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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주 공주 (2)
“저는 11년 전에도 명백히 설명했던 것 같은데요. 우리는 그저 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사자라면, 신의 사자일 뿐입니다. 신께서 영무예를 선택하였기에 리국에 충성한 것입니다. 신께서 장공주를 선택하면 저는 장공주의 가마 앞의 사냥개가 되어 부리는 대로 부려질 것입니다.”
뇌벽성이 대나무 침상에서 살짝 몸을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장공주는 입을 가리고 낮게 웃었다.
“우리 같은 범속한 사람들이 보기에 벽성 선생 같은 분은 신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데 어찌 감히 ‘부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속세의 사람들에게도 그 나름의 입장이 있지요.”
장공주는 화제를 돌리자 다시 날카로워졌다.
“벽성 선생께 묻겠습니다. 그대가 섬기는 신은 영무예와 같은 역적을 선택하더니 또 어째서 우리 백씨를 선택한 겁니까?”
“너무 복잡한 문제입니다. 장공주께서는 우리의 교의(敎義)를 신봉하지 않으니 제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장공주께서 제게 답해주시지요.”
“아는 바는 다 말해드리지요.”
장공주는 장막 안에서 희고 고운 손을 내밀어 녕경을 불렀다.
“긴 이야기를 나누면 목이 마를 테니 벽성 선생께 차를 올려라.”
“괜찮습니다.”
뇌벽성은 손을 흔들어 누각 한 편에 진열해둔 다구를 향해 걸어가는 녕경을 제지했다.
“저는 이미 20년간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습니까?”
장공주가 물었다.
“아니요. 죽음을 재촉하게 될 뿐입니다.”
뇌벽성이 살며시 웃었다.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미소였다.
그는 검은 도포를 매만지며 반듯하게 앉았다.
“여쭙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백의가 상양관을 점령하고 황성으로 통하는 문을 차지했는데 백씨 황족은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요.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까?”
“위험?”
장공주가 되물었다.
“장미 황제가 개국한 이래 상양관은 황성의 출입구이자 우림천군이 지키는 요충지였지요. 그곳을 처음 점령한 제후가 영무예이고 그다음이 백의입니다. 지금 상양관 안에는 6국 연합군이 있습니다. 백의가 이번 전쟁으로 2만여 명의 사상자를 잃었다면 그의 수중에는 아직 4만여 명의 정예병이 있습니다. 제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현재 동륙에서 4만 정예병을 통솔하는 무양후 백의 장군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뇌벽성의 어조가 소리 없이 날카로워졌다.
장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하제일의 명장과 6국의 4만 정예병, 이런 군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동륙에 없습니다. 지금은 영무예도 그와 다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지요. 물론 백의도 영무예가 귀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요.”
뇌벽성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백의가 황성에 접근해 황제를 협박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제2의 영무예가 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너무나도 오만하고 방자한 추측이군요!”
장공주의 어조가 다시 변했다. 불시에 노기가 서렸다.
“벽성 선생은 리국의 국사이고 영무예가 신뢰하는 사람이지요. 한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터무니없는 말로 내게 자기주장을 펼치다니요. 황실과 충신의 사이를 이간하려는 겁니까? 내가 아는 벽성 선생은 큰소리치는 유세객도 요사스러운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소인배도 아닌데 말이죠!”
뇌벽성은 나직하게 긴 한숨을 뱉으며 자신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장공주. 기왕 마주 앉았으니 솔직한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장공주가 다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봄바람에 녹아내린 아름다운 봄날처럼 따스한 웃음이었다.
“벽성 선생 말씀이 맞습니다. 그저 여인네의 미심쩍은 마음에 그런 작태를 보인 것인데 역시 벽성 선생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장공주도 나직하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리국이 황성에 쳐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 백씨는 동륙의 통제권을 잃었습니다. 풍염 황제 재위 시에는 그래도 제후들이 황실에 경외감을 가졌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황제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전보다 못합니다. 나 같은 황실의 여인은 걱정이 되어도 능력을 보여줄 길이 없지요. 영무예는 그저 황실의 허약한 일면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이제 막 영무예가 가고 백의가 이끄는 제후국 연합군이 황성의 입구를 장악하였으니 백의가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가 대처할 새도 없이 변고가 눈앞에서 벌어지겠지요. 그 위험성은 황제와 측근의 신하들도 이미 논의한 바 있으나 아직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젠 선조의 영혼이 보우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하면 우리 백씨 가문의 대가 예서 끊어지지는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황실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4만입니다. 본래 우림천군 총 3만 기갑이 황성을 수호했는데 영무예가 제멋대로 그 수를 2만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우림천군의 주둔지를 성 밖 70리에 위치한 승은진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황제께 황실 내고(內庫)의 돈으로 명문가 자제들을 길러 금오위로 충당하시라 아뢰었지요. 그동안 금오위의 수가 매년 늘어나 지금은 얼추 2만 명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벽성 선생의 주상인 리국공도 눈여겨보았을 겁니다. 다만 황제를 핍박해 병마를 해산하지 않은 것은 금오위의 위협이 아직은 그의 안중에 들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명문가 자제인 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역당들을 지독히 원망하지만 아마 전장에 나간다면 3천 적려에도 충분히 전멸될 겁니다.”
장공주가 한탄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저도 뛰어난 인물이 되지 못하는 저들에 애가 탑니다. 한편으론 리국공의 계략에 걸려들어 대량의 황실 내고를 소비해 가며 겉만 번지르르한 군대를 얻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짐작과 똑같군요.”
뇌벽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겉만 그럴싸한 군대라도 전쟁을 못하리란 법은 없지요.”
“전쟁?”
장공주의 목소리에 의혹과 근심이 묻어났다.
“누구와 전쟁을 합니까?”
“장공주께서 보시기에 2만 우림천군과 꼴만 갖춘 2만 금오위가 누구와 전쟁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장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 규모와 훈련 정도라면 리국의 정예병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죠. 제후국 중의 하당, 초위, 진북, 순도 손쉽게 이들을 무찌를 수 있고요.”
“맞습니다.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장공주는 황제께 황실의 대군을 움직이라 권할 수 있겠지만, 이들 군대를 제후 병력과 비교하면 여윈 늑대와 사나운 범이라 할 수 있지요. 이들이 갑자기 사나운 범들이 싸우는 전장에 돌격한다면 그 즉시 섬멸되고 말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나 사실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장공주의 목소리에서 낙담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뇌벽성이 돌연 말머리를 돌렸다.
“사나운 범들이 이미 멈출 수 없는 격투에 빠져들었다면 여윈 늑대는 옆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승리한 맹호를 손쉽게 물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승리한 맹호는 이미 심각한 중상을 입었고, 다른 맹호들은 그의 아가리에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장공주께서 방대한 계획을 세워 영무예와 제후 연합군의 전투를 일으키고 그 안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지요. 이 수를 한 번 더 써보면 어떻겠습니까?”
뇌벽성의 두 눈이 돌연 신비스러운 빛처럼 환하게 반짝였다. 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장막 너머로 장공주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뇌벽성의 말에 놀란 듯했다.
“한 번…… 더요?”
장공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나운 범들은 벌써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피차 부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승부를 전혀 가리지 못했지요. 장공주께서는 그들이 다시 한번 전쟁하도록 몰아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반드시 죽어 나가는 한 마리가 있을 것이고, 한 마리가 더 남았다고 하더라도 장공주와 황성의 병력에 맞설 정도는 못될 것입니다.”
뇌벽성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볍게 흩날리는 목소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떻게 몰아붙이지요?”
“누구도 황성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제 생각에는 황제께 알현을 청하는 백의의 상소가 벌써 오는 중일 것입니다.”
“백의를 황성에 들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곧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니,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늙은 호랑이가…… 죽게 될까요?”
장공주는 억누를 수 없는 흥분에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백의.”
“백의?”
“백의, 식연, 강무외, 비안, 정규, 그리고 고월의까지. 제후국의 명장들이 그들의 대군과 함께 묻히게 될 것입니다! 상양관은 그들에게 감옥이 될 것입니다. 발을 들였으나 나올 수가 없지요. 그곳은 제가 그들을 위해 준비해둔, 돌아올 수 없는 땅입니다.”
뇌벽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장막 위를 훌쩍 넘어간 그의 시선은 마치 세상 끝에 이르러 벌써 그 전쟁의 끝을 본 것 같았다. 명장들의 머리가 말라 썩은 노수(老樹) 위에 대롱대롱 걸려 있고 주위는 온통 시체로 가득한 그 광경을.
장공주는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벽성 선생. 정말 그리 자신이 있습니까?”
“동륙에서 백의와 식연 같은 이를 죽이는 데 자신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한번 시도해 보는 것뿐입니다. 장공주께서 저와 함께 시도해 볼 의향이 있을지도 알아보고요.”
뇌벽성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을 일으킨 사람으로서 저는 인질이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다. 장공주께서 필요할 땐, 언제든 제 목을 가져가셔도 됩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스산한 공기가 전장에서 돌연 이곳으로 불어온 듯, 저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워졌다. 장막이 휘날렸다. 뇌벽성의 검은 도포가 바람에 펄럭이며 앙상하게 여윈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는 손을 소매 안에 넣은 채 대나무 침상 양쪽 손잡이를 붙잡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외연하게 앉아 있었다. 장막 안에서 불쑥 손 하나가 나와 장막 천을 젖혔다. 장공주의 늙었지만 여전히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또렷한 눈을 부릅뜨고 뇌벽성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래도록 한마디도 뱉지 않았다.
“그리 하면 하늘이 우리 백씨 가문에 변화의 기회를 주는 겁니까?”
마침내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느릿하면서도 분명한 말투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이것이 벽성 선생의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은혜입니까? 신께서 벽성 선생에게 전한 뜻이 대체 무엇인지요? 그분은 영무예가 천하를 손에 쥐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우리 백씨 왕조가 이어지길 바랍니까? 우리 백씨 가문과 영무예의 관계는 백의가 가져올 위험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죽기 살기로 맞서는 사이입니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이지요! 벽성 선생은 내가 영무예에게 협조해 백의를 죽이길 바라지만 백의가 죽으면 우리의 안전은 누가 보장해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