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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주 공주 (6)
기병대가 아직 사용되지 않은 진영으로 들어갔다. 말을 묶어두는 돌기둥들을 지나자마자 여귀진은 무기를 뽑는 소리를 들었다. 여귀진은 즉각적으로 말고삐를 홱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칼을 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진영으로 보였는데 검은 옷을 입은 보병 한 무리가 갑자기 번쩍 나타났다. 하당 군복이었고 대략 100명쯤 되었다. 우두머리인 백부장은 얼굴빛이 하얗고 깨끗했다. 그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의 앞에 말을 세운 식원을 빤히 응시했다.
근위병 부대의 기병들은 각자의 군도를 쥐고 진을 치며 보병들에 맞섰다. 같은 옷을 입은 전우인데 이곳에서 만난 지금은 적대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식원이 그 백부장을 훑어보고는 물었다.
“나를 모르나?”
“어디에서 왔지?”
백부장도 식원을 훑어보았다.
식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보낸 자가 그대인가?”
식원은 천천히 자신의 중검을 뽑았다. 검을 검집에서 반 척만 뽑아 검자루 근처에 새겨진 금색 무늬를 휙 보여주고는 재빨리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내 이름을 알겠지?”
백부장은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나아가 반 무릎을 꿇었다.
“소장군!”
식원의 검은 하당국 국주 백리경홍이 하사한 것이었다. 백리경홍은 식원의 열여섯 살 생일에 명검을 하사했는데 검신에 하당국의 병마를 동원할 수 있는 국화 금부가 새겨져 있었다. 온 조정의 신하가 암암리에 왈가왈부하였다. 그들은 식연을 중시하는 국주의 마음이 그의 조카에게까지 미친 데 대해 찬탄하며 젊은 군관을 포섭하고자 하는 백리경홍의 절박함을 예감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나날이 혼란스러워지는 동륙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업을 중시하고 무예를 경시하던 하당 국정에도 격렬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식원은 그리하여 유명해졌다.
“선봉대 백부장 덕추?”
식원이 물었다.
“네, 제가 덕추입니다!”
“길을 안내해라.”
식원이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린 식원은 여귀진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여귀진은 식원의 곁에서 걸었다. 두 사람은 덕추의 안내에 따라 영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양 옆은 모두 흙을 다져 세운 병영으로 바람을 막을 북쪽 면만 돌을 사용했다. 텅 빈 진영은 여귀진이 본 몇 개의 다른 진영보다도 규모가 컸다. 여귀진은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이곳에 사람을 가득 채운다면 족히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상양관 안에 이런 영지는 100곳이 채 되지 않았다.
“규모가 엄청 크지?”
식원은 여귀진이 주위를 관찰하는 것을 알아챘다.
“전에는 우리 만족을 방어하는 북쪽의 당올관이 동륙 제1의 험준한 관문이자 최대의 요새인 줄 알았어. 근데 지금 보니 이곳 규모가 당올관을 능가하는 것 같아.”
식원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당올관이 유명해진 것은 풍염 황제 때문이야. 하지만 동륙은 줄곧 외적과의 전쟁보다 내전이 많았어. ‘황성의 자물쇠’라 불리는 상양관은 황실 요충지의 앞문으로 10만 명의 수비군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지. 이점에서만 봐도 당올관은 비교가 안 돼. 동륙의 제후국이 단합한다면 북륙의 7개 부족은 상대가 안 될 거야.”
“맞아.”
여귀진은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제후들은 세자가 그들의 머리를 벤다고 해도 절대 단합하지 않을 거야. 칼을 목에 들이밀면 잠깐 화목한 척이야 하겠지만.”
식원이 빙그레 웃었다.
돌연 마음이 가벼워진 여귀진도 식원을 향해 웃었다.
몇 걸음 가던 여귀진은 다시 표정이 엄숙해졌다.
“동륙과 우리 한주의 적대적인 관계는 풀기 어렵겠지?”
“아무래도.”
식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한주는 너무 황량해. 경작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숙부께서도 역대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한주에는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어. 단 하루라도 그러하다면 다시 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
“그럼 언젠가 우리도 적이 되는 건가?”
여귀진이 식원의 곁을 걸어가며 말했다. 여귀진은 이미 식원만큼 키가 커서 어깨높이가 엇비슷했다.
식원은 흠칫 놀라더니 웃으며 말했다.
“희야가 군사를 이끌고 세자의 장막을 짓밟으러 갈까?”
여귀진도 흠칫 놀랐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나도 그럴 리 없어. 희야와 세자는 벗이잖아. 나와 세자도 벗이고.”
식원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북도성이 좀 멀어? 가는 내내 고생만 죽도록 할 텐데 내가 왜 그 먼 길을 가서 세자의 장막을 짓밟겠어?”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웃을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여귀진은 마음이 완전히 홀가분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멈춰 선 덕추가 보였다. 그는 바닥의 먼지투성이인 대자리를 가리켰다.
“소장군. 여기입니다.”
“여기라고?”
식원은 쭈그리고 앉아 자리를 꾹꾹 눌러보았다. 아랫부분이 힘이 없는 것이 텅 빈 듯했다.
덕추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들쳤다. 여귀진은 아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자리가 덮여 있던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동굴로 무척 습했다. 물에 오래 담가둔 듯한 시큼한 냄새와 이끼, 수생 식물의 차가운 비린내가 동시에 쏟아졌다.
식원은 손을 내밀어 동굴 입구를 더듬어보았다.
“아래가 엄청 추운데, 조사해 봤어?”
덕추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중요한 문제라 일단 단서를 찾자마자 이곳을 봉쇄하고 식 장군께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외에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소장군께서 오기 전에 진국과 초위국에서도 어귀를 지나가며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아무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했어. 큰일을 맞닥뜨리고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일개 백부장에 그쳐서는 안 되겠군.”
덕추는 식원의 말에 자제하지 못하고 만면에 희색이 가득해졌다. 기쁨을 꾹 참으며 별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뽀얀 얼굴에는 감격한 혈색이 돌았다. 식원의 말은 명백히 그를 발탁하겠다는 뜻이었다. 식원의 신분 때문에 덕추는 그 말이 반드시 실현되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급하긴.”
식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급은 어렵지 않아. 근데 일단 내가 동굴에서 어린 공주 하나를 구해내야 가능해.”
“어린 공주?”
여귀진은 불현듯 이해가 되었다.
“응. 숙부께서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오는 내내 말하지 않았어. 이틀간 각종 소식에 따르면 영무예는 예쁜 소주 공주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더군. 군을 이끌고 포위를 뚫을 때도 소주 공주를 데려가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처결하지도 않았다고 하니 공주는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겠지. 덕추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여기, 냄새가 좋지 않은 이 동굴에 귀한 미인이 숨어 있을 거야.”
식원이 목을 내밀고 안쪽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칠흑처럼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렴풋하게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공주를 본 적 있어? 미인인 줄 어떻게 알아?”
여귀진이 식원을 따라 동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식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주잖아. 당연히 미인이겠지. 우리 하당국의 환 공주도 미인이잖아. 제후들은 못생긴 여인을 아내로 들일 리 없어. 그럼 부친이 아무리 못생겨도 그 여식은 그렇게까지 못생길 리 없으니까. 소주 공주는 황실 방계 후손이고 초위국 국주의 자식이야. 대대로 엄마도, 할머니도, 증조할머니도 아름다웠으니 미인일 수밖에 없어.”
여귀진은 식원의 설명을 듣고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식원이 어떻게 이런 기괴한 사고를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식원이 한마디 더 보탰다.
“근데 초위국 국주는 여자래. 그럼 국주의 부군이 아마도 절세미남이겠지.”
식원은 몸을 돌려 덕추에게 물었다.
“아래는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버려진 우물입니다. 이곳의 잡부를 찾아 물어봤습니다. 그자 말로는 700년 전 상양관을 지을 때 우물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았고 상양관 지하의 수맥 위치도 무척 깊었답니다. 당시 인력을 다 끌어 모아 12개의 우물을 만들었는데 여기가 그중 하나라더군요. 나중에 수위가 낮아지면서 이 우물에서는 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물 아래에는 여전히 수맥이 이어져 있어 여름에도 매우 서늘해 누군가 우물 벽에 창고를 파 신선한 채소와 육류를 저장해 두자고 했답니다. 듣기로는 한 달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더군요.”
식원은 덕추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어렴풋하지만 우물 벽 아주 깊은 곳 측면으로 거무스레한 사각형 입구가 보였다. 돌로 만든 작은 문 같았다.
“이런 곳에 숨으면 사람도 썩어버릴 것 같은데 채소와 육류를 보관할 수 있다고?”
식원은 믿지 않았다.
“그 잡부 말로는 공주가 붙잡힌 뒤로 확실히 이곳 병영에 안치되었는데 공주와 시중드는 부인이 떠나는 것은 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든 송장이든 있겠죠. 이곳 진영을 여러 번 뒤져봤지만 다른 의심스러운 단서는 없었습니다.”
“믿든 못 믿든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정말 미인의 시신을 찾아낸다면 아마 제후국 장군들의 얼굴은 더 안 좋아질걸! 내가 내려가 보지.”
식원이 손을 뒤로 내밀었다.
덕추가 곧바로 홰를 건넸다. 젊은 백부장은 매우 총명했다. 여귀진과 식원을 데려오면서 동유를 흠뻑 적신 홰와 긴 밧줄 한 묶음도 가져왔다. 식원과 여귀진은 홰를 두 개씩 챙겨서 하나는 등 쪽의 허리띠에 꽂고 하나는 손에 쥐었다. 덕추도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얼른 들어가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습이었다.
“너는 여기 있어. 나와 여귀진 세자가 내려가 보겠다.”
식원이 덕추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수하들과 우리가 데려온 50명을 주위에 배치해 경계토록 하고 내 명령이 없이는 아무도 우물에 못 내려오게 해!”
“소장군……. 소인은 책임 못 집니다.”
덕추가 얼어붙었다.
식원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묶어두는 받침돌에 밧줄을 고정했다. 밧줄의 다른 한쪽은 여귀진과 자기 허리춤에 나누어 묶었다. 그제야 식원은 고개를 돌려 덕추를 흘깃 쳐다보며 씩 웃었다.
“왜, 곱게 자란 우리 명문가 자제들을 무시하는 거야? 나와 세자는 남회성의 대류영에서도 명성이 쟁쟁한 인물들인데 우물에 내려가는 게 뭐 대수라고?”
덕추는 위풍당당한 젊은 장군을 쳐다보고는 또 그 옆의 고귀하고도 온화해 보이는 만족 소년을 쳐다보았다. 식원과 여귀진도 덕추를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소년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줄곧 언행이 조심스러웠던 덕추는 지금 자신과 존귀한 만족 세자, 전도유망한 명문가 장군 사이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
“명 받들겠습니다!”
덕추가 고개를 숙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