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67화 (16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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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주 공주 (7)

식원은 밧줄을 매만지고는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우물 벽의 돌 틈을 붙잡고 내려갔다. 홰에 불을 붙이자 우물 아래가 갑자기 환해졌다. 한 무더기의 모기가 놀라 왱왱거리며 위로 날아갔다.

“소장군!”

덕추가 화들짝 놀랐다.

식원은 대답하지 않고 횃불을 휘둘러 운 나쁜 모기 몇 마리를 태워버렸다. 나머지 모기들은 어지럽게 웅웅 날아갔다. 이어 식원은 위쪽으로 높이 손을 들고 엄지를 세워 자기가 무사하다고 알렸다. 덕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여귀진은 식원을 따라서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우물을 내려가는 순간 한기가 온몸에 엄습했다. 여귀진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동운산 아래의 신비한 동굴, 컴컴한 어둠이 끝없이 아득하게 이어진 그곳에 다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여귀진은 차갑고 습한 공기를 들이켜며 마음속 찝찝함을 가라앉혔다.

두 사람은 돌 틈을 손가락으로 파내듯 붙잡으며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 횃불 두 대가 환하게 빛났다. 주위는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진녹빛 이끼로 가득했다. 어떤 곳은 미끄러워서 손가락이 파고들 수 없었다. 다행히 덕추가 위에서 밧줄을 천천히 놓아준 덕분에 두 사람은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귀진은 위를 보았다. 우물 입구의 빛이 점점 작아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우물 바닥은 암흑이었다.

“저 백부장 어떤 것 같아?

식원이 툭 질문을 던졌다.

“괜찮던데.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 같아. 일처리도 노련하고.”

“응. 우리 하당에 저런 인물은 드물지. 돌아가면 숙부께 이력을 알아보시라고 해야겠어. 어쩌면 장군감일지도 모르니까.”

식원은 멈칫하더니 돌연 외쳤다.

“도착했다!”

식원은 힘껏 닫힌 입구의 썩은 나무판을 발로 몇 번 찼다. 마침내 찌그덕 소리가 나고 나무판에 걸어둔 자물쇠가 끊어지더니 진짜 입구가 나타났다. 식원은 허리 뒤쪽에서 정교한 기병노를 뽑더니 시위를 당겨보았다. 그는 위에서 당겨지는 밧줄의 힘을 이용해 그네를 타듯 몸을 날려 동굴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대략 두 사람 높이만큼 내려가자 지면에 발이 닿았다. 식원은 비밀리에 식연이 조직한 척후 기관인 ‘귀복영’에 예속되어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도보전을 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는 착지하기 전 먼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던지고 착지하자마자 몸을 옆으로 굴렸다. 이러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기습하려고 해도 식원의 위치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식원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기병노를 든 채 어둠 속에 웅크리고서 횃불이 바닥에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불이 비추는 곳은 평평한 지면이었다. 또 한 번의 착지 소리가 들렸다. 여귀진이었다. 만족 세자의 검술 실력이 처지지 않다는 것은 식원도 알았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는 어떤 경험도 해보지 않은 세자이기에 식원은 얼른 옆으로 굴러가 단번에 여귀진의 허리띠를 잡고 빠르게 물러났다.

여귀진도 횃불을 던졌다. 동유에 흠뻑 적셔진 횃불은 바닥을 굴러가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식원과 여귀진은 서로 등을 맞댄 채 각자 무기를 들었다.

“사람이 있어?”

식원이 목소리를 극도로 낮게 깔았다. 횃불이 비추는 길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없어.”

여귀진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모험 한번 해 보자!”

식원과 여귀진은 등을 맞댄 채 횃불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허리띠에 끼워둔 다른 홰를 꺼내 바로 불을 붙이고 바닥의 횃불 두 개도 도로 주웠다. 네 대의 횃불을 동시에 들자 주위가 환해졌다. 이곳은 정방형의 지하실로 창고 구조가 확실했다. 지면은 평평하고 네 벽은 편편하게 깎아서 백악(白堊)을 칠했다. 전체 창고가 이렇게 깊은 지하에 지어졌으니 공정이 상당했을 터이지만 아무 물품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손바닥이 홧홧해진 식원이 세차게 손을 털었다.

“석회야. 바닥도 석회투성이니까 손에 안 닿게 조심해. 물건을 건조하는 데 쓰는 거거든. 정말 창고네.”

“하지만 공주는 없잖아.”

여귀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누가 있어. 다만 공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네.”

식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석회로 가득한 바닥을 가리켰다.

여귀진은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희미하게나마 어지러운 발자국이 있었다.

“한 사람 발자국이 아니야. 게다가 이렇게 작은 족궁은 남자 것이 아니야. 상양관에는 원래 여자도 없고.”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는 식원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졌다.

불빛이 앞을 밝게 비추었다. 벽에는 비밀 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도 백악이 덧칠되어 있었는데 벽과 높이가 같아서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식원은 검집 채 중검을 들고 고개를 돌려 여귀진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부디 살아있는 공주면 좋겠네. 그럼 만사형통인데.”

여귀진은 한 손에 두 개의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낮게 기합을 외친 식원이 중검을 머리 위에서 회전시키더니 거대한 힘을 실어 비밀 문의 중앙을 내리쳤다. 숙부의 도보전 기술을 전수받은 식원은 팔 힘이 매우 강했고 비밀 문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이미 기합을 넣고 대기 중이던 여귀진은 안으로 휙 횃불을 던지고 전력으로 땅을 차며 날카로운 화살이 쏘아지듯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식원은 손을 휙 내두르며 검집에서 중검을 뽑았다. 검집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여귀진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강철 바늘 같은 여인의 비명이 여귀진의 귀를 찔렀다. 불빛에 눈앞의 일체를 확인한 여귀진은 돌연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인영 하나가 측면에서 달려들더니 손목 굵기의 나무 몽둥이를 높이 들어 여귀진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다. 식원은 이런 상황에서 여귀진보다 훨씬 민감했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가볍게 그자의 손에서 몽둥이를 빼앗았다. 그리고 뺨을 때려 바닥에 쓰러뜨렸다.

체격 좋은 여자였다. 하녀 차림을 했는데 복장이 남루했다. 그녀는 어미 짐승처럼 바닥에서 헉헉 숨을 두어 번 몰아쉬더니 다시 뛰어오르려 했다. 식원은 그 여자에게 반격할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차디찬 검 끝으로 하녀의 목덜미를 눌렀다. 하녀는 눈을 부라리며 식원을 죽기 살기로 노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식원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여귀진이 한 발 내디뎠다. 주위로 발소리의 메아리가 울렸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바깥 창고의 열 배가 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광주리 몇 개가 흩어져 있었는데 전부 텅 비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단지가 구석에 쌓여 있었으며 은근하게 장 냄새와 썩은 내가 퍼졌다. 소금에 절인 달걀이 썩은 냄새 같았다. 불빛이 겨우 창고 끄트머리를 비추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얼굴이 꾀죄죄한 여인들이 더러운 마포(麻布)로 몸을 덮은 채 흙벽에 기대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벌벌 떨면서도 찍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여귀진은 여인들의 눈을 보았다. 하나같이 새카만 우물을 보는 듯했다.

그 표정, 그 눈빛,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여인들. 눈썹처럼 가느스름한 달이 떴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가륜첩도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어린 여귀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귀진 눈앞의 이 여인들과 비슷한 눈빛이었다.

창고 가운데 바닥에는 시체 두 구가 누워 있었다. 하나는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다. 시체는 무시무시한 청회색을 띠었다. 죽은 지 시일이 꽤 된 것 같았다. 남자 시체는 체구가 건장했다. 상반신을 발가벗었는데 등에는 오래된 상징 문양이 있었다. 여자 시체는 사내에게 몸이 깔려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은 찢겼고 가슴 한 조각이 깨물려서 떨어져 나갔다. 굳은 피에 발가벗겨진 가슴 절반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남자 시체는 뒤통수가 깨져 있었다. 고개를 돌린 여귀진의 눈에 식원이 빼앗은 나무 몽둥이가 들어왔다. 뒤통수의 묵직한 일격은 나무 몽둥이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리국 적려 보병이 여인을 겁탈하려고 할 때 하녀가 달려들어서 몽둥이로 치명타를 날린 것이었다.

발로 나무 몽둥이를 뻥 차버린 식원은 그 하녀를 내버려두고 여귀진의 곁으로 다가와 주위 상황을 둘러보았다.

“그래. 이 사람들이었어.”

식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머리 모양이나 차림새가 여염집 여인들이 아니야. 난전 중에 이 미친 리국 놈에게 들킨 거지. 욕정에 정신 못 차리고 이 여인들을 강간하던 놈은 저 여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죽임을 당한 거야.”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원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주가 일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살아 있다고 해도 아주 골치 아프게 됐어.”

“왜?”

“공주는 초위국과 하당국 동맹의 인질이야. 훗날 하당의 귀족 집안에 시집가야 할 수도 있어. 만약 리국 보병에게 능욕을 당했다면 시집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국주께서도 초위국에 뭐라 할 말이 없잖아. 리국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하당국도 초위국도 다 난처하게 됐네.”

식원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보자.”

갑자기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하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올라 식원을 향해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하녀가 식원의 목을 조르려는 순간 식원은 돌아보지도 않고 왼손으로 주먹을 날려 정확히 하녀의 이마를 쳤다. 하녀는 강한 주먹을 맞고 혼절해 쓰러졌다.

두 사람은 천천히 여인들에게로 다가가면서 눈으로 훑었다. 여귀진은 손발에 힘이 풀렸지만 얼굴은 맹렬한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여인들 대다수는 발가벗고 있거나 가슴과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찢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완만한 호흡을 따라 여인들의 가슴이 낡고 더러운 마포 아래에서 들썩거렸다. 찢어진 마포 구멍으로 옥처럼 아름다운 피부색이 드러났다. 여인들 중 일부는 여관(女官) 차림이거나 시녀 차림이었다. 나이는 많아야 서른 남짓이었고 어려도 열 서넛밖에 되지 않았다.

긴 시간의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여인들은 이미 얼이 빠진 듯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힘없이 숨만 헐떡였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식원은 얼굴을 구긴 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여귀진에게 물었다.

“저 중에 공주 같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일순 멍했던 여귀진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거의 전부가 능욕을 당했는지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겨서 귀천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식원은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리고 여귀진과 함께 공주를 찾아보면서 입으로는 사납게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저 쓰레기를 한 번 더 베어버릴까 보다!”

“누구?”

여귀진이 멍하게 물었다.

“저 적려 보병 말이야! 사내 하나가 여인들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맞아 죽어버렸잖아. 멀쩡한 공주까지 능욕했지. 자기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우리한테는 수습하기 어려운 골칫거리를 남겨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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