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64화 (16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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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주 공주 (4)

두 사람이 걷는 길은 상양관 내의 군용 도로였다. 이 성은 지어질 때부터 주민이 없어서 모든 시설이 군사용으로 쓰였다. 반듯하게 가로세로로 돌을 놓아 만든 군용 도로에 따라 성 전체가 하나하나의 작은 정방형으로 나뉘었다. 정방형 한 곳마다 병영이 하나씩 자리해 일단 성 위로 전화(戰火)가 피워지고 동종(銅鐘)이 울리면 주둔하고 있던 모든 군사가 신속하게 결집해 성에 올라 수비했다.

처참했던 대전(大戰)이 끝난 지 이틀째였다. 성안은 여전히 짙은 연기와 냄새가 자욱했다. 곳곳이 짙은 연기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었고 길 어디에서든 다 타지 못한 장작들을 볼 수 있었다. 백의는 30만 근의 장작을 이 성안으로 던져서 영무예가 황급히 성을 나와 혈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성은 내 집에 보관해둔 상세도와 똑같이 설계되었군.”

백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당초 어떤 천재가 설계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인부의 목숨을 써서 이런 요새를 만들었을지 모르겠군. 장미 황제가 그의 자손을 위해 황성의 입구를 지키려고 참으로 머리를 많이 썼어. 영원한 난공불락의 요새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하지만 자네에게 함락되었잖은가. 독극물 투입과 화공(火攻), 두 가지 전략만으로 영무예가 성 밖으로 나와 전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

식연이 백의를 흘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웃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칭찬하면서 실은 그 참에 자네 병법과 모략이 전무후무하다 칭찬하는 게 아닌가?”

백의는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영무예도 속으로는 나와 일전을 펼치고 싶어 안달이었겠지? 그러니 성을 나온 게지. 그가 귀국을 포기하고 성안에서 움츠리고 방어했다면 우리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 걸세. 그러니 고작 그런 수단으로 이 요새를 함락한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네.”

식연은 말없이 웃으며 묵설의 목을 툭툭 쳤다. 묵설이 가볍게 뛰었다. 백의의 군마 백추련도 덩달아 가볍게 뛰었다. 두 준마는 오랜 벗처럼 군마로서의 경계심과 위엄을 벗어던진 채 말발굽을 높이 들고 갈기를 휘날리며 달렸다. 흡사 초원에서 망아지 두 필이 서로를 쫓고 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의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지만 백추련을 구속하지는 않았다. 식연은 의기양양하게 달렸다. 몸도 말의 발걸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담뱃대를 끼고 마주 오는 바람을 맞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간을 달리다가 식연이 돌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묵설은 길게 울부짖으며 멈추어 섰다. 식연은 고개를 돌려 달려온 길을 보았다. 백의도 말고삐를 당겨 멈추고는 식연과 시선을 마주했다. 백의는 흠칫 놀랐다. 식연에게서 십수 년 전 태청궁 앞 금오위의 모습이 보였다. 나태하면서도 자조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수그러들지 않는 오기가 어린, 그 얼굴이었다.

“할 말이 있나?”

백의가 물었다.

“우리가 이 길을 걸었던 것을 기억하나? 우리가 아직 황성에서 금오위로 있을 때였지.”

식연이 아래턱의 짧은 수염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당시 관직이 낮았던 우리는 우림 장군 정도설의 명을 받고 상양관에 공무를 보러 왔었어. 성에 들자마자 첫째로 우리는 몇 가지 엄령을 받았네. 그중 한 가지는 서신을 전하는 파발(擺撥)이 아니라면 전쟁이 아닐 때는 말을 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 길에서 누가 말을 달리다가 잡히면 군곤(軍棍)1)으로 다섯 대를 맞았어. 그 때문에 우리는 군영으로 가는 내내 전전긍긍하며 말고삐를 바짝 움켜쥐었지. 혹시라도 말이 달려서 군법을 어기게 될까 봐 말이야.”

식연이 돌연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지금 내가 이 상양관에서 맨 끝까지 말을 달린다고 해도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나?”

살짝 어리둥절했던 백의도 이내 약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그때 일은 기억하고 있네. 당시 사람들은 우리처럼 황성에서 온 금오위들을 멋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들로 보았지. 이 험준한 요새에만 오면 당직을 서던 도호들도 우리를 무시했어. 군령 중에는 누군가가 안내하지 않는 한 멋대로 이탈해 군영을 둘러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있었지. 군령을 어기면 군정(軍情)을 염탐한 죄로 곧장 참수될 수도 있었어. 나중에 초위국에 출사하면서 더는 상양관에 올 기회가 없었지. 이번에 오기 전에 나는 당시 군법을 위반하고 이 성의 구조와 배치를 살펴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네. 겨우 한 장의 지도에 의지해 책략을 정하려니 내심 자신감이 좀 떨어지기도 했지. 오늘 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으니 근심 한 가지는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네.”

식연은 살짝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 그동안 작위가 올라가고 기백이 드높아지면서 사람은 점점 재미가 없어졌어. 같은 일도 나는 옛날과 참 많이 달라졌다 생각하면서 말을 몰아 달리고 의기양양하게 즐거움을 누리는데 자네는 무슨 원수라도 진 마냥 죽상을 하고서는 무슨 일이든 다 군무에 연관 짓지 않나. 뭔 말을 할 기운도 안 나게 만드는군.”

식연은 담뱃대를 휘둘러 멀리 백의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같은 사람은 평생 다른 것은 못하고 명장만 해야 할 운명이야. 천하가 안정이 되면 포부를 펼칠 수 없으니 산에 들어가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 파묻히겠지.”

“포부?”

백의가 담박하게 웃었다.

“내게 무슨 포부가 있는가? 나는 그저 수레를 끄는 말일 뿐이네. 뒤에서 채찍질을 하니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말이지. 나는 식 장군 자네와 비교할 수 없어. 자네는 자유분방하고 풍운의 기개가 있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말발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낮아서 일개 도호도 자네에게 말을 달리지 말라 명령할 수 있었지. 나는 자네가 그분을 참지 못했던 걸 알고 있네. 십수 년이 지나 백작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그때의 분을 풀지 못해 안달이군. 그때 자네가 이 길을 걸으며 전전긍긍했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네. 당시 자네는 온통 불복하는 마음뿐이었어.”

식연은 백의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약간 씩씩댔으나 고개를 숙이고 담뱃대를 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간 나란히 말을 타고 걸었다. 그러다가 식연이 돌연 입꼬리에 문 담뱃대를 빼 백의에게 삿대질을 했다.

“지적하는 버릇은 세월이 흘러도 바꾸지를 못하는군. 아주 일관되게 오만해. 이러니 내가 그때도 자네를 못 견뎌했지!”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 예상치 못했던 백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가 오만했다 치세. 자네는 하늘을 찌르는 본인의 그 몹쓸 건방을 정녕 모르는 겐가? 천하에 자네의 말을 붙잡고, 자네가 하려는 일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일개 도호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도 안중에 두지 않는 자네가 아닌가. 그때 술에 취해서 이번 생에 세 가지 한이 있다 했지. 장미 황제 때 태어나지 않아 구주를 쓸어버리지 못한 것. 풍염 황제 때 태어나지 않아 만족을 북벌하지 못한 것. 북륙의 청주에서 태어나지 않아 바람을 맞으며 날개를 펼치고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수많은 미녀들을 보지 못한 것. 당시의 거침없고 횡포하며 대역무도했던 발언을 설마 잊은 것인가? 오만방자한 내가 자네의 흠을 들추어내니 귀에 거슬리는 게야?”

식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백의를 흘끗 쳐다보았다.

“내가 거침없고 횡포하며 대역무도하면 백 대장군은 치우침 없이 올곧고 신중한가?”

백의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돌연 굳으며 다소 기괴해졌다. 백의는 잠시 생각한 뒤 식연을 돌아보았다.

“아니. 나와 자네는 다른 점이 아주 많지만 내 마음은 자네처럼 거침없고 횡포하지. 천하에 내가 하려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백의의 말에 식연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 공연히 진지해져 버렸다. 그는 말을 몰아 몇 걸음 나아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는 자기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지. 하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거침없고 횡포하다는 사람이 왜 남의 수레를 끄는 말이 되었는가?”

“걱정이 너무 많아서.”

백의는 그 물음을 진즉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식연. 세상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질주할 수 있는 광활한 평원은 아니네. 만구(輓具)를 씌우면 괴력마도 마바리가 되지. 만구를 벗으면 넓은 세상을 달릴 수 있음을 알아도 내게는 더 이상 당시의 그런 마음이 없어.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사람이 아닌 게지.”

“자네의 만구는 뭔가?”

식연이 돌연 묵설을 잡아 세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의를 직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그때도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 지금 물어도 나는 대답할 수 없네.”

백의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는 만구를 쓰지 않았으니 행운이네만, 그것이 또한 자네의 불행이기도 하지.”

식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뱉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보아도 모르겠군. 오랜 세월이 흘러 벗에서 적수가 되어서도 나는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백의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몰아 떠나갔다.

갈색 군복을 입은 군사 몇 명이 등나무를 엮어 만든 들것을 지고 길가를 지나갔다. 그들은 초위국 산진창병 군복을 입고 있었다. 마주 오는 말 두 필을 보고 두 사람의 신분을 알아본 이들은 조심스럽게 들것을 벽에 바짝 붙여 길가에 놓고는 가슴을 쫙 펴고 줄지어 섰다. 그들은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았다. 백의도 왼손을 오른쪽 견갑에 올리고 군례를 행했다. 군사들도 같은 군례로 답했다.

장미 황제가 산진 진형을 만든 시대부터 쭉 이어진 군례로 산진창병들만의 예법이었다.

두 장군의 위엄에 겁을 집어먹은 군사들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군사 몇 명이 앞으로 나와 몸으로 들것을 가렸다. 우두머리인 십장이 앞으로 두 걸음 나와 고개를 숙이고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전사한 형제들로 성 밖에 묻어주러 가는 길입니다.”

백의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전사한 군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알겠고. 하지만 정말 묻어주러 가는 것이냐?”

적잖이 놀란 십장은 고개를 들었다가 백의의 무거운 눈빛에 압도되어 이내 고개를 숙였다. 백의가 나직하게 물었다.

“성 밖에 내버리러 가는 것은 아니고?”

십장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나머지 군사들도 십장을 보고 따라 무릎을 꿇었다. 십장은 살짝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 * *

1) 군대에서 훈련이나 질서 유지를 위해 사용하던 형장(刑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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