. 비안은 칼날을 드러냈고 식원은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리를 굴리며 밖을 지키는 덕추를 떠올렸다. 덕추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150명인데도 비안은 이곳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덕추와 그의 부하들은 이미 무장 해제되었고 지금 밖을 지키는 사람들은 진국의 군사들일 것이다.
“식연에게 전해라. 소주 공주는 우리 진국이 돌보겠다고. 우리가 실력 좋은 놈들을 시켜 소주 공주를 황성으로 호송할 테니 나머지는 하당국이 신경 쓸 것 없다고 전해.”
비안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두 소년은 그의 안중에도 없을뿐더러 수적으로 봐도 그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공주는 황성이 아니라 남회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식원이 외쳤다.
“이게 네 녀석 같은 일개 부장이 입을 놀릴 일인가?”
비안은 이미 식원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여귀진은 비안의 뒤편에 칼과 방패로 진을 친 도순(刀楯) 무사들을 보았다. 이들은 훈련이 잘되고 엄선된 명수들이 분명했다. 눈빛은 냉담했으며 체구는 다부졌다. 모두 검은 옷을 착용했으며 투구는 쓰지 않고 이마에 흑녹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여귀진은 이런 진형을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무사들의 칼을 보던 여귀진은 돌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방패 틈으로 나온 칼 한 자루에서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야!”
여귀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원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분노해 소리쳤다.
“비 장군. 밖을 지키던 우리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비안은 입꼬리를 당기며 몹시도 쌀쌀맞게 웃었다. 그가 손을 휘휘 내젓자 무언가가 방패 뒤에서 내던져졌다. 그 물건은 멀리까지 굴러갔다. 식원은 똑똑히 보았다. 피가 잔뜩 튄 뽀얀 얼굴을. 죽을 때도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덕추의 머리였다. 젊은 백부장은 진급하기도 전에 우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비안! 장군은 정말 미친개로군요!”
식원이 이를 악다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전우를 죽이고도 모자라 예서 이리 무례하게 굴다니요!”
비안은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이리 포효하는 것이야말로 미친개지. 내가 무례하게 굴고 말고는 너 따위 애가 훈계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하당국의 일개 백부장이 감히 내 길을 막았으니 죽음을 자초한 게지. 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가 자살한 것과 다를 게 없어. 너는 식연의 조카이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비켜라. 공주 전하를 내게 넘기고 평안하게 부대로 돌아가 복명해라.”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식원은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했다.
비안은 코웃음을 쳤다.
“생각할 시간을 주마. 거절이 빠르면 후회할 시간도 없다.”
“나를 죽이려고요?”
“그럴 필요까지야. 여기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지하다. 아무도 널 도와주지 못해. 어떻게 결정할지는 네게 달렸다.”
비안은 허리춤의 칼을 잡고 한 걸음 물러났다. 몸이 강궁처럼 팽팽해졌다.
“난 이미 결정했습니다!”
식원이 한 걸음 나가며 여귀진에게 작게 말했다.
“공주를 보호해. 내가 앞을 맡을게.”
여귀진은 식원의 말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고 그보다 더 빠르게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영월의 칼끝에 땅이 조금 파였다.
* * *
1) 봉작을 받은 부인을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