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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12)
8월 스무여드레, 이른 아침. 황성, 천계성.
박산향로(博山香爐)에서 최상품 수침향이 피어올랐다. 향기가 한 가닥 한 가닥 고요한 궁실 안으로 자욱이 퍼져나갔다.
이른 아침의 이 순간, 천계의 하늘은 높고 구름도 엷디엷은 것이 깨끗하고 투명했다. 멀리서 오래된 종이 그윽하게 울려왔다. 어느새 묘시였다. 비둘기가 하늘 높이 솟은 성벽을 넘어 사뿐하게 창 앞에 내려앉았다.
육두구를 바른 손이 비둘기 발의 대통을 풀고 그 안에서 상피지를 꺼냈다.
“영무예가 도망쳤다는구나.”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공손하게 계단 아래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였다.
“어젯밤 자정에 백의가 투석기로 장작을 던져 성을 불태우고 총공을 시작했다. 영무예가 성을 나와 결전을 벌였고 양측 전사자만 네댓만 명이 나왔지. 그럼에도 영무예는 포위를 뚫고 나갔다는군. 왜 그리된 것 같으냐?”
“영무예가 연합군에 사상자를 얼마나 냈든 일단 포위를 뚫었다면 이제는 백의가 쫓으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은 몇 개의 관문은 그를 제압하기에 충분치 않으니 더는 영무예의 귀국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무예도 똑같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니 분명 쉬면서 힘을 회복해야 할 터, 몇 년 간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제후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는 리군의 중심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니 계속해서 황실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침 우리로서는 세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요. 모든 것이 장공주의 뜻대로 되고 있습니다.”
장공주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갈수록 아부가 느는군. 분명 이번 일은 내 오판이 맞는데 네 말을 들으니 꼭 내가 전략을 잘 짠 것 같구나.”
“영무예는 마흔이 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반드시 원대한 포부도 꺾일 테니 공주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오?”
장공주가 그윽하게 말하며 탁자의 은거울을 들어 스스로를 비추어 보았다.
“그렇다면 내 나이도 너무 많은 것은 아니냐?”
“공주.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소년이 손발을 함께 쓰며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리 말하겠습니까.”
“흥!”
공주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초위국에 공주가 하나 있다. 소주 공주라고 아느냐?”
“초위국 국주에게는 아들이 없고 이 공주 하나뿐이며 애정이 지극하다 들었습니다. 공주가 돌 때 선대 폐하께서 백금으로 된 작은 배를 하사하시어 소주 공주라 이름하였다지요. 영무예가 황성을 떠날 때, 그의 선봉대가 공주의 어가를 막았다 하니 공주는 지금 상양관 안에 감금되어 있을 것입니다.”
“영무예가 포위를 뚫으며 공주는 데려가지 않았다. 만약 이 전쟁에서 고것이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볼만한 구경거리가 아직 남았겠구나.”
장공주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좋다! 어디 한번 맞춰보아라. 상양관을 함락한 뒤 누가 이 공주를 차지하겠느냐?”
“제가 듣기로 소주 공주가 하당국에 인질로 가던 중이라 들었는데, 설마…….”
장공주가 웃으며 싸라기를 한줌 쥐고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러 갔다.
“내가 폐하께 성지를 내려 소주 공주를 다른 제후 집안에 보내라 한다면?”
“공주께서는…… 초위국과 하당국의 동맹을 약화시키려는 것입니까?”
“너는 백의가 정말로 나라에 충성한다고 생각하느냐? 백의는 초위국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지위에 있다. 군사와 정치의 대권이 모두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지. 국주도 황제께 상소를 올려 그를 무양후로 추천했다. 초위국 국주도 일개 공작에 지나지 않는데 백의는 후작씩이나 된다. 백의는 서른 남짓에 벌써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면 아마도……. 난세에는 새끼 양 따위 용납하지 않지. 소백, 안 그러하냐?”
장공주가 가볍게 웃으면서 소백이라 부른 비둘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장공주가 탁자에 기댔다. 비록 젊음은 되돌릴 수 없지만, 황실 특유의 우아함과 부티는 여전했다.
부드러운 비단 침의(寢衣) 아래 몸의 굴곡은 여전히 늘씬하고 아리따웠다. 그러나 계단 아래의 녕경은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듯 여전히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그곳에 꿇어 앉아 있었다.
“아얏, 이런 짐승 같으니!”
장공주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전서구가 싸라기를 쪼다가 실수로 그녀의 손까지 쫀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핏자국 한 줄이 손아귀에 남았다.
분노한 장공주는 단번에 전서구를 붙잡아 생으로 목을 비틀어 버린 뒤 창밖으로 내던졌다. 새하얀 깃털이 탁자에 흩어져 떨어졌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구도 저 여리여리한 손에서 그런 강한 힘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공주…….”
간담이 서늘해진 녕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다.”
한참 뒤 장공주가 침착함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비둘기 한 마리일 뿐이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주면 된다. 겁낼 것 없다.”
장공주는 점잖고 고상하게 침상가로 걸어가 먹구름 같은 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하아. 몹시 피로하구나. 전쟁 한 번으로 동륙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최소한 제후들의 세력이라도 약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4만 명밖에 안 죽었구나. 겨우 4만 명이 죽었어……. 언제쯤이나 불충한 제후들을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밤중에 급보가 왔는데, 장공주께서 쉬고 계실 때라 깨우지 못했습니다.”
녕경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당양곡의 늙은 호랑이에게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느냐?”
“아니요. 며칠 내로 손님이 방문한다 합니다.”
“손님?”
장공주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어떤 손님이기에 내 옥섬돌 앞에 와서 알현을 청하지 않고 사전에 왕림하겠다 통보하는 게지? 위용이 넘치는구나.”
“뇌가 성을 쓰며 리국에서 온다고만 하였습니다.”
“뇌가라고?”
장공주가 벌떡 일어나 몸을 틀며 잠시 침묵하더니 돌연 큰 소리로 쾌활하게 웃었다.
“어찌 잊었을꼬. 내 어찌 잊어버린 게야? 벽성 선생이 결국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선 게로군! 마침 잘 왔구나! 아주 잘 왔어! 극의 막이 내려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막 시작한 것이었어!”
“장공주의 책략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지요!”
녕경이 황급히 그녀를 찬양했다.
그러나 장공주는 돌연 미소를 거두고 냉랭하게 침상 가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너는 당대 최고로 똑똑한 데다 여인의 눈치도 살필 줄 아니 쉬이 얻을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지. 하지만 뇌벽성은 내 계획 속에 없는 자다. 이자는 짐작하기가 너무 어렵다.”
장공주가 재차 침묵했다. 그녀는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짝 불안한 듯했다.
“흐음. 올 것은 결국 오는구나. 하지만 급히 알려고 할 필요 없지. 살아가면서는 평온한 순간을 얻고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백의와 영무예의 전쟁으로 아침 일찍 깨는 바람에 잠을 못 잤구나. 녕경, 이리 와라.”
장공주가 나른하게 손짓했다. 목소리에는 요염함이 묻어났다.
흰 옷을 입은 소년이 머리를 조아리며 종종걸음으로 침상에 다가갔다. 장공주는 금색 장미가 수놓아진 비단 상아 침대에 옆으로 누워 비녀를 빼고 가슴 앞의 띠도 풀었다. 한쪽 침의가 흘러내리며 약간 노화한 피부가 드러났다.
난로 속 밤숯에서 불꽃이 튀었다. 남녀가 뒤엉키는 소리와 함께 아름답고 정교한 궁전 안으로 따스하고 느른한 정욕이 가득 차올랐다.
상양관 아래.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왔다.
짙은 탄내를 머금은 서늘한 새벽바람이 들판에 불어왔다. 군수품 수레 한 대가 천천히 성문으로 향했다. 여귀진은 녹초가 되어 수레 앞 횡목에 기대 있었다. 시선을 들어보니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른 지면이 피를 흡수해 대지가 온통 시뻘겠다.
깃대가 리군 군사 하나의 등에서부터 가슴을 꿰뚫었다. 반 무릎을 꿇은 그는 얼굴을 남쪽으로 향한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꼭 기도하는 것 같았다.
전쟁터의 정중앙, 2척 길이에 달하는 초위국의 철갑 창이 깊숙이 땅속에 꽂혀 있었다. 하늘을 향한 창머리에는 사람 머리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피비린내 나는 옛 상징물 같았다. 피가 창대를 따라 흘러내려 창대는 온통 갈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의 머리는 아직 눈을 뜨고 있었는데 시선을 내리깔고서 잔혹한 전쟁터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뒤통수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유유히 흩날렸다.
그곳을 지나갈 때 여귀진은 팔을 들어 머리 위를 덮었다. 아직 그자의 머리에 선혈이 남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팔로 가린 것이었다.
먼 곳의 어느 산봉우리에서 청년 하나가 뒷짐을 지고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하얀 옷이 가볍게 펄럭였다. 위치 선택이 탁월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전체 전쟁터와 오래된 험준한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양관 안에서 모락모락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기둥을 넘어 북쪽을 보았다. 그곳은 망망한 황성 평원이었다. 그보다 더 멀리는 천계성이었고 그 너머는 순국 국경이었다. 그 뒤는 천척해협, 그리고 그 뒤는 북륙의 드넓은 초원이었다. 청년의 눈빛은 이미 수만 리를 넘어 이 세상의 끝, 구주 전체의 대지를 시야에 담은 듯했다.
그의 뒤로 어린 소년 하나가 서판을 받쳐 들고 있었다. 서동과 공자는 진국 양식의 입모(笠帽)1)를 쓰고 발은 새끼로 감싸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편안한 남색 단의(短衣)를 입었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공자는 소박한 백색 도포를 걸쳤는데 흙탕물에 더러워진 긴 옷자락이 발등을 덮었다. 한밤중에 산을 오르느라 약간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바람을 맞으며 전투를 살펴보면서도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항 공자, 돌아가시지요! 이른 아침이라 몹시 추운 데다 사람도 저리 많이 죽었잖습니까. 이 싸움에 볼 게 뭐가 있습니까?”
추위를 견디지 못한 서동이 그를 설득했다.
서동은 항씨 성의 단골손님에게 고용되어 정오에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올랐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전쟁을 지켜보았다.
이 귀공자가 짐작한 대로 정말 밤이 되자 큰 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것은 공자뿐이었다. 서동은 찬바람을 맞으면서 밤새 피바다를 이루는 전쟁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 높이에서 보면 아래의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것이 그저 개미가 대결하는 것처럼 보여서 재미도 없고 슬프지도 않았다.
“아까 말한 것을 다 기록했느냐?”
항 공자가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성제 3년 8월 스무이레 밤. 초위, 하당, 진북, 순, 휴, 진의 6국 연합군이 리국과 상양관에서 전쟁을 했다. 시체가 쌓이고 들판 가득 피가 흘렀다. 리국공 영무예는 진을 뚫고 남쪽으로 돌아갔으며 상양관 문은 이미 열렸다. 백씨 왕조의 성이 바뀌고 연호가 달라질 그날이 기대된다.”
“적었어요, 적었어. 공자, 이제 내려가시죠. 마을에 도착하면 계란을 푼 호랄탕 한 그릇 먹으면서 몸 좀 녹이자고요.”
항 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왕조가 바뀌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다. 네 녀석의 호랄탕 한 그릇보다도 중요하지 못할까? 이 지도를 자세히 보아라. 700년 이래 이런 규모의 제후 대군이 상양관에 발을 들이고 천계성에 근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출입구가 완전히 열렸으니 남쪽 세 개 국가에 황성의 주인이 될 기회가 생겼다. 북방의 순국도 이미 패주전에 말려들었다. 북륙의 만족 역시 이 기회에 군을 지휘해 남하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진북은 우족과 연합한다면 서쪽으로 쇄하산을 넘어 한 달 안에 진국을 지나 천계성을 점령할 수 있다. 장미가 시들어 떨어지고 전운(戰雲)이 잇달아 이는구나. 백씨에게는 미래가 없다. 하지만 최후에 누가 이 신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누가 차지하든 무슨 상관이랍니까. 공자와도 상관없잖아요. 뭐 왕조가 바뀌면 호랄탕은 안 마신답니까?”
“호랄탕은 마시겠지.”
공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는 일은 곧 나와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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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던 고깔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